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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나 모리노부

다케다 신겐의 다섯째 아들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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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나 모리노부(일본어: 仁科盛信, 1557년경~1582년 3월 25일)는 센고쿠 시대 말기 일본사무라이 가문인 다케다씨의 가신이었다.[1] 다케다 신겐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다케다 하루키요(武田晴清)로도 알려져 있었다. 1561년 모리노부는 신겐이 시나노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니시나 가문에 입양되었다.1581년 말 오다씨-도쿠가와씨 연합군의 고슈 정벌이 시작되자, 모리노부는 동맹 중 한 명인 오야마다 마사유키와 함께 시나노 남부의 다카토성 방어 임무를 맡았다. 그가 성에 요새를 구축하자,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지명된 오다군 사령관 오다 노부타다는 항복을 협상하기 위해 불교 승려를 보냈다.그러나 모리노부는 그 승려의 코와 귀를 잘라 응답했고, 이어진 성 공격에서 사망했다.[2] 성이 함락되기 전 할복을 행하기에 앞서, 그는 오다 병사들에게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예언을 말했고, 이는 곧 실현되었다.

간략 정보 시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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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신겐 시대

모리노부는 가이국전국 다이묘였던 다케다 신겐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557년이라는 설,[3] 1558년이라는 설,[4], 그리고 1565년이라는 설 등이 있다.[5] 그러나 형제자매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1552년부터 1557년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1557년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6]

아버지 신겐은 텐분 연간부터 시나노 침공을 본격화해 시나노국 사람들을 가신으로 편입하기 시작했으며, 정복한 시나노의 유력 명문가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일족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시나노국 아즈미군의 국인 영주인 니시나씨 역시 1553년에 다케다 측에 귀속되었고, 이후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모리노부는 니시나씨를 계승하게 되었으며, 니시나씨의 통자(通字)인 ‘모리(盛)’의 편휘를 이어받아 니시나 모리마사(仁科盛政)의 양자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니시나 가문의 계승 시기에 대해서 『고요군칸』은 1561년에 아버지 신겐이 니시나 모리마사를 주살하고 모리노부가 그 가문을 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문서에 따르면, 양부로 여겨지는 니시나 모리마사의 활동이 「시모노고 기청문」을 통해 1567년까지 확인되고 있고 그 2년 뒤인 1569년에 니시나 영지가 다케다씨의 직접 지배 하에 놓인 사실로 미루어볼 때, 니시나 가문의 상속은 그 이후가 아니겠느냐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7]

『다케다 겐지 일류 계보』(武田源氏一流系図)에 따르면, 모리노부는 처음에는 니시나 모리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이후 신겐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시게의 딸과 다케다 노부카네의 딸을 각각 부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학자 구로다 모토키는 모리노부가 니시나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는 전승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모리노부의 정실은 노부시게의 딸이었고 그녀가 사망한 뒤 노부카네의 딸을 계실로 맞이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모리노부가 다케다 일문 중신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신겐의 정실인 산조 부인과 이치몬의 중신들은 모리노부와 노부시게의 딸을 결혼시켜 신겐의 뒤를 잇게 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쓰요리가 공식 후계자로 확정되는 것이 늦어진 것도 이치몬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제기하고 있다.[8]

가쓰요리 시대

신겐의 사후에는, 새 당주가 된 이복형 가쓰요리를 섬겼으며, 덴쇼 연간에는 니시나 가문의 당주로서 각종 역무 면허나 지행(知行)의 보장을 시행하였다. 또한 아즈미군의 국중(国衆)인 도도로키 지우에몬 등에게 다케다 영지내 각 번(領国)과 대립하던 에치고국과의 국경 방비와 교통로 장악을 지휘하도록 했다.[9]

가쓰요리와 우에스기 겐신 사이에 고에츠 동맹(甲越同盟)이 체결된 뒤에는 국경 방위를 맡아 수행했으며, 덴쇼 8년(1580년)에는 동맹에 따라 니가타현 이토이가와시에 위치한 네치성(根知城)의 니시하마 지역으로 진주하였다.[10] 가쓰요리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다·도쿠가와 세력과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1581년에는 오다·도쿠가와를 상대로 한 군사 재편 과정에서 본래의 거성인 시나노국 모리성 외에, 다카토성의 영주를 겸임하게 되었다.[11]

모리노부는 시나노 사쿠군의 우치야마성 대리였던 오야마다 마사나리·다이가쿠스케 형제와 함께 다카토성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1581년 5월 7일 자 령쇼지(霊松寺) 향 금제 문서나 『고란키』에서는 모리노부를 ‘노부모리(信盛)’라고 기록한 사례가 있으며, 이로 미루어보아 1581년 2월에서 같은 해 5월 사이, 다카토오 성 입성을 계기로 개명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12]

1582년 2월, 오다 노부나가의 명에 따라 오다군의 고슈 정벌이 시작되자, 병력 3,000명이 주둔한 다카토성은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이끄는 5만 대군에게 포위되었다.[13] 이때 노부타다는 모리노부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모리노부는 이를 거부하고, 사자로 온 승려의 귀를 잘라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3월 2일 새벽부터 다카토오 성은 오다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모리노부는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26세의 나이에 자결하였다.[13] 약 500여 명의 가신들도 함께 전사하여 성은 함락되었다. 오다군 역시 3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13] 모리노부의 할복 후, 그의 머리는 노부타다에게 보내졌고, 하세가와 소닌은 교토 이치조도리의 사형장에 가쓰요리·노부카츠·노부토요와 함께 효수되었다. 그러나 모리노부를 경모하던 지역 백성들은 그의 몸을 극진히 묻었다.[13]

에도 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1831년 3월, 다카토오 번주 나이토 요리아스는 다카토오 성내의 호도인 구루와에 모리노부를 제사하고, 3월 1일을 제일로 정해 ‘신조 신(新城神)’으로 모셨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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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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