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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복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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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복음주의(Evangelicalism in the United States)는 거듭남을 믿고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신교 운동으로, 성경의 권위와 역사성을 전통적 개신교 가르침으로 인정한다. 미국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며, 초교파 교회, 오순절, 침례교, 개혁교회, 감리교 등 다양한 교단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음주의는 미국 종교와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세기 제1차 대각성은 복음주의 부흥을 가져왔고, 19세기 제2차 대각성 시기에는 복음주의자들이 학교와 대학 등 문화 기관을 지배하며 개혁운동(금주, 노예제 폐지 등)을 주도했다. 남부 복음주의자들은 노예제도 문제로 북부와 분열되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교단을 설치하였고, 남북전쟁 기간 양측 모두 성경을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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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는 진화론과 성경 비평 등 신학적 논쟁으로 근본주의자와 모더니스트로 복음주의가 분열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 무오성과 세대주의 신학을 옹호하며, 1920~30년대 근본주의-모더니즘 논쟁 후 주류 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수 개신교인들이 근본주의의 분리주의를 거부하고 신복음주의로 자신을 정의하며, 빌리 그레이엄 등 전도자들이 이 용어를 널리 알렸다. 1960년대 반문화,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이후 많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보수파에 가담해 공화당의 주요 지지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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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이 본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정의 및 특징
요약
관점
대부분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데 있어 역사학적 관점과 교리적 특징을 동시에 고려하며, 데이비드 베빙턴의 네 가지 특징이 가장 널리 채택되었다.
1. 데이비드 베빙턴의 네 가지 특징 (Bebbington's Quadrilateral)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빙턴은 복음주의를 네 가지 주요 특징으로 정의했으며, 이는 많은 학자들이 채택하는 기준입니다.
- 회심주의 (Conversionism): 거듭남(Born Again)과 같이, 인생을 바꾸는 개인적인 영적 변화를 강조합니다.
- 성경주의 (Biblicism): 성경을 최고의 종교적 권위로 강조하며, 성경의 무오류성과 축자적 영감을 믿는 경향이 강합니다.
- 행동주의 (Activism): 복음 전파(전도)와 선교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 십자가 중심주의 (Crucicentrism):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죽음에서의 육체적 부활을 참된 기독교 종교의 핵심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정의가 너무 광범위하여 이 네 가지 특징 중 일부를 공유하는 모든 기독교인을 복음주의자로 포함시킬 수 있다는 비판을 제기다.
2. 몰리 워든의 역사적 접근
역사학자 몰리 워든(Molly Worthen )은 신학이나 정치보다 역사가 복음주의자를 규명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공통된 기원을 강조한다.
- 공통된 기원: 복음주의자들은 18세기와 19세기의 종교 부흥 운동(Great Awakenings) 및 도덕적 십자군 운동에서 공통된 역사적 뿌리를 공유한다.
- 현대적 해석: "성경을 믿는(Bible-believing)"이나 "거듭나는(Born Again)" 같은 복음주의적 용어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슬로건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경건주의자들의 내적 영적 변화에 대한 강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3. 주류 개신교와의 대비
사회학자들은 복음주의를 주류 개신교(Mainline Protestantism)와 대조하며 특징을 명확히 합니다.
특징 구분 | 복음주의 교파 (Evangelicalism) | 주류 개신교 (Mainline Protestantism) |
문화적 태도 | 일반적으로 더 넓은 문화와의 분리를 추구함. | 근대성에 대해 수용적인 입장이며 다원주의를 지님. |
활동 강조 | 선교 활동과 개인적 회심을 강조함. | 사회·경제적 정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를 가짐. |
교리적 입장 | 특정 종교 교리에 대한 엄격한 고수를 가르침. | 다양한 개인적 신념에 대한 관용을 지님. |
3. 주류 개신교와의 대비
사회학자들은 복음주의를 주류 개신교(Mainline Protestantism)와 대조하며 특징을 명확히 합니다.
