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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오스트리아의 화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구스타프 클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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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독일어: Gustav Klimt,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는 오스트리아상징주의 화가이자 빈 분리파 운동의 주요 회원이다. 그의 작품은 유럽 아르누보 양식에 기여했다. 클림트는 그의 회화, 벽화, 스케치 및 기타 오브제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여성의 신체로,[1]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하다.[2] 그는 키스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897년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반(反) 아카데미즘 운동을 하였다. 빈 분리파 예술가들 중에서 일본 미술과 그 기법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화가이다.[3] 1906년에는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을 결성하여 전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클림트는 아르누보 운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미술가 중 하나였다.

경력 초기에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건축 장식에 종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더 개인적인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1900년경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화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논란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이후 더 이상 공공 의뢰를 받지 않았다. 이후, 많은 작품에 금박이 포함된 그의 "황금 시기" 그림들로 새로운 성공을 거두었다. 클림트의 작품은 그의 젊은 동료 에곤 실레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클림트는 1918년에 뇌졸중폐렴으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이래로 클림트의 그림들은 경매에서 개별 미술품 중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한국에서는 '유디트', '베토벤 프리즈'를 비롯한 200여점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2009년 2월 ~ 5월 간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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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어린 시절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빈 근교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 아들과 네 딸 중 둘째였다. 그의 어머니 안나 클림트(혼전 성 피스터)는 음악 연주자가 되겠다는 이루지 못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 1세는 이전에 보헤미아의 농민 가정 출신으로 금 세공가였다.[4][5] 클림트의 남동생인 에른스트와 게오르크 클림트까지, 세 아들 모두 어릴 적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클림트의 형제자매들은 가끔 그의 초기 작품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6]

클림트의 아버지는 종종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클림트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았다. 1862년부터 1884년 사이에 가족은 더 싼 숙소를 찾아 5번이나 이사해야 했다. 1874년 5살 된 안나가 오랜 병으로 사망하면서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 거의 같은 시기에 맏딸 클라라는 정신 장애를 겪고 종교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녀는 회복되지 못했고, 그들의 어머니는 자주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7]

클림트는 일반 시민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그림 실력은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8] 열네 살 때 그는 현재 응용미술 및 공예 학교인 빈 쿤스트게베르베슐레(현재 빈 응용예술대학교)에 입학하여 1876년부터 1883년까지 건축 회화를 공부했다.[5][9] 그는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밑에서 공부했으며, 1881년 라우프베르거가 사망한 후에는 율리우스 빅토르 베르거 밑에서 공부했다. 클림트는 당시 빈 최고의 역사 화가였던 한스 마카르트를 존경했으며, 그의 성공을 재현하고자 했다.[10] 클림트는 보수적인 교육 원칙을 쉽게 받아들여, 그의 초기엔 대부분 아카데미즘으로 분류되는 작품을 그렸다.[5] 그는 대규모 공공 건물의 실내 벽화와 천장화를 그리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다.[11]

퀸스틀러콤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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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구스타프 클림트

1877년,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는 아버지처럼 세공가가 되었고, 그 또한 쿤스트게베르베슐레에 입학했다. 클림트, 에른스트, 그리고 입학 시험에서 클림트가 만났던 친구 프란츠 폰 마취는 곧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1880년경, 그들은 퀸스틀러콤파니(Künstlercompagnie, 예술인 회사)라는 팀을 결성하여 수많은 의뢰를 받았다. 그들은 또한 빈 미술사 박물관에 벽화를 그리는 선생님을 돕기도 했다.[5] 라우프베르거는 그들을 극장 건축 전문 회사인 빈의 펠너 & 헬머에 추천했고, 그들은 리예카, 라이헨베르크, 카를스바트부쿠레슈티 등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12][13]

