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김응하

조선의 무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김응하
Remove ads

김응하(金應河, 1580년 ~ 1619년)는 조선의 무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의(景義),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후손들은 철원 김씨로 분파되었다.

간략 정보 김응하, 출생일 ...

생애

출생과 초기 경력

1580년 철원군 갈원동 하갈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명장 김방경의 후예로 전한다.[1] 1604년(선조 37) 무과에 급제했으나 곧 파직되었다가, 박승종의 천거로 선전관에 다시 기용되었다.[1] 1610년 재차 선전관에 임명된 이후 이항복의 발탁으로 경원판관을 거쳐 삼수군수·북우후를 역임하였다.[1]

성품과 무예

기마·궁시에 능하고 병사 지휘에 강단이 있었다는 전승이 따른다. 체력·담력에 관한 일화들은 후대 열전·향전 전승에서 무인의 덕목을 부각하는 서술 관습으로 함께 나타난다.[1]

사르후 전역과 최후

1618년 명나라가 후금을 정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김응하는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 휘하 좌영장으로 편제되어 1619년 출정하였다.[1] 2월 압록강을 건너 진군했으며, 악천후와 식량 부족 속에 전개되었다.[2]

심하 전투 이후 사르후 부차벌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김응하는 약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금군과 교전하였다. 초기에는 화포·궁시 운용으로 1차 돌격을 저지했으나, 서북풍과 모래바람으로 화기가 무력화되면서 연속 돌입한 철기병 공세에 좌영이 붕괴하였다.[3] 그는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세 자루를 번갈아 당겨 끝까지 항전했으나, 철창에 찔려 전사하였다. 당시 보고에는 “이와 같은 자가 서너만 있었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과 함께, 그를 의류장군(依柳將軍)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3] 같은 맥락의 전승으로 유하장군(柳下將軍)이라는 별칭도 통용된다.[2]

전포와 말의 귀환 전승

전장 임종 직전 전포(戰袍)를 찢어 전사일자를 적어 타던 말의 목에 매달아 귀가시켰다는 전승이 있다. 말은 본가에 도착한 뒤 먹이를 거부하여 죽었고, 별도의 관곽을 마련해 배장(陪葬)하였다는 서사가 전한다.[4]

종자·심복의 충절

당시 수행 통인 김철현(당시 16세)이 끝까지 주군을 따랐다는 기록이 전하며, 장례와 수습 과정에서도 이탈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전한다.[4]

Remove ads

사후

광해군 11년(1619) 전사 직후 조선 조정은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 충무를 내렸다.[1] 광해군 11년 3월 19일자 실록 기사에는 증직과 사후 처우에 관한 전교가 확인된다.[5] 명나라 만력제는 그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가족에게 백금을 하사하였다.[1] 동생 김응해는 이후 관직을 역임하고 어영대장에 올랐다.[6]

추모

철원 화지리 일대에 포충사(褒忠祠)가 창건되고, 현종 9년(1668) 사액되었다.[7] 숙종 9년(1683)에는 묘비가 세워졌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박태유가 글씨를 썼고, 김수항이 제액을 집자하였다.[8] 비는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금학로425번길 32(화지9리)에 있으며, 비신은 오석(96×215×32cm), 총 높이는 약 3.89m이다. 1974년 삼군영내로 이전되었다가 1984년 현 위치로 환원되었고, 1985년 9월 1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9] 한국전쟁 시기 사우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정비되었다.[7] 정조 22년(1798)에는 『충렬록』 중간 및 관판본 판화가 간행되고 어제시가 포충사에 걸려 기념이 강화되었다.[10][2]

평가

사르후 전역에서의 최후는 조선군의 화기·궁시 운용이 기상·지형 변수에 취약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휘관 개인의 결단과 항전 의지를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의류(依柳)/유하(柳下)’라는 명명은 경계 공간에서 끝까지 전열을 지킨 장수의 이미지를 굳힌 사례로 평가된다.[3][2]

같이 보기

배우

주석

참고 문헌

외부 링크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