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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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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나(Ravenna)는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주의 라벤나도의 도시이자 도청 소재지이다. 476년에 멸망할 때까지, 5세기 기간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이후로 동고트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 수도 역할을 했다.[1] 2025년 기준, 인구는 156,444명이다.[2]
처음에는 움브리족이 정착한 라벤나는 기원전 89년에 로마 공화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라벤나에 '클라시스'라는 군사 항구를 건설했으며, 이 도시는 중세 초기까지 아드리아해의 중요 항구로 남아 있었다. 도시는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 번영했다. 401년에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가 궁정을 메디올라눔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라벤나는 5세기의 대부분 기간 서로마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라벤나는 동고트족 왕 테오도리크에게 패배할 때까지 오도아케르 왕의 수도가 되었다. 540년, 벨리사리우스는 비잔티움 제국을 위해 라벤나를 정복했고, 이 도시는 비잔티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일시적으로 랑고바르드족의 지배를 받은 후 라벤나는 교황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약간의 방해를 제외하고는 19세기 중반까지 교황령의 일부로 남아 있다가 새로운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3]
라벤나는 내륙 도시이지만 칸디아노 운하를 통해 아드리아해와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기념물"을 구성하는 8개의 건물과 함께 잘 보존된 후기 로마 및 비잔틴 건축물로 유명하다.[4] 모자이크의 밀집도가 높기 때문에 이 도시는 모자이크를 가르치는 작업장과 학교와 연관되어 있으며 종종 "모자이크의 수도"와 같은 칭호가 부여된다.[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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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라벤나'(Ravenna)라는 지명의 기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라벤나가 에트루리아인들이 자신들을 나타낼 때 사용한 명칭인 '라센나'(Rasenna, 또는 라스나/Rasna)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정하나, 이 지적에 협의는 없는 상황이다.[8][9]
고대 시대
라벤나에 대한 기원은 불분명하다.[10]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 증거는 라벤나 지역에 움브리족이 최소한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존재했음을 추정해주며, 그 뒤로 기원전 3세기까지 영향을 받지 않다가 로마 문명과 처음으로 접촉하기 시작했다.[11] 라벤나 지역에는 세노네스족이 정착하기도 했으며, 특히 석호 지역이 아니던 라벤나 남쪽 교외 지역인 '아게르 데키마누스'(Ager Decimanus)에 집중되었다. 라벤나는 습지대의 석호에 있는 여러 작은 섬들 위로 기둥을 박아 지은 주택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이런 모습은 수세기 뒤 베네치아와 유사하다. 로마인들은 포강 삼각주 지역을 정복할 때까지 라벤나 지역을 신경쓰지 않다가, 기원전 89년 로마 공화정의 동맹시로 받아들여졌다.[3]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라벤나에서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전투를 벌이고 나서, 군사 항구 클라시스를 건립했다.[12] 자체적인 성벽으로 보호를 받고 있던 이 항구는 로마의 해군 함대에 있어 중요한 주둔지이었다. 오늘날에 라벤나는 육로로 가로 막혀 있으나, 중세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아드리아해의 주요 항구 도시이었다. 게르마니아 원정 기간, 아르미니우스의 부인 투스넬다, 마르코만니족의 왕 마로보두스 등이 라벤나에 구금됐었다.[3]

라벤나는 로마의 통치 하에서 대단히 번성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2세기 초에 70 km (43.50 mi) 길이의 수도교를 세웠다.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 라벤나의 게르만족 정착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도시를 차지하려 들었다. 이 이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더 이상의 야만족을 이탈리아로 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온 이들도 추방시켜버렸다.[13] 서기 401년, 호노리우스 황제는 서로마 제국의 수도를 메디올라눔 (현 밀라노)에서 라벤나로 옮겼으며, 이후로 라벤나는 5세기의 대부분 기간을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였고 사실상의 서로마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서기 476년 라벤나에서 퇴위당했다. 이 당시에 라벤나에는 50,000명이 거주했었다.[14] 수도 이전은 부분적으로 방어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었으며 라벤나는 늪과 습지로 둘러 싸여 있었고, 방어가 용이한 곳이라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적군에 함락됨), 라벤나의 항구 및 동로마 제국과의 해상 운송이 좋은 점으로 인해 옮겼을 수도 있다. 409년, 동고트의 왕 알라리크 1세가 손 쉽게 라벤나를 우회하여, 410년에 로마를 약탈했고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딸 갈라 플라키디아를 인질로 잡았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조카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으로 그녀의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함께 라벤나로 돌아왔다. 라벤나는 평화의 시기를 누렸으며, 이 기간에 기독교는 왕실의 호의를 받으면서, 라벤나에 정교회 예배당,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실제로 그는 이곳에 묻히지는 않았다),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등을 포함해 가장 중요한 기념물 중 일부가 이때 생겼다.
