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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피터르 브뤼헐

플란데런의 화가 (1526~1569)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대 피터르 브뤼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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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피터르 브뤼헐(네덜란드어: Pieter Brueghel de Oude, 영어: Pieter Bruegel the Elder)은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르네상스 회화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풍경화 및 농촌 장면(이른바 장르화)로 유명한 화가 및 판화가로서, 이러한 주제를 대형화로 제작한 선구자중 한명이다.

간략 정보 대 피터르 브뤼헐, 신상정보 ...

그는 종교적인 주제가 회화의 당연한 소재가 아닌 시대에 성장한 첫 예술가 세대 중 한 명으로, 혁신적인 소재 선택으로 네덜란드 황금기 회화와 이후 회화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 당시 화가들의 주 생계 수단이었던 초상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수련과 여행을 마친 후 1555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당대 유력한 출판사의 판화 디자이너로 일했다. 1550년대 말경부터, 그는 회화를 주요 매체로 삼았고, 그의 모든 유명한 그림은 거의 모두 그때로부터 그가 사망한 1569년(아마도 40대 초반)사이에 제작되었다.

20세기 이후, 브뤼헐의 작품은 문학 예술과 영화계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현재 복제본으로만 전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의 그림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W. H. 오든의 1938년 시 《미술관》의 마지막 구절의 주제로 등장하였다.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솔라리스》(1972)와 《거울》(1975)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브뤼헬의 그림을 언급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역시 영화 《멜랑콜리아》(2011)에서 브뤼헬의 그림을 활용했다. 2011년에는 브뤼헐의 갈보리로 가는 길을 소재로 한 영화 《밀과 십자가》가 개봉되었다.

대(The Elder) 피터르 브뤼헐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의 아들이자 화가인 소(The Younger) 피터르 브뤼헐과 구분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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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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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로 가는 길, 1564, 브뤼헐의 두번째로 큰 작품. 124 cm × 170 cm

브뤼헐은 서유럽에서 격동적인 변화 시대에 태어났다. 1400 년대의 르네상스와 인본주의적 이상은 예술가와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는 미켈란젤로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이 주도한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가 끝나가던 시기였다. 브뤼헐이 태어나기 약 8년 전인 1517년,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하고 이웃 독일에서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 종교 개혁은 성상 파괴와 광범위한 예술 파괴를 동반했다.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와 그들의 성상 파괴를 교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1563년에 종결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종교 예술이 물질적인 것과 장식적인 특성보다 종교적 주제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당시 저지대 국가들은 17개 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스페인 기반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서 독립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종교 개혁으로 17개 주에서 여러 개신교 교파가 생겨났고, 이들은 동쪽의 신생 독일 루터교와 서쪽의 신생 영국 성공회의 영향을 받아 추종자들이 늘어났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엄격한 종교적 획일성을 적용하려 했고, 종교 재판을 통해 이를 강화하였다. 그 결과 종교적 갈등과 폭동이 심화되었고, 정치적 책략과 처형이 이어지면서 결국 80년 전쟁이 발발했다.

브뤼헐이 화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때는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다. 그가 죽기 2년 전,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에 80년 전쟁이 발발했다. 브뤼헐은 보지 못했지만, 80년 전쟁 결과, 7개 주는 독립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을 건립하게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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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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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고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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