1883년 학교를 졸업한 후 에른스트, 클림트, 마취는 빈에 공동 스튜디오로 만들고 다양한 의뢰 작업을 함께 했다. 의뢰중에는 루마니아 왕궁인 펠레슈성을 위한 조각을 기반으로 조상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작업도 있었다.[6] 1886년 스튜디오는 카를스바트 시립 극장의 그림 장식 작업에 참여했으며, 특히 돔형 천장과 극장 커튼을 그렸다.[14][15] 같은 해 그들은 빈의 부르크 극장의 계단에서 천장과 스팬드럴 벽화 작업도 시작했다. 1888년 이 벽화가 완성되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클림트에게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예술적 영예인 황금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5][15] 그는 또한 뮌헨 대학교빈 대학교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16] 빈 시의회는 구 부르크 극장을 철거하기 전, 클림트에게 극장 내부 풍경을 그리도록 의뢰했다. 그의 그림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들은 그가 빈 상류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데 도움이 되었고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1890년, 클림트는 이 작품으로 새로 제정된 카이저프라이스(Kaiserpreis) 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다.[17][18]

1892년 퀸스틀러콤파니는 계속 성공을 거두며 요제프슈타트 지구의 더 큰 스튜디오로 이전했다. 그러나 그해 말 클림트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사망했고,[15] 그의 동생 에른스트는 심한 감기 후 심낭염으로 사망했다.[19] 이들의 죽음은 클림트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그는 이제 남은 두 가족의 재정적 책임을 맡게 되었다. 슬픔은 클림트의 예술적 비전에 영향을 미쳤다(그는 다음 몇 년 동안 거의 작품을 제작하지 않았다).[19] 이후 그는 새로운 스타일로 전환하였다. 그 특징은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1891), 팔라스 아테네 (1898), 누다 베리타스(1899) 등의 작품에 누다 베리타스("벌거벗은 진실")를 상징적인 인물로 포함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20][21] 역사가들은 누다 베리타스를 포함함으로써 클림트가 당시의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무시했던 합스부르크 군주국과 오스트리아 사회를 모두 비난했다고 믿는다.[22]

클림트는 1890년대 초 오스트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에밀리 루이제 플뢰게를 만났는데, 그녀는 에른스트의 죽음 이후 과부가 된 그의 처형 헬레네 플뢰게의 자매였다. 에밀리는 그의 평생 동반자가 되었고, 그들의 관계는 친밀했지만 아마도 플라토닉하게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23][24] 클림트가 1902년에 그녀의 전신 초상화인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를 그렸고, 5년 뒤에 그린 키스 (1907-08)도 그녀의 이미지로 믿어진다. 클림트는 그녀가 만들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많은 의상을 디자인했다.[25] 클림트는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최소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사후, 이들 중 4명의 자녀에 대한 법적 권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24][26]

1894년, 클림트는 빈 대학교 대강당 천장을 장식할 세 점의 그림, 이른바 클림트 빈 대학교 천장화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1900년이 되어서야 완성된 그의 세 그림, <철학>, <의학>, <법학>은 급진적인 주제와 내용으로 비판을 받았고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27] 클림트는 전통적인 알레고리와 상징주의를 보다 노골적으로 성적인(따라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더 혼란스러운) 새로운 언어로 변형시켰다.[27] 정치적, 미학적, 종교적인 모든 분야에서 대중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 결과, 그 그림들은 대강당 천장에 전시되지 못했다.[28] 이것이 작가가 수락한 마지막 공공 의뢰가 되었다. 세 점의 그림은 1945년 5월 퇴각하는 독일군이 임멘도르프 성을 불태웠을 때 파괴되었다.[29][30] 이때 <피아노를 치는 슈베르트>, <여성 친구들> <월리 (초상화)>, <음악 (II)> 등 10여 점의 그림이 함께 파괴되었다.[31][32]

빈 분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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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분리파 건물베토벤 프리즈 부분, 빈 (1902)

1897년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창립 멤버이자 회장, 그리고 그룹의 정기 간행물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의 발행인이 되었다. 그는 1908년까지 분리파에 남아 있었다. 이 그룹의 목표는 파격적인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최고의 해외 예술가들의 작품을 빈으로 가져오며, 회원들의 작품을 선보일 자체 잡지를 발행하는 것이었다.[33] 그룹은 매니페스토를 선언하지 않았고 특정 스타일을 장려하지도 않았다. 자연주의자, 사실주의자, 상징주의자 모두 공존했다. 정부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했고 전시관 건립하기 위한 공공 토지를 임대해 주었다. 이 그룹의 상징은 그리스 여신이자 정의, 지혜, 예술의 여신인 팔라스 아테나였다. 클림트는 1898년에 팔라스 아테나를 급진적으로 묘사하였다.[34]