동고트 왕국
5세기 후반에 서방에서 로마의 행정력 소멸이 일어나는 가운데,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오도아케르 장군에 의해 476년에 폐위되었다. 오도아케르는 13년간 이탈리아의 왕으로 통치했으나, 489년에 동로마 황제 제논이 이탈리아반도 탈환을 위해 동고트족 왕 테오도리크 대왕을 파견하였다. 베로나 전투에서 패하자, 오도아케르는 라벤나로 퇴각하였고, 그곳에서 상대로 3년간의 공방전을 버티다가, 테오도리크는 리미니를 점령하며 라벤나의 보급을 차단하였다. 493년 테오도리크는 라벤나를 점령하였고, 직접 오도아케르를 처형했다고 전해지며, 라벤나는 동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테오도리크는 이전 통치자들의 전례를 따라, 라벤나와 그 주변에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왕궁 교회, 아리우스 대성당 (현 산토 스피리토)과 세례당, 라벤나 성벽 바로 밖에 위치한 본인의 무덤 등을 포함해 수많은 화려한 건축물을 세웠다.
오도아케르 및 테오도리크 그리고 이들의 후임자들은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었지만, 대부분 정통 로마 가톨릭을 믿던 라틴족들과 평화롭게 공존했었다. 라벤나의 정통 주교들은 중요한 건축 계획을 실시하였으며, 이 중에 남아 있는 것은 대주교 예배당이다. 테오도리크는 자신의 왕국 내 로마 시민들이 로마법 및 로마의 사법 체계 등의 적용을 받도록 허가했다. 한편 고트족은 고유 법 및 관습 체계 하에서 살았다. 519년에 폭도들에 의해 라벤나의 시나고그가 불타버리자, 테오도리크는 사제를 지출해 이 불탄 건물들을 재건하도록 했다.
테오도리크는 526년에 사망했고 그의 막내 손자 아탈라릭이 테오도리크의 딸이자 그의 어머니인 아말라순타의 권력을 바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535년쯤 두 명은 모두 사망하였고 테도도리크의 가계는 아말라순타의 딸 마타순타를 통해서 이어졌다. 여러 동고트 군 지도자들이 이탈리아 왕국을 차지하였으나, 그 누구도 테오도리크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정통 그리스교인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동고트족의 통치와 기독교의 아리우스 분파를 반대했었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휘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540년에 라벤나를 정복했다. 이탈리아 정복을 554년에 마친 뒤, 라벤나는 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 중심지가 되었다.
540년부터 600년까지, 라벤나의 주교들은 라벤나와 클라세 항구 주변으로 주목할 만한 교회 건축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념물에는 산비탈레 성당,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 있으며 산 미켈레 인 아프리키스코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라벤나 총독부

벨리사리우스가 6세기에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명을 받아 정복을 마치고 나서, 라벤나는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엑사르코스)의 근거지가 되었고, 라벤나 총독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라벤나 천지학이 저술된 것이 이 시기였다.[15]
비잔티움 제국 통치 시기, 라벤나 대교구의 대주교는 666년에 일시적으로 황제로부터 독립 교회 자격을 부여받았으나, 곧 철회되었다. 그럼에도, 라벤나 대주교는 교황 다음으로 이탈리아에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고, 이 시기 여러 신학적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중세 및 르네상스
리우트프란트 왕 시기, 랑고바르드족은 712년에 라벤나를 차지하였으나, 비잔티움 측에 이를 반환해야만 했다.[16] 랑고바르드 출신의 프리울리 공작 아이스툴프가 749년에 랑고바르드의 왕으로 즉위하고 얼마 안되어, 그는 비잔티움의 라벤나 관구를 비롯해 성 베드로 세습령을 통해 교황이 보유하던 영토로 공격적 팽창 정책을 펼쳤다.[17]
751년, 비잔티움 측은 라벤나 총독부를 아이스툴프에게 내주고 만다. 아이스툴프는 그때부터 남쪽으로 더 나아가 자신이 통치권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조공과 자신의 주권 인정을 요구하면서 로마를 위협하였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아이스툴프에게 호소를 했으나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753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족의 왕 피핀에게 도움을 구하러 프랑스로 향했다. 피핀은 호의적으로 반응했고 결국에 아이스툴프가 불법적으로 점령한 영토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반도로 원정을 감행하였다.[18]
756년에 결국, 아이스툴프는 패배하고 말았고, 5년 전 차지한 영토를 포기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동의했다. 그 당시에, 피핀은 프랑스에서 2년 전에 맺었던 약속을 이행하였고 교황에게 옛 라벤나 총독부와 로마 공작령을 포함한 넓은 영토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다. 이 행위는 피핀의 기증으로 알려져 있고 교황령 성립에 대한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19]
피핀의 기증과 교황령 성립 이후, 비잔티움 시대의 행정 체계는 9세기와 10세기에 거쳐 붕괴되었다. 교황의 지배력은 간접적이었으며, 토착 공작 및 랑고바르드 영주들이 사실상의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11세기와 12세기에, 라벤나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령 간 경쟁을 펼치는 도시가 되었으며, 제국의 임명자들과 교황 특사들이 자주 충돌하였다.
