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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키 요리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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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키 요리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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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진중에서 사망한 뒤 도키 씨 소료(惣領)였던 그의 삼촌 도키 요리토(土岐頼遠)와 함께 젊은 나이에 각지의 전장을 돌며 남조측과 싸웠다. 고코쿠(興国) 원년/랴쿠오(暦応) 3년(1340년), 전년에 에치젠(越前)에서 패하고 미노 국(美濃国)의 네오 성(根尾城)에서 농성하고 있던 남조측의 와키야 요시스케(脇屋義助)[주 1]를 9월 19일에 삼촌인 요리토 등과 함께 쳐서 와키야 요시스케는 오와리로 달아났다.[1]
고코쿠 3년/고에이(康永) 원년(1342년)에 삼촌 요리토가 고곤 상황(光厳上皇)에게 무례한 짓을 저질러 처형되고, 소료를 이어받아 미노 슈고가 되었으며, 다른 삼촌 요리아키라(頼明, 슈세이周済)의 보좌를 받았다. 쇼헤이(正平) 8년/분나(文和) 2년(1353년), 본거지를 나가모리 성(長森城)에서 가와테 성(革手城)으로 옮기고, 미노의 호족 사이토 씨(斎藤氏)를 복종시켰다. 간노(観応) 원년(1350년) 7월에 삼촌 도키 슈세이 등이 남조와 짜고 반기를 들었으나, 이를 쳐부수고 미노를 평정한다.[2]
요리야스는 '기쿄 잇키'(桔梗一揆)라 불리는 도키 씨 일족의 강력한 무사단을 거느리고 있었고, 동생 요리카쓰(頼雄), 야스사다(康貞), 다다우지(直氏), 요리타다(頼忠) 등을 미노 각지에 배치하여 그 결속을 강화하였다.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에서는 무로마치 바쿠후 초대 쇼군(将軍)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를 평소 지지하며 무공을 세워, 그 공적으로 쇼헤이 6년/간노 2년(1351년) 오와리 슈고(尾張守護)직이 주어졌다.[2] 이듬해인 쇼헤이 7년/분나 원년(1352년) 윤2월에 남조가 교토를 탈취하고, 요리야스는 미노에서 군세를 모아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와 함께 3월에 교토를 다시금 남조로부터 탈취하였다(야와타 전투八幡の戦い).[2] 그 해에 최초의 반제령(半済令)이 내려졌는데, 그 대상이 되는 3개 구니(国) 즉 오미(近江)・미노・오와리 가운데 2개 구니가 요리야스가 슈고를 맡고 있는 구니였다.[3]
쇼헤이 8년/분나 2년(1353년) 6월에 남조군이 교토로 쳐들어오자 요시아키라와 고코곤 천황(後光厳天皇)은 요리야스를 의지하여, 요시아키라는 다루이(垂井)[주 2]로, 고코곤 천황은 고지마(小島)[주 3]로 가서 머물렀다고 한다.[4]
쇼헤이 8년/분나 2년부터 이듬해까지 사무라이도코로도닌(侍所頭人)을 맡았고[4] 쇼헤이 9년/분나 3년(1354년)에 효조슈(評定衆)에 들었다. 쇼헤이 13년/엔분(延文) 3년(1358년) 쇼군 타카우지가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출가하여 법호를 센쥬(善忠)라 하였다.[4] 쇼헤이 15년/엔분 5년(1360년) 니키 요시나가(仁木義長)의 실각으로 이세 슈고(伊勢守護)의 직책까지 주어져[4] 요리야스는 도카이도(東海道) 요충지 3개 구니의 슈고를 겸하며 도키 씨의 전성기를 쌓아올리게 되었다.
조지(貞治) 5년(1366년)에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가 간레이(管領)에 취임하고 니키 요시나가가 복권, 요리야스는 이세 국 슈고의 지위를 잃었다.[4] 그러나 그 뒤로도 요리야스는 타카우지 이래의 슈쿠로(宿老) 즉 '원로'로써 대우받으며 바쿠후의 정치에 참여하는 등 그 존재감과 무게감을 잃지 않았다. 3대 쇼군이 된 요시미쓰(義満)와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와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되자 오안(応安) 3년(1370년) 아버지 요리키요의 불사(佛事)를 핑계로 멋대로 미노로 돌아가 버렸고[주 4] 이후 바쿠후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다.[5]
덴주(天授) 5년/고랴쿠(康暦) 원년(1379년) 2월 22일, 요리야스와 교고쿠 다카히데(京極高秀, 사사키 다카히데)를 추토하라는 쇼군의 추토령(追討令)이 내려졌는데[주 5] 요리야스가 요시미쓰에게 변명하여 두 사람은 사면되었다고 한다.[6] 요리야스가 사면되고 도키 일족이나 시바 요시마사(斯波義将), 사사키 다카히데(佐々木高秀) 등은 쇼군의 관저인 하나노 고쇼(花の御所)를 포위한 채(고쇼 포위御所巻) 쇼군을 향해 '호소카와 요리유키 실각'을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를 일본 역사에서는 고랴쿠 정변(康暦の政変)이라 한다.
겐추(元中) 4년/가케이(嘉慶) 원년 12월 25일(양력 1388년 2월 3일), 이비 군(揖斐郡)의 이비가와 정(揖斐川町)에 소재한 사찰 즈이간지(瑞巌寺)에서 사망하였다.[7] 조카 야스유키(康行)가 양자로써 도키 씨의 소료(惣領)를 이었으나, 쇼군 권력의 강화를 꾀하던 요시미쓰는 당시 세력이 강대해져 있던 도키 일족의 내분을 획책했고, 야스유키는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거병했다.
야스유키의 거병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자, 동시에 쇼군 요시미쓰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바쿠후군의 추토에 의해 도키 씨는 몰락했고, 야스유키가 일으키고 바쿠후가 진압한 군사 행동은 일본 역사에서 도키 야스유키의 난(土岐康行の乱)이라 불리게 되었다. 야스유키 사후 막내동생 요리타다(頼忠, 야스유키의 삼촌)가 미노 슈고로 임명되었으나, 그때 이미 도키 씨의 힘은 크게 떨어져 있었고, 다시금 미노 1개 구니를 다스리는 슈고로 영락해 버렸다.
요리야스는 문무(文武)에 두루 뛰어나 《신센자이와카슈》(新千載和歌集) ・ 《신즈이와카슈》(新拾遺和歌集) ・ 《신고즈이와카슈》(新後拾遺和歌集) 등 칙찬(勅撰)으로 편찬된 와카슈(和歌集)에 많은 와카가 실려 전해지고 있다. 법명은 겐토쿠지 젯슈 센쥬(建徳寺節叟善忠)라 하였다. 요리야스의 묘소는 아버지 요리키요의 묘소와 함께 일본 기후 현 이비가와 정의 사찰 즈이간지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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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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