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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신라의 제31대 왕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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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神文王, 665년 음력 8월 이전 ~ 692년 8월 22일(음력 7월 2일, 율리우스력 8월 19일), 재위: 681년 7월 30일(음력 7월 7일, 율리우스력 7월 27일) ~ 692년 8월 22일(음력 7월 2일, 율리우스력 8월 19일))은 신라의 제31대 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휘는 정명(政明)이며, 자는 일초(日怊) 혹은 일소(日炤)인데[1] '날빛'으로 해석되며 '소지(炤知)'와 비슷한 이름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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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문무왕 5년(665년) 8월 태자에 책봉되었다고[3] 되어 있다. 문무왕은 재위 21년(681년) 7월 1일에 사망하였는데, 문무왕은 유조(遺詔)에서 태자 정명에 대해 "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었다."며 관곽 앞에서 곧바로 자신을 이어 즉위할 것을 명하였다.[4]
즉위 원년(681년) 8월, 신문왕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소판 김흠돌이 모반 혐의로 처형된다(김흠돌의 난). 즉위 한 달 만에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신문왕은 상대등 겸 병부령에 있던 김군관 부자를 김흠돌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자결을 명하는 등 난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숙청을 행하였다.
2년(682년) 6월, 국학(國學)을 설립[5]하고,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다.
3년(683년) 김흠돌의 딸 대신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새로 왕비로 맞이하였다.
10월, 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보덕국의 안승에게 소판의 관직의 등급과 함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을 하사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키자, 이에 반발하여 4년(684년) 11월, 보덕성(금마저)에서 안승의 조카인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진압하였고 보덕국을 멸하였다.
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와 지방 통치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고 지방 행정 조직을 강화했다.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달구벌로 수도 이전을 계획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7년(687년) 5월, 수조권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고, 9년(689년) 1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었다.
12년(692년) 7월 2일(양력 8월 22일)[6]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지토 천황 7년(693년) 2월 3일 임술조에는 신라의 사찬(沙湌) 김강남(金江南)과 한나마(韓奈麻) 김양원(金陽元) 등이 사신으로 와서 '왕의 상(喪)'을 알렸다고 한다.[7]
신문왕의 능은 낭산 동쪽에 마련되었다. 이후 신목태후 김씨와 사왕(嗣王) 효소왕이 황복사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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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요약
관점
신형식은 신라 역사에서 중대로의 사실상의 전환기는 신문왕 9년 전후라고[8] 평하였으며, 그 평가 그대로 신문왕은 9년의 재위 기간 동안 뚜렷한 정책 변화와 관계의 정비를 통해 중대 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내정
전제왕권 강화
- 상대등 지위의 변화
- 신문왕이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있었던 김흠돌의 난이 진압되고, 김흠돌과 평소 알고 지내면서 그의 모반 계획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대등 겸 병부령 김군관과 그 아들에 대한 자결 명령이 내려졌다. 김군관의 처형은 중대 상대등의 운명을 결정지워 준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상대등 및 병부령의 지위가 달라졌음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귀족 세력 전반의 사회적인 저하를 의미하고, 반대로 전제 왕권의 확립을 반영[9]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오묘제와 무열왕가 법통의 확립
- 유교적인 형태의 오묘제를 갖춘 종묘(宗廟)가 신라에서 처음 세워진 정확한 시점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학자에 대해서는 무열왕 때에 처음으로 세워졌다고도 하고, 문무왕 즉위 8년 11월 6일조 '선조묘' 기록을 들어 신문왕 이전인 문무왕대에도 종묘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오묘제에서 요구하는 태조 및 고조, 증조, 고조의 '사친'(四親)으로 오묘제가 확립된 것이 분명히 기록된 것은 신문왕 때의 일이다. 오묘제는 직접 자신의 세계의 조상을 제사하는 가묘(家廟) 제도로써 가조(家祖)적인 성격이 농후한[10] 것이었다. 신문왕의 오묘제 확립은 무열왕가 왕통의 강화나 그 신분의 합리화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1] 특히 무열왕의 조부로써 당대에 '정치가 어지럽고 황음무도하다'는 이유로 축출되었던 진지왕을 조묘에 봉사하여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고[12] 동시에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을 '불천지주'로 삼게 함으로써 무열왕가의 법통을 공식적으로 완결시켰다.
- 관료전 설치와 녹읍 폐지
- 신문왕 7년(687년) 여름 5월 관료들에게 전지를 하사하고 2년 뒤인 9년(689년) 중외 관리의 녹읍(祿邑)을 폐하고 해마다 조를 차등있게 내리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이는 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한 적극적인 조처로 간주되고 있다.
- 내외 관부의 정비
- 위화부(位和府) 및 예작부(例作府)가 설치됨으로써 신라 중앙관부 14부에 대한 정비가 일단락되었다.
종교 정책
- 유교
-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을 명령하는 교서에서 "위를 섬기는 법은 충을 다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관직에 있어서의 의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13]라는 유교 정치이념을 제시하였다. 신문왕대 전제왕권의 확립과 그 유지에는 유교 정치이념의 확립이 수반되었다. 오묘제 시행이나 국학의 설립, 당에 예기를 요청한 것은 그러한 유교 정치이념의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 신문왕대의 유교적 정치 이념의 표방은 도교 진흥 정책으로 지배층이 분열되고 당시의 고승 보덕이 신라로 망명하기까지 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로 치닫지는 않았다. 신문왕 8년(686년)까지 활동했던 승려 원효(元曉)가 "모든 다른 교의가 모두 그냥 그대로 불법이고, 백가의 주장들이 모두 옳지 않은 것이 없다"[14]고 하거나, 원효의 아들인 설총이 유학을 배워서 유학자가 되는 등, 신라의 유교 사상의 수용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토대 위에서 유교 정치 이념의 표방이 가능하였으며, 동시에 불교와 유교의 호혜적인 공존도 이루어졌다.[15]
- 불교
- 신문왕대에 유교적인 정치 이념이 표방되기는 했지만, 불교 사상을 소홀히 하거나 불교계의 기능이 축소된 것은 아니었다. 신문왕은 승려 경흥을 국로(國老)로 삼아 대궐에 자주 불러 들였고[16] 문무왕을 위한 원찰로써 대왕암과 가까운 동해 어귀에 감은사를 세웠다.
- 또한 685년 3월과 4월에는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德寺)가 각각 세워졌다.
외교
대당(대주) 외교
대일본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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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신문왕이 등장하는 작품
- 소설
- 정세랑 〈설자은 시리즈〉 - 2025년 기준 발표작까지 신문왕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향후 성덕왕 시대까지 집필할 계획이라고 작가가 밝혔다.
-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문학동네, 2023년)
- 《설자은, 불꽃을 쫓다》(문학동네, 2025년)
- 드라마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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