특징 구분 | 복음주의 교파 (Evangelicalism) | 주류 개신교 (Mainline Protestantism) |
문화적 태도 | 일반적으로 더 넓은 문화와의 분리를 추구함. | 근대성에 대해 수용적인 입장이며 다원주의를 지님. |
활동 강조 | 선교 활동과 개인적 회심을 강조함. | 사회·경제적 정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를 가짐. |
교리적 입장 | 특정 종교 교리에 대한 엄격한 고수를 가르침. | 다양한 개인적 신념에 대한 관용을 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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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들
요약
관점
1.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네 가지 유형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가 제시한 분류는 복음주의를 네 가지 주요 전통으로 나눈다.
- 침례교(Baptist) 전통: 침례교회와 그와 유사한 교파들을 포함한다.
- 성결교 및 오순절(Holiness and Pentecostal) 전통: 성결 운동과 오순절 운동에서 비롯된 교파들을 포함한다.
- 재세례파(Anabaptist) 전통: 메노나이트(Mennonite), 아미쉬(Amish) 등 재세례파 기원을 가진 교파들을 포함한다.
- 고백(Confessional) 전통: 복음주의적 성공회(Anglican), 경건주의 루터교인, 개혁교회 내 복음주의자들을 포함한다.
2. 맥스 스택하우스, 도널드 데이턴, 티머시 웨버의 역사적 세 가지 유형
윤리학자 맥스 스택하우스와 역사가 도널드 W. 데이턴 및 티머시 P. 웨버는 복음주의를 세 가지 주요 역사적 그룹으로 나눈다. 이 분류는 헌터의 분류보다 유동적이어서, 개인이 한 유형에만 속하거나 두세 유형 모두에 속할 수도 있다.
- 청교도적(Puritan) 또는 고전적 복음주의 (Classical Evangelicalism)
- 특징 16세기 종교개혁의 교리적 유산, 특히 개혁주의 전통을 보존한다.
- 강조점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 법정적 칭의(Justification), 그리고 성경의 "문자주의적" 무오성을 강조한다.
-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Pietistic Evangelicalism)
- 기원 18세기 유럽의 경건주의 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s)에서 유래했다.
- 강조점 부흥 운동(Revivalism)과 보다 경험적인 신앙을 수용하며, 회심, 성결(Sanctification), 중생(Regeneration), 그리고 치유(Healing)를 강조한다.
-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Fundamentalist Evangelicalism)
- 기원 20세기 초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분열에서 발생했다.
- 강조점 현대주의 비판에 맞서 특정한 "근본적인" 신앙들을 강조하며, 종종 성경을 종말론적, 전천년설적(premillennialist) 해석으로 접근한다.
3. 존 C. 그린(John C. Green)의 여론 조사 기반 세 가지 유형
퓨 리서치 센터(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의 선임 연구원인 존 C. 그린은 여론 조사 데이터를 사용하여 복음주의자들을 세 가지 광범위한 진영으로 나누고, 이를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 중도주의자(centrist), 근대주의자(modernist)로 명명했다.
- 전통주의 복음주의자 (Traditionalist Evangelicals)
- 특징: 특정한 개신교 신앙(특히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이신칭의, 성경의 권위,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높은 친화력으로 특징지어진다.
- 정치적 성향 서구 문화(특히 미국 문화)의 고도로 정치적인 환경과 결합하여, 기독교 우파(Christian right)로 분류되는 정치적 성향을 보인다. 제리 폴웰(Jerry Falwell)이나 TV 전도자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등이 가장 눈에 띄는 대변인이다.
- 중도주의 복음주의자 (Centrist Evangelicals)
- 특징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주로 정치를 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많은 부분을 지지한다.
- 근대주의 복음주의자 (Modernist Evangelicals)
- 특징: 이 운동 내에서 소수이며, 교회 출석률이 낮고 "신앙에 있어서 훨씬 더 많은 다양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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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흐름
(1) 18세기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복음주의 종교가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3개 식민지 전역으로 퍼져 미국인들을 공통의 신앙으로 통합했다.
- 제1차 대각성 운동(1730~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화이트필드 중심.
- 개인적 회심과 성령의 역사 강조, 복음주의 부흥 확산.