13세기 초기는 라벤나에 있어 큰 혼란의 시기이었다. 이 당시, 구엘프와 기벨린 간 분쟁이 격렬했었다. 1198년, 라벤나는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에 대항해 로마냐와 마르케 도시 연맹을 이끌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로마냐 지역의 반 황제 정서를 라벤나를 비롯 이 지역의 도시들에 대한 교황의 영향령을 강화하는 데 이용할 수 있었다.[20]
1218년, 피에트로 트라베르사리는 구엘프와 기벨린 간 분쟁 기간 우베르티니 및 마이나르디 가문을 누고 라벤나에서 세력을 잡았다. 트라베르사리 가문은 1240년까지 22년간 라벤나를 통치했으나 이들이 친 교황 세력인 구엘프 편에 서자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라벤나를 포위하고 이들을 몰아내 버렸다.[21]
프리드리히의 대리 (Reichsvikar)는 1248년까지 8년간 라벤나를 통치했으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라벤나를 장악하였고, 트라베르사리 가문은 권력을 되찾았다. 1275년, 트라베르사리 가문은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Guido Novello da Polenta)에 의해 축출당하고 만다. 다 폴렌타 가문은 세습 영주 지위를 이룩하고 교황의 봉신으로서 점차 독립적으로 통치했다.[22]
이 시기 라벤나의 가장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망명 생활을 하던 피렌체의 시인 단테였다. 다 폴렌타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 오스타시오 3세는 1441년 2월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축출당하고, 라벤나는 크레모나 조약에 따라 베네치아 영토로 합병되었다.
라벤나는 이때부터 1509년까지 베네치아의 지배에 놓였다가, 캉브레 동맹 전쟁 기간 침입을 받았다.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베네치아군에 대승을 거뒀다. 그후, 킹브레 동맹의 국가들이 베네치아의 본토 영토를 점령하였다. 베네치아가 철수하자, 라벤나는 다시 한번 교황령의 일부로서 교황의 대리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교황령은 라벤나의 지배를 유지했으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1511년에 교황은 프랑스에 대항해 스페인 및 신성 로마 제국과 새로운 동맹을 체결했다. 분쟁이 잇따르면서, 프랑스는 라벤나를 포위하고 라벤나 전투 (1512년)에서 동맹군의 구원군에 결정적 승리를 거뒀다. 이 승전 후, 프랑스는 라벤나를 약탈하고 철수하기까지 네 달을 점령하고 있었다.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동맹와 동맹을 맺고 있었음에도, 베네치아 측은 라벤나와 로마냐를 점령하였으나, 교황 측에서 1529년 이 지역을 회복하면서 축출당하고 만다.[23]
라벤나는 1636년 5월 치명적인 홍수로 피해를 입었다. 이후 300년이 넘는 기간, 운하망이 인근 하천의 물길을 바꾸고 주변의 늪지를 배수시켜, 홍수 가능성을 줄이는 한편 도시 주변에 넓은 농경 지대를 형성하였다.