그의 누다 베리타스 (1899)는 기성 체제를 더욱 "흔들어 놓으려는" 그의 시도였다.[35] 이 그림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붉은 머리의 여인이 진실의 거울을 들고 있고, 그녀 위에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글이 양식화된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너의 행동과 예술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소수만 만족시켜라.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은 나쁜 일이다."[36]

1902년, 클림트는 분노에 사로잡혀 벌거벗은 여인이 과시적으로 엉덩이를 드러내는 그림(금붕어)에 "내 비평가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붙이려 했다가 친구들의 만류로 포기했다.[31]

1902년, 빈 분리파 14주년 기념으로, 클림트는 베토벤을 기념하고 막스 클링거의 기념비적인 다색조 조각을 특징으로 하는 베토벤 프리즈를 완성했다. 프리즈는 전시회만을 위해 가벼운 재료로 벽에 직접 그려졌다. 전시회 이후 그림은 보존되었지만, 1986년에 복원될 때까지 다시 전시되지 않았다. 베토벤 초상화의 얼굴은 작곡가이자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감독인 구스타프 말러와 닮았다.[37]

1905년, 분리파 내부의 불화가 심화되었고, 미트케 갤러리의 예술 고문 카를 몰이 동료 분리파 회원들에게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공격 받자 강력한 논란이 발생하여, 클림트의 주도로 실제적인 내부 분열이 발생했다. 이듬해 클림트는 "쿤스트샤우"(미술 전시회) 혹은 "클림트 그룹"이라고 불리는 그룹을 결성했는데, 이 그룹에는 카를 몰과 오토 바그너를 비롯한 다른 중요한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이 포함되었다.[38]

이 시기에 클림트는 개인 작품도 꾸준히 제작했다. 1890년대 후반부터 그는 아터호 호숫가에서 플뢰게 가족과 함께 매년 여름휴가를 보냈고, 그곳에서 물가의 성과 같은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풍경화는 인물화 외에 클림트가 진지하게 관심을 가졌던 유일한 장르이다. 그의 강렬함을 인정하여 현지 주민들은 그를 발트슈라트("숲의 악마")라고 불렀다.[39] 클림트의 아터호 그림들은 인물화에 적용한 정교한 디자인과 강렬된 패턴이 특징이다. 아터호 작품의 깊은 공간은 단일 평면으로 너무 효율적으로 평탄화되어, 클림트가 망원경을 사용하여 그렸다고 여겨진다.[40]

황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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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2006년 1억 3,500만 달러에 경매됨, 노이에 갤러리, 뉴욕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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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 빈 (1907–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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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는 그림에 장식적인 패턴을 자주 사용했다. <포옹>, 스토클레 궁전, 브뤼셀 (1905–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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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크롬 기술을 사용하여 클림트를 촬영한 초기 컬러 사진, 19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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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의 <밝은 푸른색 스목(Smock)을 입은 클림트>, 1913

1900년부터 구스타프 클림트는 주로 "여성 화가"로 유명해졌다. 그는 매년 한 점씩 대형 여성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이 작품들에서 아르누보의 원칙인 평면성, 장식성, 금박 장식을 적용했다. 동시에 그는 알레고리구약성경의 여주인공들에게 몰두했는데, 이들을 위험한 "팜 파탈"로 변모시켰다. 그는 에로스, 성과 여성성을 매혹적인 위험으로 다양하게 해석하였다. 삶, 사랑, 죽음은 클림트 작품의 중요한 주제로 규정될 수 있다.[41]

클림트는 분리파 운동 초기 시절부터 그림에 금박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후 이른바 "황금 시대"를 이끌어내었다. 이 시기의 가장 초기 작품으로는 팔라스 아테네 (1898)이며, 유디트 1 (1901)또한 다른 주목할 만한 초기 작품이다. 이 시기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으로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1907), 키스 (1907–08), 그리고 스토클레 프리즈 (1905–1911)가 있다.[42] 클림트의 황금 시대는 긍정적인 비평과 재정적 성공을 이끌었다.