- 교회 분열(구파·신파), 새로운 복음주의 교회 형성.
미국 복음주의의 뿌리는 세 가지 오래된 개신교 전통—뉴잉글랜드 청교도주의, 대륙 경건주의(Pietism),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의 융합에 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회중교회 안에서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며, 구원받는 믿음은 내면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청교도들은 회심자가 회심 경험의 증거(회심 서사)를 제시해야만 교회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였다.
1670~1680년대에 청교도 성직자들은 종교적 열의의 쇠퇴를 인식하고 부흥 운동을 촉진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 미국 식민지로 이주한 얼스터 스코틀랜드인들은 성찬 시즌이라는 자신들만의 부흥 전통을 가져왔다. 경건주의는 유럽의 루터교 및 개혁교회 내 운동으로, 신앙은 단순한 진리의 수용이 아니라 전 존재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감정적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경건주의자들은 성경 공부, 기도, 상호 책임을 위한 소그룹(cell group) 형성을 장려했다.
제1차 대각성과 복음주의의 형성
18세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는 조너선 에드워즈였다. 이 세 전통은 1730~1740년대 영국과 미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제1차 대각성(First Great Awakening)을 통해 통합되었다. 대각성은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에서 시작되었으며, 1734년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에서 에드워즈가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 설교하면서 부흥이 일어났다. 이전 청교도 부흥은 지역적이고 단기적이었지만, 노샘프턴 부흥은 중부 식민지의 장로교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곳에서는 프릴링하위젠(Theodore Frelinghuysen)과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가 부흥을 이끌었다.
조지 휘트필드와 대중 부흥
영국의 복음 전도자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부흥을 식민지 전역으로 확산시킨 인물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한 성공회 사제였던 그는 그곳에서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를 만나 감리교(Methodism) 운동을 함께 시작했다. 휘트필드는 극적인 설교 스타일과 교리의 단순화 능력으로 인기를 얻었고, 1739년 미국에 도착해 대서양 연안을 따라 설교했다. 수천 명이 그의 야외 집회에 몰려들었고, 그는 식민지 전역에서 종교적 스타가 되었다.
복음주의의 신학적 특징
1740년경 대각성은 절정에 달했으며, 새로운 형태의 개신교가 형성되었다. 역사학자 토마스 키드에 따르면, 이 신앙은 “성령의 부어짐과 회심한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부흥의 시기”를 강조했다. 복음주의자들은 ‘거듭남’(new birth)—회심의 분명한 순간—을 믿었고, 신앙의 확신을 갖는 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이라고 보았다. 청교도들도 회심의 필요성을 믿었지만, 그들은 “확신은 드물고, 늦게 오며, 신자의 고뇌 속에서 맺어지는 열매”라고 여겼다.
복음주의는 개인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평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고, 이는 반부흥주의자들에게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급진적 복음주의자들은 교육받지 않은 목회자(때로는 유색인종)를 안수했고, 여성과 유색인종이 집사나 장로로 섬기는 것도 허용했다. 또한 평신도가 목회자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울 권리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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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분열과 남부 확산
1741년 에드워즈의 유명한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 손에 든 죄인들」은 대각성의 상징이 되었다. 대각성은 회중교회와 장로교회를 ‘구등불(Old Lights)’과 ‘신등불(New Lights)’로 분열시켰고, 결국 복음주의적 신등불이 양 교단에서 다수파가 되었다. 에드워즈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뉴잉글랜드 신학은 회중교회의 지배적 신학으로 자리잡았다.
뉴잉글랜드에서는 급진적 신등불들이 기존 교회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침례교회(Separate Baptists)를 형성했다. 1740~1750년대에 신측 장로교도(New Side Presbyterians)와 별도 침례교도들이 남부 식민지로 이동하여 교회를 세웠다. 많은 이들이 험난한 웨건 로드(Great Wagon Road)를 따라 남부로 향했고, 그곳에서 플랜터 엘리트와 연관된 성공회 종교 체제에 도전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근면한 농부와 장인이었으며, 플랜터 계급의 세속적 삶을 비판했다.
