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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게르스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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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게르스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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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게르스틀(독일어: Richard Gerstl, 1883년 9월 14일~1908년 11월 4일)은 오스트리아화가이자 드로잉 작가이다. 인간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한 표현적 초상들, 생전의 낮은 평가, 그리고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아내 마틸데 쇤부르크와의 불륜, 그리고 그 불륜으로 인한 자살로 유명하다.[1]

간략 정보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 신상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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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부유한 유대인 상인이었던 에밀 게르스틀과 가톨릭 신자 마리아 페이퍼 사이에서 태어났다.[2] 젊은 시절, 게르스틀은 예술가가 되고 싶어했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딛쳤다. 유명한 의 피아리스텐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학교를 떠나야 했고, 아버지는 그에게 가정교사를 붙여주었다. 1898년, 15세의 나이에 게르스틀은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독선적이고 까다로운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 밑에서 공부했다. 게르스틀은 빈 분리파의 스타일과 그가 거만하다고 느꼈던 예술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그리펜케를을 "네가 그림 그리는 방식대로라면 눈밭에 오줌을 갈겠다!"라고 선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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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908년,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

반 분리주의적 회화 스타일을 인정받지 못해 좌절한 게르스틀은, 2년간 어떠한 공식적인 지도 없이 그림을 계속 그렸다. 이후 1900년과 1901년 여름, 게르스틀은 루마니아 바이아마레에서 시몬 홀로시의 지도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화가 하인리히 레플러의 자유주의적인 경향에 영감을 받아, 게르스틀은 다시 정식 교육을 받고자 했다. 불행히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를 기리는 행렬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것이 그를 더욱 소외시켰고 그의 퇴출로 이어졌다. 게르스틀은 그러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예술가에게는 가치 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게르스틀은 1908년을 마지막으로 레플러의 스튜디오를 떠났다.

1904년과 1905년에 게르스틀은 그의 전 아카데미 동급생이자 친구인 빅토르 하머와 스튜디오를 공유했다. 하머가 게르스틀을 레플러의 지도에 입학시키는 것을 도왔고 그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게르스틀이 다른 예술가들과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1906년경 게르스틀은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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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게르스틀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1907년 7월 7일부터 14일까지 빈 미술아카데미에서 열린 전시가 게르스틀의 유일한 전시였다. 그는 당시에 유행했던 유겐트슈틸구스타프 클림트 스타일을 강하게 반대하고 거부했다. 그는 젊은 예술가로서 수년 동안 소위 쇤베르크 서클에 속했다. 그의 스타일은 빈 아방가르드와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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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배경의 반나체 자화상, 1904/5년, 레오폴트 미술관

그의 작품은 1930년대 초 재발견되었고, 그 중요성은 1945년 이후에 인정받았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대표자라고 할 수있는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존 작품으로 약 60점의 유화와 8점의 드로잉이 알려져 있으며, 상당수가 레오폴트 미술관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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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문덴 근처 호숫가 도로, 1907년

리하르트의 형제 알로이스 게르스틀은 리하르트 게르트를의 아틀리에에서 캔버스와 스케치를 발견해서 여러 해 동안 운송주선인에게 맡겼다. 결국, 화랑주 오토 칼리르 덕분에 34점의 그림이 파괴로부터 살아남았다. 칼리르는 그림들을 구매하고 복원했으며, 그의 1931년 전시회 "리하르트 게르스틀 – 화가의 운명"을 열었다. 이 전시회는 나중에 뮌헨, 베를린, 아헨에서도 열렸는데,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핵심 인물이 되었고, 전후 시대의 예술가들, 심지어 빈 행동주의 시대에도 영감을 주었다. 1980년대 이후, 세기 말 빈 미술 전시회에 그의 작품이 포함되면서 게르스틀은 미술사 정전(正典)에 편입되었다.

스위스 추크에 있는 미술관 쿤스트하우스 추크의 캄 컬렉션(Stiftung Sammlung Kamm)은 게르스틀의 그림 10점을 8점의 캔버스에 소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풍경화와 다양한 초상화가 포함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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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베르크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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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스틀이 그린 아르놀트 쇤베르크, 빈 박물관

게르스틀은 다른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지만,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끌렸고, 빈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자주 참석했다. 1907년경, 그는 당시 같은 건물에 살던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게르스틀과 쇤베르크는 서로 각자의 재능을 존경하였다. 게르스틀은 쇤베르크에게 미술을 가르쳤다고 한다.[6]

이 시기에 게르스틀은 쇤베르크 가족과 같은 집의 아파트로 이사하여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이 중에는 쇤베르크의 아내 마틸데, 알반 베르크, 쳄린스키의 초상화도 있다. 그의 양식은 독일 표현주의를 예고했으며, 오스카르 코코슈카의 작품처럼 파스텔을 사용했다. 게르스틀과 마틸데(그보다 6살 연상)는 매우 가까워졌고, 1908년 여름,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을 떠나 게르스틀과 함께 빈으로 여행했다. 쇤베르크는 그녀에게 헌정하는 그의 두 번째 현악 사중주를 작곡하는 중이었다. 마틸데는 10월에 남편에게 돌아갔다.[6]

예술 분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실감과, 마틸데와의 이별과 동료들로부터의 고립으로 괴로워하던 게르스틀은, 1908년 11월 4일 밤 스튜디오로 들어가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편지와 그림을 불태웠다.[6] 많은 그림들이 화재에서 살아남았지만, 그의 작품과 개인 서류 및 편지들이 상당수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그림 외에 손상 없이 살아남은 드로잉은 단 8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류를 불태운 후, 게르스틀은 스튜디오 거울 앞에서 목을 매고 자신을 찔렀다.[7]

이 사건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음악이 있는 드라마"(즉, 오페라) 행운의 손은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5세에 자살한 후, 그의 가족은 게르스틀의 스튜디오에서 남아있는 그림들을 꺼내 창고에 보관하다가, 그의 형제 알로이스가 1930년 또는 1931년에 미술상 오토 칼리르에게 보여주었다. 게르스틀은 생전에 단 한 번도 전시회를 열지 못했지만, 칼리르는 그의 노이에 갈레리(Neue Galerie)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8] 하지만 오스트리아 나치의 방해 때문에, 게르스틀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게르스틀의 유작으로 알려진 작품은 그림 66점과 드로잉 8점이 있지만, 더 많은 작품이 파괴되었거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주요 작품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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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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