클림트는 주로 국제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유럽 전역을 여행했지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유명한 베네치아와 라벤나에서 그의 금박 작품과 비잔틴 양식의 이미지에 가장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1904년, 그는 부유한 벨기에 산업가의 집이자 아르누보 시대의 가장 웅장한 기념물 중 하나인 호화로운 스토클레 궁전 작업에 다른 예술가들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했다. 클림트가 식당에 작업한 <성취>와 <기대>는 그의 장식 작품 중 최고로서, 그가 공개적으로 말했듯이, "아마도 내 장식 발전의 궁극적인 단계"였다.[43]

1905년 클림트는 생명의 순환을 묘사하는 여인의 세 시기를 그렸다. 그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누이인 마르가레트 스톤보로-비트겐슈타인의 결혼을 기념하여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44] 그리고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클림트는 털옷을 두른 사교계 여성들의 그림 다섯 점을 그렸다.

클림트는 집에서 일하고 쉴 때 보통 샌들을 신고 속옷 없이 긴 가운만 걸치고 생활하였다. 그의 삶은 소박하고 다소 은둔적이었으며, 그는 예술, 가족, 그리고 분리파 운동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결국 그와 많은 동료들이 분리파 운동을 떠났다). 그는 빈 커피 하우스 문화를 피했고 다른 예술가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클림트의 명성이 올라가자 그는 매우 선별적으로 의뢰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그림 기법은 때로는 매우 신중하고 고통스러웠고, 그는 그의 모델들에게 긴 시간의 포즈를 요구했다. 성적으로 매우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관계를 비밀로 유지했고 개인적인 스캔들을 피했다.

클림트는 주로 빈의 유대인 상류 부르주아지 출신인 일부 고객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특히 상류층 출신 모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인간의 성에 있어서 여성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허용했기 때문에 당대에는 진보적인 인물로 여겨졌다.[45]

클림트는 자신의 비전이나 방법에 대해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주로 플뢰게에게 엽서를 썼고 일기는 쓰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자화상에 대한 주석"이라는 드문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화상을 그린 적이 없다. 나는 그림의 주제로서 나 자신에게보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더 관심이 있다... 나에게 특별한 것은 없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 그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46]

1901년 헤르만 바르는 클림트에 대한 연설에서 이렇게 썼다. "연인만이 남자의 삶의 의미를 드러내고 그 내면의 의미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이 그림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낀다."[47]

말년과 사망

1911년 클림트의 그림 죽음과 삶은 로마 세계 박람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1915년에 배경을 황금색에서 파란색으로 바꾸는 등 수정했다.[48] 1915년 클림트의 어머니 안나가 사망했다.[49]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어 입원해야 했다. 그는 2월 6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폐렴으로 빈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0][51] 그는 빈의 히칭에 있는 히칭 묘지에 묻혔다.[52] 그의 많은 그림들은 미완성 상태로 남겨졌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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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회화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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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 장미 덤불, 1905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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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외스터라이히 농가, 1911

1963년, 빈의 알베르티나 박물관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드로잉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 프로젝트 "구스타프 클림트. 드로잉"은 그 이후로 집중적으로 전시되거나 출판 활동에 연관되었다.

1980년에서 1984년 사이에 "앨리스 스트로블"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알려진 모든 드로잉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설명한 3권의 도록을 출판했다. 1989년에는 보완판이 출판되었다. 이듬해 스트로블은 자신의 작업을 1975년부터 작품의 확정 및 분류를 도왔던,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마리안 비잔츠-프락켄에게 인계했다. 프락켄은 현재까지 연구 프로젝트를 계속하고 있으며, 1990년부터 약 400점의 추가 드로잉을 문서화하고 과학적으로 처리했다.[54]

이로써 빈의 알베르티나는 반세기 동안 클림트의 작품을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분류해 온 세계 유일의 기관이 되었다. 이 연구 프로젝트에는 현재 구스타프 클림트의 4,300점 이상의 작품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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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사후