1760년대에는 첫 감리교 선교사들이 미국에 도착해 남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776년경에는 복음주의자들이 남부에서 성공회 신자보다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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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혁명 이후의 복음주의 확산
미국 혁명 전후로 성공회(현재의 미국 성공회, Episcopal Church)는 법적 특권을 상실하고 큰 혼란을 겪었다. 당시 네 개 주요 교단은 회중교회,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였다. 1770~1780년대에 침례교와 감리교는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1770년에는 침례교회 150개, 감리교회 20개였지만, 1790년에는 침례교회 858개, 감리교회 712개로 증가했다.
이 두 복음주의 교단은 남부와 서부 변경 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아프리카계 노예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었으며, 예를 들어 델마바 반도에서는 감리교 신자의 3분의 1 이상이 흑인이었다. 1790년대에는 복음주의가 퀘이커, 루터교, 네덜란드 및 독일 개혁교회 같은 소규모 교단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문화적·언어적 장벽 때문에 네덜란드와 독일 교회는 이 시기의 복음주의 부흥에 크게 참여하지 못했다.
(2) 19세기
역사가 마틴 마티가 "복음주의 제국(Evangelical Empire)"이라고 부른 시대를 이끌었으며, 복음주의자들이 학교와 대학을 포함한 미국 문화 기관들을 지배했다.
- 북부 복음주의자: 금주 운동과 노예 제도 폐지를 지지하는 등 [출처: 502] 강력한 개혁 옹호자였다.
- 남부 복음주의자: 노예 문제로 북부와 분열하여, 인종적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출처: 503] 새로운 교단들을 설립했다.
- 제2차 대각성 운동(1790~1840년대): 감리교·침례교 폭발적 성장.
-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이동(자유의지, 누구나 구원 가능).
- 찰스 피니가 대표적 부흥 설교자, “새로운 부흥 기법” 확산.
- 사회적 영향: 금주운동, 노예제 폐지, 교육·형사 제도 개혁.
- 그러나 남부 복음주의자는 노예제 옹호, 교파 분열로 이어짐.
19세기 동안 복음주의는 제2차 대각성(1790년대~1840년대)의 결과로 크게 확장되었다. 이 부흥 운동은 거의 모든 주요 개신교 교단에 영향을 미쳤으며, 대부분의 미국 개신교 신자들을 복음주의자로 변화시켰다. 179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참고로, 1776년 미국 인구는 260만 명이었으나 1860년에는 3,150만 명으로 증가했다. 1790년부터 1840년 사이에 400만 명 이상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1776년 당시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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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각성의 주요 부흥 중심지
제2차 대각성에는 세 개의 주요 부흥 중심지가 있었다.
- 테네시와 켄터키의 컴벌랜드 강 계곡에서는 1800년경부터 부흥이 시작되었다.
- 뉴잉글랜드에서는 1820년대부터 회중교도들 사이에서 대규모 부흥이 일어났으며, 이는 티모시 드와이트, 라이먼 비처, 나사니엘 테일러, 아사헬 네틀턴 같은 에드워즈 계열 설교자들이 주도했다.
- 뉴욕 서부의 ‘불타버린 지대’(burned-over district)에서는 회중교도와 장로교도가 중심이 되었고, 침례교와 감리교도들도 참여했다.