현대
17세기와 18세기, 라벤나는 교황령의 일부였다가 1796년에 프랑스의 허수아비 국가였던 치살피나 공화국 /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합병되었으며, 그런 뒤 1802년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814년에 교황령으로 반환되었으나, 1859년 피에몬테 군대에 점령되었고, 라벤나와 그 주변 로마냐 지역은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라벤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연합군의 폭격이 42 차례 이뤄지며, 라벤나의 대표적인 초기 기독교 미술품의 일부가 소실되었다. 기차 역사와 그 주변을 목표로 하던 폭격은 1944년 8월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성당을 파괴했다.[24] 1944년 11월 5일, 제4 프린세스 루이즈 용기병 연대, 캐나다 제5 기갑사단, 영국 제27 창기병 연대 등이 라벤나로 진격하여 해방시켰다. 1944–45년 겨울 기간 사망한 영연방 소속 병사 937명이 라벤나 전쟁 묘지에 안치되어 있으며, 이중에 캐나다인이 438명에 달한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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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요약
관점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건축물 8곳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다:

- 정교회 세례당 또는 네온 세례당 (430년경)
-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430년경)
- 아리우스 예배당 (500년경)
- 대주교 세례당 (500년경)
-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500년경)
- 테오도리쿠스 영묘 (520년)
- 산비탈레 성당 (548년)
- 산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 (549년)
그 외 유적지:
- 산 조반나 에반젤리스타 교회 - 5세기의 건축물로, 갈라 플라키디아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고 살아남은 뒤 지었다고 전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받고 복원이 이뤄졌으며 종탑에는 종이 네 개가 달려 있는데, 그 중 두 개는 1208년의 것이다.
- 6세기의 교회 '스피리토 산토' - 6세기 이래로 상당한 극적인 변화를 겪었으며, 본래는 아리우스교의 대성당이었다. 교회의 파사드는 회랑 5개가 달린 16세기의 포르티코로 이뤄졌다.
- 산 프란체스코 성당 - 과거 교회 건축물 위로 10–11세기에 재축되었고 사도들에게 봉헌되었다가 이후에 성 베드로에게 봉헌됐다. 소박한 벽돌 외관 뒤로, 중앙 신랑과 양쪽 측랑이 있다. 초기 교회에 있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바닥에서 볼 수 있으며, 폭우가 내린 뒤에는 (지하 공간과 함께)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다. 이 지하 공간에서 1321년에 단테 알레기에리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단테는 이 교회에 속한 무덤에 묻혔으며, 현지 당국은 피렌체 측으로부터 이 가장 유명한 망명자의 유해를 돌려달라는 모든 요구를 수세기 동안 거부하고 있다.
- 바로크 풍의 교회 '산타 마리아 마조레' (525–532년 건설, 1671년 개축) - 루카 롱기의 그림 소장.
- 산 조반니 바티스타 교회(1683년) - 바로크 풍의 건축물로, 중세 시대의 종탑을 갖추고 있다.
- 산타 마리아 인 포르토 성당 (16세기) - 18세기의 건축물로 화려한 파사드를 갖추고 있다. with a rich façade from the 18th century. 중앙 신랑과 양쪽 측랑을 갖추고 있으며, 높은 큐폴라가 달려 있다. 유명한 '그리스의 성모' 그림이 소장되어 있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것이라 전해진다.
- 인근 시립 미술관 - 로마냐 지역 화가들의 여러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 '브랑칼레오네성'(Rocca Brancaleone) - 1457년 베네치아인들이 세웠다. 한때 성벽이 서 있던 곳은 현재 공원이 들어서 있다. 성곽과 성채 부분으로 나뉘며 성채의 규모는 14,000 m2 (150,694.75 ft2)이다.
- '테오도리쿠스 궁전' -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과거에 있던 산 살바토레 교회의 입구이다. 동고트족의 왕 실제 테오도리쿠스의 궁전에 있던 모자이크가 있다.
- '산테우페미아 교회' (18세기) - 이른바 석재 카펫 저택(stone Carpets Domus, 6–7세기)로 이어지며 이 저택에는 비잔티움 시대 왕궁의 화려한 모자이크가 소장되어 있다.
- 국립박물관
- 라벤나 대주교 박물관
- 카판노 가리발디 - 포르토 코르시니로 이어지는 도로에 있는 사냥용 산장으로, 1849년 8월 6-7일 밤 주세페 가리발디가 머물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26][27]
-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및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
- 산비탈레 성당의 개선문 모자이크
-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에 있는 에덴 동산 모자이크 (서기 5세기)
- 아리우스 예배당의 천장 모자이크
- 네온 예배당의 모자이크
-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비잔틴 풍의 예수 모자이크 (6세기)
- 산타폴리나레 누오보에 있는 테오도도리쿠스 왕궁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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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라벤나에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저명한 클래식 음악 행사인 라벤나 페스티벌이 열린다. 알리기에리 극장에서는 오페라 공연이 열리고 마우로 데 안드레 궁전(Palazzo Mauro de André)과 더불어 옛 산비탈레 성당과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에서는 음악 콘서트가 열린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 리카르도 무티는 라벤나에서 오랜 기간 거주한 자로, 정기적으로 이 축제에 참가하고 있다.
