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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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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난(金欽突의 亂)은,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원년(681년) 8월 8일(양력 9월 25일)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과 파진찬(波珍湌) 흥원(興員),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이 모반하였다는 혐의를 입어 주벌된 사건이다.

신문왕이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지 한 달여만에 벌어진 사건이었으며, 김흠돌은 소판(제3등)이라는 고위 관등을 지닌 진골 귀족에 신문왕 개인과는 장인-사위 관계이기도 했다.

신문왕은 김흠돌이 주벌된지 여드레 뒤에 앞서 반란 진압을 명목으로 소집하였던 병사와 말을 해산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였으며, 28일에는 김흠돌과 평소 친하게 지내며 그의 모반 계획을 미리 다 알았으면서도 이를 진작에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찬 김군관(金軍官) 부자에게 자결을 명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숙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문왕은 진골(眞骨)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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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김흠돌이 어떤 동기로 난을 일으키려 했는지, 그 전개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며, 연구자에 따라서는 김흠돌의 모반 혐의 자체가 그의 반대파에 의한 무고이며 김흠돌을 제거한 것은 일종의 '친위 쿠데타'라는 해석도 제기되기도 한다.

김흠돌의 난을 언급한 유일한 사료는 《삼국사기》 신문왕 원년 8월 8일과 16일, 28일 기사이다. 난이 발각되고 김흠돌 등이 주모자로 몰려 처형된 것은 8월 8일로 신문왕이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16일자 교서에서 신문왕은 "군사들을 불러 모아 효경(梟獍=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려 하자,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궁궐의 뜰에 와서 항복하였다.", "가지와 잎사귀 같은 잔당(殘黨)까지 샅샅이 찾아내 모두 처형하였다. 사나흘 사이에 역적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소탕되었다."라고 하여 진압 과정에서 벌어졌던 유혈사태를 암시하였다.

김흠돌의 난의 주모자 내지 연루자로 지목된 이들은 모두 고구려 멸망전(668년) 및 나당전쟁에서 활약하여 공을 세웠던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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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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