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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우차오 사건
중일전쟁의 단초가 된 사건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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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 문화어: 로구교 사건) 혹은 7·7 사변(七七事变)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핑 서남쪽 방향 루거우차오(루거우 다리, 중국어 간체자: 卢沟桥, 정체자: 盧溝橋, 병음: Lúgōuqiáo)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어진 발포 사건으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은 전쟁 상태로 돌입, 그 후 전선을 확대하게 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5년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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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영어권에서 이 전투는 주로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1] 루거우차오는 11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화강암 다리로, 금나라 시대에 처음 건설되었고 후에 청나라 강희제 통치기인 1698년에 복원된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구조물이다. 이 다리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 기록인 동방견문록에 등장하면서 서구권에서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2]
또한 이 다리는 융딩허의 옛 이름에서 유래한 현지 이름을 따서 "루커우차오",[3] "루거우차오",[4] 또는 '루거우교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5] 이것은 일본에서 이 사건의 일반적인 이름이며(蘆溝橋事件, Rokōkyō Jiken), 중국어와 한국어에서도 대체로 이 이름을 사용한다.(한국어:노구교 사건). "루거우차오 전투",[6] "루거우차오",[7] 또는 "루커우차오"로도 표현되거나 번역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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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간의 긴장은 만주 사변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건설하고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국가원수로 세운 1931년부터 고조되어 왔다.[9]침략 이후, 일본군은 원자재와 산업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북부로 통제력을 확장했다. 국제연맹의 조사 위원회는 일본을 비판하는 리튼 보고서를 발표했고, 그 결과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10] 중국국민당(KMT) 정부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1933년 일본과의 탕구협정에 동의했다. 이후 여러 차례 "사건" 또는 제한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한 후 불안정한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11]
1901년 9월 7일 신축조약의 조항에 따라, 중국은 베이징에 공사관을 둔 국가들에게 베이징과 톈진을 연결하는 철도를 따라 12개 특정 지점에 경비병을 주둔시킬 권리를 부여했다. 이는 수도와 항구 간의 열린 통신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1902년 7월 15일 보충 협정에 따라, 이들 병력은 중국 내 다른 국가 당국에 통보하지 않고 기동 훈련을 수행할 수 있었다.[12]

1937년 7월까지 일본은 중국에 주둔하는 병력을 주로 철도를 따라 약 7,000명에서 15,000명으로 늘렸다. 이 병력의 규모와 그에 수반되는 물자량은 유럽 강대국들이 배치한 파견대 규모의 몇 배였고, 신축조약이 정한 한도를 훨씬 초과했다.[12] 이 무렵 일본 제국 육군은 이미 베이징과 톈진을 포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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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개
당시 이 부근에 주둔한 군대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宋哲元)의 29군이었고 일본군은 다시로 간이치로(田代皖一郎)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다. 양 군은 서로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병사는 20분 뒤에 부대로 복귀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중국 주둔지역으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중국군은 거절하였다. 일본군은 곧 전투태세에 들어가 다음 날인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양측이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일단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군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 국민당은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할 것.
- 국민당은 7월 7일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질 것.
- 쑹저위안 등 29군의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할 것.
이같은 조건을 내걸고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 본국의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침략을 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사용’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다.
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곧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인한 긴장은 중일 전쟁이 7월 말의 베이핑-톈진 전투와 8월의 상하이 전투로 이어지면서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간의 전면전으로 직결되었다.
1937년 베이핑-톈진 전투 중 마가군의 무슬림 장군 마부팡은 일본군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전보를 정부에 알렸다.[13] 루거우차오 사건 직후, 마부팡은 무슬림 장군 마뱌오 휘하의 기병 사단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파견하도록 조치했다. 마부팡이 파견한 첫 기병 사단의 대다수는 살라르족으로 구성되었다.
1987년, 다리가 재건축되었고 중일 전쟁 발발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다리 근처에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이 건립되었다.[14]
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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