서부의 감정적 부흥과 캠프 집회
동부 해안의 부흥이 비교적 조용하고 엄숙했던 반면, 서부의 부흥은 감정적이고 극적인 성격을 띠었다. 장로교 목사 제임스 맥그리디는 1800년 켄터키 남서부 로건 카운티에서 ‘레드 리버 부흥’을 이끌었고, 이곳에서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성찬 시즌이 미국식 캠프 집회(camp meeting)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년 후 켄터키 북동부 버번 카운티에서는 바튼 스톤이 이끈 케인 리지 부흥(Cane Ridge Revival)이 일주일간 진행되었고, 인구가 적은 변경 지역에서 무려 2만 명이 몰려들었다. 이 부흥에서는 많은 회심자들이 종교적 황홀경과 신체적 격동(bodily agitations)을 경험했다. 일부는 거룩한 웃음, 개처럼 짖기, 경련, 무아지경, 춤, 외침, 성령에 쓰러짐 등의 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반응은 다른 부흥에서도 있었지만, 케인 리지에서는 훨씬 강렬했다. 이 부흥은 스톤-캠벨 운동의 기원이 되었으며,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Churches of Christ)와 그리스도의 제자들(Disciples of Christ) 교단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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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와 침례교의 확산
제2차 대각성 기간 동안 감리교 성공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는 가장 많은 회심자를 얻었다. 이들은 캠프 집회를 교회 생활의 정규 요소로 받아들이고, 서부 변경 지역 선교에 자원을 집중했다. 순회 설교자(circuit riders)라 불리는 목회자들은 매년 수백 마일을 여행하며 흩어진 교회를 섬겼다. 감리교는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역 방식을 채택하여,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청년들도 순회 설교자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침례교도 역시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감리교처럼 교육 수준이 낮은 순회 설교자들을 파견했다.
신학적 변화: 칼빈주의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제1차 대각성의 신학은 주로 칼빈주의에 기반했다. 칼빈주의는 예정론을 강조하며, 하나님이 소수의 선택된 자에게만 구원을 주시고 나머지는 지옥에 보내신다고 가르쳤다.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구원에 있어 인간의 역할을 배제했다.
반면, 제2차 대각성은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 신학은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인간이 회심에 있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감리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선택할 수 있고, 죄에 빠지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찰스 피니와 ‘새로운 방식’
제2차 대각성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는 찰스 그랜디슨 피니(Charles G. Finney)였다. 그는 1825~1835년 사이 뉴욕 북부에서 활발히 설교했으며, 이 지역은 에리 운하 개통 이후 인구가 급증했다. 장로교에서 안수받았지만, 피니는 전통적 칼빈주의에서 벗어나 부흥과 회심은 인간의 노력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 필요하지만, 구원은 강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에드워즈가 부흥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라고 본 반면, 피니는 “부흥은 기적이 아니라, 적절한 수단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방식(new measures)’이라 불리는 부흥 촉진 방법을 강조했는데, 이는 이미 감리교에서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 대중 광고
- 장기 부흥 집회
- 여성의 발언과 간증 허용
- 회심을 원하는 자들이 앉아 기도하는 애통자의 벤치(mourner’s bench)
피니는 사회 개혁, 특히 노예제 폐지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노예 소유자에게 성찬을 거부하고, 노예제를 “국가적 대죄”라고 설교했다.
종말론의 변화와 사회 개혁
복음주의의 종말론(eschatology)도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청교도들은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를 믿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재림한 후 천년왕국이 시작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제1차 대각성 이후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를 받아들였고, 이는 그리스도 재림 전에 천년왕국이 점진적으로 형성된다는 믿음이다.
제2차 대각성에서는 후천년주의가 지배적이 되었으며, 이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기결정 강조와 계몽주의의 인간 긍정적 관점과 잘 맞아떨어졌다.
자선 제국과 선교 운동
후천년주의적 낙관주의는 북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사회 개혁 운동을 촉진했다. 대표적 운동은 다음과 같다:
- 금주 운동 (절주가 복음주의자의 ‘명예의 훈장’이 됨)
- 노예제 폐지 운동
- 감옥 개혁
- 교육 개혁
- 결투 폐지 운동
-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위한 시설, 청각장애 학교, 결핵 치료 병원 설립
- 이민자와 빈민을 위한 식량, 의복, 직업 알선 제공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을 지울 수 없는 개신교 국가로 인식시키기 위해, 주일학교, 대학, 신학교를 세웠고, 미국전도협회(American Tract Society)와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 같은 기관을 통해 수백만 권의 책자와 기독교 간행물을 출판했다. 이 사회 개혁 네트워크는 ‘자선 제국(Benevolent Empire)’이라 불린다.
