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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장
조선의 문신, 병자호란 때의 의병장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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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장(權順長, 1607년 12월 7일[1]~1637년 2월 16일[2][3])은 조선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병자호란 당시의 의병장(義兵將)이었던 절의(節義)의 충신(忠臣)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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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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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와 별칭
형조참판을 지낸 권진기(權盡己)의 4남 2녀 가운데 장남(첫째 아들)인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효원(孝元)이며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직계 가족 관계
- 조부 : 권극중(權克中, 1558 ~ 1653)
- 조모 : 의령 남씨 부인 남난(南蘭, 남란, 1561 ~ ?) - 몰년도는 미상이나, 대략 1640년대 초기를 전후하여 하세.
일생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1625년 음서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1년 후 1626년 사직하였다. 이후 학문에 전념하다가 1636년 12월에 청나라의 군사들이 조선을 침공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두 아우 권순열(權順悅)·권순경(權順慶)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에 피난을 가서 강화산성(江華山城)을 사수함과 동시에 청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자 의병(義兵)을 모집하였으나 청나라 군사들이 강화산성을 포위하자 자신과 같이 결사항전을 맹세한 김익겸(金益兼)[5] 선생이 1637년 2월 16일을 기하여 오전의 산성 함락 직전에 강화산성 남문(江華山城 南門)에서 24세로 분신 자결함으로써 몸소 사기를 북돋워주어 끝까지 청나라 군사들과 접전을 하였는데 결국 같은 날 하오인 1637년 2월 16일(음력 1월 22일)에 끝내 강화산성이 함락되자 77세의 김상용(金尙容)[6] 선생과 모두 함께 아울러 화약에 스스로 불을 질러 동반으로 분신 자결하였으니 그의 나이 향년 31세였다.
그의 두 남동생 권순열(權順悅, 동복 아우, 당시 향년 27세.)과 권순경(權順慶, 이복 아우, 당시 향년 22세.)도 끝내 전사하였고, 그의 아내와 두 여동생과 막내 이복 남동생 권순후(權順厚, 당시 향년 18세.)도 모두 이 소식을 접하여 전해 듣고 나서 결국, 모두 스스로 목을 매어 순결히 자결하였다.
사후
그는 사후 지평(持平)과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또한 강화도(江華島)에서도 충렬사(忠烈祠)라는 사당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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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전기 자료
- 조복양, 《송곡집》 권10, 증 사헌부 지평 권 공 묘지명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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