요약
관점

영향과 평가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이탈리아 아르누보 예술가 갈릴레오 키니 (1873–1956)와 같은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55] 클림트의 작품이 191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전시되었다. 키니와 비토리오 체킨 (1878–1947)은 1914년 베네치아 터미누스 호텔을 위해 "라 프리마베라"와 "밀레 에 우나 노테"라는 여러 패널을 제작했다.[56][57][58] 이 작품들은 나중에 본콤파니 루도비시 장식미술관에 전시되었다.[59]

클림트의 작품은 에곤 실레의 그림에 강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1917년에 실레와 협력하여 지역 예술가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쿤스트할레(미술관)를 설립하려고 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재해석한 예술가로는 슬로바크 예술가 루돌프 필라가 있다.[60]

작가 프랭크 휘트포드에 따르면, "클림트는 물론 중요한 예술가이며, 매우 인기 있는 예술가입니다. 하지만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매우 중요하지 않은 예술가입니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자신이 처한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요약했지만, 미술사적으로 그의 영향은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있는 예술가입니다."[61]

경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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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닐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 (1897)

클림트의 그림들은 최고가에 판매되곤 했다.[62] 2003년 11월, 클림트의 <아터호의 시골집>은 29,128,000달러에 팔렸지만,[63] 그 기록은 곧 빌럼 데 쿠닝여인 III과 나중에 클림트 자신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I(2016년 1억 5천만 달러)에 의해 깨졌다. 그러나 미술 시장에서는 그림보다 종이 작품이 더 많이 발견된다. 미술 시장 데이터베이스인 아트프라이스에는 클림트 그림에 대한 경매 기록이 67개, 드로잉과 수채화에 대한 기록이 1564개 있다.[64] 지금까지 판매된 가장 비싼 드로잉은 1914년에서 1915년 사이에 제작된 <왼쪽을 향해 기대어 있는 여성 누드>로, 2008년 런던에서 GB£505,250에 팔렸다.[65] 그러나 미술 시장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개인적으로[66] 또는 비너로이터 & 콜바허와 같은 갤러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갤러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원본 작품 거래를 전문으로 하며, 정기적으로 단일 작가 전시회 및 국제 미술 박람회에서 이들을 선보인다.[67][68]

2006년, 로널드 로더노이에 갤러리를 위해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1907)을 1억 3,500만 달러에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당시 피카소의 1905년 작품 파이프를 든 소년 (2004년 5월 5일 1억 400만 달러에 판매)을 넘어선 역대 최고가 기록이었다.[69] 2006년 8월 7일, 크리스티스 경매장은 마리아 알트만과 공동 상속인들이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법적 분쟁 끝에 회수한, 클림트의 나머지 네 작품을 경매한다고 발표했다. 알트만이 가족의 그림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아델의 소원>을 포함한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제가 되었다.[70] 그녀는 다큐멘터리 <클림트 훔치기>에 출연했고, 이에 영감을 받아 드라마 영화 우먼 인 골드가 제작되도 했다.[71]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I는 2006년 11월 경매에서 8,800만 달러에 팔렸는데, 당시 경매에서 세 번째로 높은 가격의 미술품이었다.[72][73] <사과나무 I> (1912년경)은 3,300만 달러에, <자작나무 숲> (1903)은 4,030만 달러에 팔렸고,[74] <아터호 운터아흐의 집들> (1916)은 3,100만 달러에 팔렸다. 다섯 점의 반환된 그림들의 총 가격은 3억 2,700만 달러 이상이었다.[75] <아터호 리츠베르크> 그림은 2011년 11월 4,040만 달러에 경매되었다.[76] 클림트의 마지막 그림인 부채를 든 여인 (Dame mit Fächer, 1918)은 2023년 6월 27일 런던 소더비스에서 홍콩 수집가에게 8,530만 파운드 (1억 840만 달러)에 팔렸는데, 이는 유럽에서 경매된 미술품 중 최고가였다.[77] 2021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실되었던 젊은 아프리카인 <윌리엄 닐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의 초상화>(1897)가 빈의 비너로이터 & 콜바허 갤러리에 의해 재발견 및 복원되었는데, 이 갤러리는 2025년 3월 25일까지 1,500만 유로(1,640만 달러)의 시작가로 판매 중이다. 이 그림은 클림트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알프레트 바이드거에 의해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초상화 속 젊은이는 아프리카 오수 부족의 고위 인사로, 일종의 "인류학적 호기심"으로 빈에 오게 되었다. 이 그림은 그의 사망 시까지 클림트의 스튜디오에 남아 있었다. 1923년 15,000 오스트리아 크로네에 판매되었고, 1928년까지는 빈의 유대인 에르네스티네 클라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클라인과 그녀의 남편 펠릭스는 클림트의 이전 스튜디오를 빌라로 개조하기도 했다. 그녀는 나치의 안슐루스(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인 1938년 망명해야 했다.[78] 이 그림은 에르네스티네 클라인의 상속인들과 환수 합의가 이루어졌다.[78]