후천년주의는 선교 활동의 증가도 이끌었다.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존 넬슨 다비: 현대 세대주의의 창시자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세대주의가 확산되면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보다 비관적인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 관점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학자 마크 스위트넘(Mark Sweetnam)에 따르면, 세대주의자들은 복음주의적이며, 전천년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이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이 인류와 관계를 맺는 구별된 단계(“세대” dispensations)를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를 기대한다. B. M. 피에치(B. M. Pietsch)는 세대주의 지도자들이 성경의 의미를 “해독”하기 위한 복잡한 텍스트 분석 방법을 개발했다고 지적한다.
존 넬슨 다비는 엄격한 성격의 19세기 영국-아일랜드 성경 교사이자 전직 성공회 성직자로, 세대주의를 고안하고 확산시킨 인물이다. 이 새로운 해석 방법은 논쟁적이며, 최근의 주류 고고학 및 성서학 연구 결과와 쉽게 조화되지 않는다. 다비는 1830년대 영국에서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과 함께 세대주의를 처음 가르쳤고, 1860~70년대 미국과 캐나다 선교 여행을 통해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 소개했다. 1876년에는 나이아가라 성경 회의(Niagara Bible Conference)가 조직되어 세대주의 사상을 교육했고, 이 사상은 수십 년 안에 근본주의 운동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드와이트 무디와 세대주의의 대중화
드와이트 L. 무디(Dwight L. Moody)는 이 변화의 핵심 인물이었다. 19세기 후반 무디는 사업과 종교의 아이디어를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 개신교를 창조했고, 강력한 설교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시카고를 중심으로 1858년부터 주일학교 운동과 YMCA 활동에 참여했으며, 존 파웰(John Farwell), 사이러스 맥코믹(Cyrus McCormick) 같은 복음주의 사업가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끌어냈다. 무디의 방식은 거칠고 직설적이며 비전통적이었지만, 자선가들은 그가 도시 빈민을 진심으로 돕고자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1867년 영국 방문 중 무디는 실용주의적 세대주의자 형제단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자선 활동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교회, 집, YMCA가 모두 소실되자, 무디는 지역 교회 사역을 떠나 순회 부흥사로서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이제 사회 개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도래가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 확신하며, 이전의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 입장을 버렸다. 그의 부흥 집회는 세대주의 확산을 가속화했고,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성을 강조하는 설교로 큰 영향을 미쳤다.
무디는 사업가들의 자선 후원을 부흥 사역에 도입한 혁신가였다. 남북전쟁 이후의 도금 시대(Gilded Age) 성직자들처럼, 그는 사업가들의 가치관을 지지했고, 복음주의적 사고와 사업적 사고의 결합을 이끌었다. 무디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도금 시대 사업가들의 강인한 개인주의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회심이 가난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믿었고, 게으른 사람을 근면한 노동자로 변화시켜 번영하게 만든다고 설교했다. 부흥 집회에서 그는 함께 앉은 부유한 사업가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모두 중생한 신자이며 헌신적인 교회인이라고 말했고, 시카고·런던·뉴욕의 빈민가 사람들은 교회에 거의 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산업화의 문제도 그는 회심을 통한 해결로 보았으며, “하나님을 믿으면 문제는 곧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사이러스 스코필드와 세대주의의 정착
미국 복음주의 목사이자 무디의 동료였던 사이러스 스코필드(Cyrus Scofield)도 세대주의 확산에 기여했다. 그는 1888년 소책자를 시작으로, 1909년 『스코필드 주석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출간하며 광범위한 해석 주석을 성경 본문에 삽입했다. 이 성경은 미국 독립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20세기 초 세대주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1918년 독감, 1929년 대공황, 1930년대 먼지 폭풍, 제2차 세계대전 같은 재난을 이해하려 하며 이 성경을 의지했다. 1945년까지 미국에서 200만 부 이상이 출판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또한 독립 성경학교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이는 미국 세대주의 확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무디 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와 로스앤젤레스 성경학교(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가 있다. 1930년대 초에는 근본주의 진영을 위한 성경학교가 약 50개에 달했다.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
19세기 후반에는 부흥주의적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이 전적 성화(entire sanctification) 교리를 강조했다. 많은 추종자들이 기존 감리교 안에 남아 있었지만, 일부는 자유 감리교회(Free Methodist Church)와 웨슬리안 감리교회(Wesleyan Methodist Church) 같은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다. 도시 영국에서는 성결 메시지가 덜 엄격했고, 반대도 적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
185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는 프린스턴 신학자들(Princeton Theologians)—찰스 하지(Charles Hodge),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B. B. 워필드(B. B. Warfield)—가 보다 기술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이들은 성경에서 발견한 전통 교리를 수호하려 했으며,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등 학문적 도전에 맞서 싸웠다.