문학

-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하자, 단테는 여생의 대부분을 라벤나에서 보냈으며, '신곡' 지옥편 제5곡에서 라벤나에 대해 언급한다.
- 16세기에, 노스트라다무스는 예언 네 개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 "라벤나의 마냐바카(Magnavacca, 운하)는 큰 곤경에 처하게 되고, 포르나세(Fornase)에서는 15명에 의해 운하가 차단된다", 이는 프랑스인 15명에 의한 차단이라고 한다.[28]
- 페루자까지 이어진 전투의 현장이자, 그 뒤에 일어난 신성한 탈출의 장소로, 썩어가는 말들이 먹히도록 남겨진다.
- 라벤나 근처에서 '한 여인'이 납치되고, 이어 리스본의 대리인이 바다에서 70명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 라벤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출생지 후보로 거론되는 세 곳의 ‘비슷한 이름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며, 슬로베니아를 노예로 부릴 것이라 한다 (라우네나코로슈켐 참조).[29]
- 라벤나는 1610년대에 토머스 미들턴이 쓴 희곡 '마녀'의 무대이다.
- 바이런 경은 1819년부터 1821년까지 라벤나에서 거주했으며, 이 지역 귀족이자 젊은 유부녀 테레사 구이촐리의 사랑을 받았다. 라벤나에서 그는 '돈 후안'의 집필을 이어나갔고, 'Ravenna Diary', 'My Dictionary', 'Recollections' 등을 썼다.[30]
- 라벤나는 메리 셸리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최후의 인간'에서 주인공 리오넬이 에게해에서 극심한 폭풍으로 동료들을 잃고 도착한 장소이다.
- 오스카 와일드 (1854년–1900년)는 1878년 시 '라벤나'를 썼다.[31]
- 상징주의 서정파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 (1880–1921)은 이탈리아 여행 (1909년 봄)에 영감을 받아 '라벤나'라는 이름의 시를 썼다 (1909년 5월-6월).
-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 헤르만 헤세 (1877년–1962년)는 여행 중에 라벤나를 들렀고 영감을 받아 이곳에 대한 시 두 작품을 썼다 ('Ravenna (1)', 'Ravenna (2)').
- T. S. 엘리엇 (1888년–1965년)의 시 'Lune de Miel' (프랑스어로 집필)은 인디애나에서 온 신혼부부가 기둥 윗부분의 조각 장식으로 유명한, 라벤나 바로 외곽에 위치한 고대 성당인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 근처에서 잠을 자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조각에서는 바람에 흩날리는 아칸서스 잎이 표현되어 있으며, 다른 곳의 기둥에 새겨진 고요히 쉬는 잎사귀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 J.R.R. 톨킨 (1892년–1973년)은 라벤나에서 미나스 티리스에 대해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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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1964년 영화 '붉은 사막'을 필라사 계곡의 산업화 된 지역에서 촬영했다.
교통
라벤나는 중요 상업 및 관광 항구를 두고 있다.
라벤나역은 볼로냐, 페라라, 레체, 밀라노, 파르마, 리미니, 베로나 등으로 향하는 트렌이탈리아 직통 열차를 운영하고 있다.
라벤나 공항이 라벤나에 위치해 있으며 가장 가까운 민간 공항은 포를리 공항, 리미니, 볼로냐 등에 있다.
라벤나를 지나가는 고속도로에는 볼로냐에서 시작하는 A14-bis, EU 45(로마에서 연결)와 55호선 (베네치아에서 SS-309 "Romea"로 연결)등 남북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페라라–리미니를 잇는 지역 간 축선인 SS-16 (일부는 "Adriatica"라고도 함) 등이 있다.
놀이 공원
- 미라빌란디아
- 사파리 라벤나
스포츠
라벤나를 연고로 하는 축구 팀은 라벤나 FC가 있으며, 현재 이탈리아 프로 리그 3부에 해당하는 세리에 C에 소속되어 있다.
APD 리벨레 1927는 라벤나 남쪽 마을 Castiglione di Ravenna를 연고로 하는 축구 팀이다.
라벤나의 모래 사장에서 2011년 FIFA 비치사커 월드컵이 열렸다.
유명 인물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로마 황제
- 라우라 파우시니 : 이탈리아의 가수
- 아르칸젤로 코렐리 :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자
- 피터 다미안 : 로마 가톨릭 성인 및 수도사
-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 귀족
- 구이도 1세 다 폴렌타 : 라벤나의 영주
- 프란세스코 바라카 :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의 공군기 조종사
- 이바노 마레스코티: 배우
- 주세페 비탈리: 수학자
-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수학자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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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Wikiwand -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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