대중문화 속에서

1972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오스카 와일드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의 새로운 프로덕션을 선보였는데, 클림트에게서 영감을 받은 무대 세트와 의상을 사용했다. 볼레슬라프 바를로그가 연출하고 카를 뵘이 처음 지휘한 이 오페라는 엄청난 인기를 얻어 거의 50년 동안 레퍼토리에 남아 있었다. 265회 공연되었고 피렌체, 워싱턴, 일본에서 두 번의 순회공연을 했다.[79][80]

2006년, 클림트의 삶을 다룬 오스트리아 아트하우스 전기 영화 <클림트>가 존 말코비치 주연으로 개봉되었다.[81][82] 2015년 영화 우먼 인 골드헬렌 미렌마리아 알트만 역을 맡아, 나치에게 약탈당한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등 총 5점의 그림을 되찾기 위한 법정 투쟁을 극화했다.[83][84]

2008년, 패션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존 싱어 사전트마담 X의 초상과 함께 클림트를 크리스챤 디올 2008년 봄/여름 오트쿠튀르 컬렉션의 영감 중 하나로 언급했다.[85] 2013년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의 컬렉션 또한 부분적으로 클림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86]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작품은 많은 수집 기념 주화와 메달의 주제가 되었e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조폐국이 2003년 11월 5일에 발행한 100 유로 금은 기념주화가 있다. 앞면에는 클림트가 그의 스튜디오에 있고, 두 점의 미완성 그림이 이젤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87]

금박과 페인트로 덧칠한 흑인 아동 초상화로 유명한 미국 사진작가 토니 채트먼은, 클림트의 호화로운 백인 여성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아 흑인 인물들에게 반짝이는 금색 옷을 입혔다.[88] 2018년 에이미 셰럴드미셸 오바마 영부인 초상화는 미술 평론가들에 의해 클림트, 특히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었다.[89] 한 평론가는 클림트의 뮤즈 에밀리 루이제 플뢰게가 디자인한 패션과의 유사성을 지적했다.[90]

탄생 15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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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빌라에 재건된 클림트의 스튜디오 (2013). <부채를 든 여인>과 <신부> (모두 1917–18년경) 그림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다

2012년, 빈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빈 박물관, 알베르티나, 레오폴트 미술관 등 최소 10곳의 장소에서 클림트 전시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벨베데레, 빈 미술사 박물관, 분리파 전시관, 오스트리아 연극 박물관, MAK, 퀼스틀러하우스와 같은 다른 기관들은, 그의 회화 및 드로잉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 그의 협력 및 초기 의뢰 등에 대한 집중적인 발표와 함께 특별 전시를 개최했다. 또한 클림트의 빈 마지막 스튜디오를 복원하여 대중에 공개하고, 아터호에 <클림트 센터>를 개관하였다. 이 센터는 클림트와 관련된 전시, 컨퍼런스, 가이드 투어를 제공하는 새로운 센터이다.[91] 노이에 갤러리 또한 2012년 5월부터 8월까지 회화, 드로잉, 희귀 사진을 특징으로 하는 "150주년 기념" 전시회를 개최했다.[92]

