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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방전쟁과 페스트
18세기 초 발생한 전염병 사태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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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방전쟁(1700년-1721년) 당시 발트 지역과 동유럽의 여러 지역은 심각한 페스트 창궐로 고통을 겪었는데, 1708년에서 1712년 사이가 그 정도가 가장 극심했다. 이 유행은 아마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를 거쳐 퍼진 제2차 페스트 범유행의 일부로 아마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폴란드 남부 핀치우프를 거쳐 북쪽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1702년 핀치우프의 스웨덴군 야전병원에 첫 감염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이후 교역로와 군대 행진로를 따라 퍼져나간 페스트는 1709년 발트해 해안의 프로이센에 닿았고 1711년경이 되면 발트 해안을 모두 감염시키고 1712년 서쪽의 함부르크에 닿았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진행과 전염병의 진행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양상을 보였다. 군인들과 난민들은 페스트의 주요 보균자였으며, 군인들 뿐 아니라 주변 지역민들의 인구 감소는 적에 대한 저항능력 또는 보급선 유지 능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발트 해 일대는 14세기 흑사병 이래로 여러 차례의 페스트 웨이브를 경험해 온 지역이었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서는 정도가 매우 극심했다. 처음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며칠 안에 죽었다. 프로이센에서 에스토니아에 이르는 발트 해 동안 지역에서는 평균 사망률이 3분의 2 또는 4분의 3까지 치솟았으며 많은 농장 및 취락들이 버려진 채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이때 순전히 페스트 감염으로 인해 죽은 사람과 기아나 다른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기록된 증상 중에 페스트의 주요 증상인 가래톳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당대의 검진은 크게 발전해 있지 못했고 사망 기록은 때때로 불확실하거나 불완전하거나 아예 소실되기도 했다. 어떤 도시에서는 1년 동안만 병이 유행했던 반면 다른 곳에서는 몇 년 내내 병이 창궐하기도 했다. 어떤 지역들에서는 여성과 아동의 사망률이 매우 높기도 했는데 아마 남자가 징병되어 간 사이의 생활고가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페스트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져 있지 않았기에, 병마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감염자를 비감염자로부터 격리하는 것 뿐이었다. 슈트랄준트, 쾨니히스베르크 등 감염자가 발생한 도시 외곽에 검역소가 세워졌다. 병이 번지지 않은 베를린 같은 곳에서도 성벽 밖에 검역소가 세워지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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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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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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