오스트리아 조폐국은 클림트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클림트와 그의 여인들'이라는 5종의 금화 시리즈를 발행했다. 첫 금화(50유로)는 2012년 1월 25일에 발행되었으며, 앞면에는 클림트의 초상화가, 뒷면에는 그의 그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이 새겨져 있다.[93] 2013년 발행된 두번째 주화는스토클레 프리즈의 세부 묘사를 담은 2015년 올해의 주화 상을 수상했다.[94][95] 이 금화 시리즈는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키스를 마지막으로 2016년에 완결되었다.[96]

클림트의 15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는 2012년 7월 14일에 기념 우표를 발행했고, 산마리노 공화국에서는 70,000장 한정판 기념 우표 시트를 발행했다.[97][98]

구글은 2012년 7월 14일에 클림트의 150번째 생일을 구글 두들로 기념했는데, 그의 그림 <키스>를 묘사했다.[99][100]

구스타프 클림트 재단

2013년, 클림트의 사생아 구스타프 우치키의 미망인인 우르술라 우치키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산을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한" 사명으로 구스타프 클림트 재단을 설립했다. 레오폴트 미술관의 관장인 페터 바인하우플이 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박물관 관장 토비아스 G. 나터는 우치키의 나치 선전 영화 제작자로서의 과거를 언급하며 항의의 뜻으로 사임했다.[101]

나치 약탈 미술품: 반환 및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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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뭉크 3세의 사후 초상 (미완성) (1917–1918년경)

2000년, 정부 위원회는 빈 벨베데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클림트의 <모자와 깃털 보아를 두른 여인>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이전에 소유했던 유대인 가족의 상속인에게 반환할 것을 권고했다.[102]

미국 공영 라디오는 2006년 1월 17일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은 나치에게 예술품을 도난당한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유대인 상속인 여성에게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5점을 반환하도록 국가 중재 위원회의 명령을 받고 있다. 이 그림들의 가치는 최소 1억 5천만 달러로 추정된다."라고 보도했다.[103] 마리아 알트만과 관련된 이 사건은 나중에 헬렌 미렌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우먼 인 골드로 제작되었다.[104] 그해 말, 5점의 그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1907년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일명 "황금 옷을 입은 여인")이 1억 3,500만 달러에 경매되었다 (당시 단일 그림으로서는 역대 최고가). 낙찰자는 노이에 갤러리를 설립한 예술품 수집가 로널드 로더였으며, 현재 이 그림은 그곳에 전시되어 있다.[105][106]

2009년, 린츠렌토스 미술관은 클림트의 <리아 뭉크 3세의 초상> (Frauenbildnis)을 홀로코스트로 주은 빈의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 아랑카 뭉크의 상속인에게 반환했다. 약탈된 초상화는 그녀의 딸의 모습이었다.[107]

2021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프랑스 국립 컬렉션에 있는 유일한 클림트 작품이 나치에게 약탈당한 것이며, 나치에게 박해받은 유대인 가족의 상속인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다.[108] 1905년에 그려진 <나무 아래 장미 덤불>은 나치에게 살해당하기 전 강제로 팔아야 했던 노라 스티아시가 소유하고 있었다.[109] 현재 이 그림은 1980년 스위스 미술상 페터 나단에게서 구매한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다.[110] 나치에게 약탈당한 또 다른 유사한 클림트 그림인 <사과나무 II>는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실수로 잘못된 가족에게 반환되었고, 이후 판매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그 소유권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111]

2023년 로널드 S. 로더는 나치를 피해 도피한 이레네 베란이 소유했던 클림트의 <검은 깃털 모자>를 반환하고 재구매하는 데 동의했다. 베란의 소장품을 떠난 후 이 그림의 소재가 불분명했는데, 슈투트가르트에서 나치 프리드리히 벨츠와 관련하여 다시 나타났다. 베란의 어머니와 전 남편 필립은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후 나치에게 살해당했다.[112][113]

나치 약탈의 역사로 인해 소유권 분쟁의 대상이 된 다른 클림트 작품으로는 <베토벤 프리즈>,[114][115] <물뱀 II>,[116] <꽃 피는 초원>[117] 및 <게르트루트 로우의 초상>이 있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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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더 읽어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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