20세기 초(근본주의-모더니스트 논쟁)
요약
관점
다윈의 진화론과 성경의 역사적 비평과 같은 [출처: 507] 새로운 사상으로 인해 개신교회는 분열되었다.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로 불렸고, 성경 무오설과 세대주의적 신학을 옹호했다. 이 논쟁의 결과로 근본주의자들은 주류 개신교회에서 분리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후: 새로운 세대의 보수 개신교인들은 근본주의의 분리주의적 입장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불렀다. 빌리 그레이엄이 이 용어 사용을 부활시키는 데 앞장섰다.
- 정치적 활동: 1960년대 반문화와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에 대한 반작용으로, 많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기독교 우파에 정치적으로 참여하여 공화당의 중요한 투표 블록이 되었다.
- 19세기 말~20세기 초: 진화론·성경비평 수용 여부로 분열 → 근본주의 vs. 현대주의.
- 근본주의자: 성경 무오, 세대주의, 분리주의.
- 1940년대 이후: 근본주의의 분리주의 극복, 새로운 복음주의 등장.
- 빌리 그레이엄, 크리스천 투데이, 풀러 신학교, 전국복음주의협회(NAE).
- 1970년대 이후: 낙태 판결(로 대 웨이드, 1973)과 반문화 운동 대응 → 기독교 우파와 정치 결합,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 형성.
1890년대 무렵까지 대부분의 미국 개신교 신자는 복음주의 교단에 속했지만, 성공회의 하이 처치(high church) 신자들과 독일 루터교 신자들은 예외였습니다. 20세기 초,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와 주류 개신교 교단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는데, 주요 쟁점은 **성경의 무오성(inerrancy of the Bible)**이었습니다. 1910년 이후, 복음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며, 인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대주의적(dispensationalist) 성경 해석을 가르치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장악되었습니다.
목사, 신학자, 평신도들이 초기 근본주의의 방향을 잡았지만, 부유한 사업가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니언 오일(Union Oil) 공동 창립자인 라이먼 스튜어트(Lyman Stewart)는 로스앤젤레스 성경 연구소(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근본》(The Fundamentals)(1910년부터 1915년까지 분기별로 12권으로 발행된 다수 저자의 에세이 모음집)의 출판 및 배포에 익명으로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 책은 1917년에 단행본 세트로 출간되어 기독교 근본주의의 토대 문서가 되었습니다. 스튜어트는 이 책의 여러 개별 저자들이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premillennialist dispensationalism)를 홍보하도록 했습니다. 이 에세이들은 주요 개신교 교단을 대표하는 64명의 각기 다른 저자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및 기타 영어권 국가의 목사, 선교사, 신학 교수, 주일학교 교장, YMCA 및 YWCA 총무, 기타 개신교 종교 봉사자들에게 무료로 우편 발송되었습니다. 3백만 권 이상(25만 세트)이 발송되었습니다.
세대주의는 근본주의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세상을 하느님과 악마 사이의 치명적인 갈등의 전장으로 보게 만들었고, 이 갈등이 곧 모든 불신자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것이므로, 사회 개혁은 엄격히 부차적인 관심사로 두고 영혼 구원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게 했습니다. 이러한 "구명보트 신학(lifeboat theology)"의 채택은 또한 근본주의자들의 메시지를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제도들(예: 지방 당국과 자경단에 의한 인종 분리의 폭력적인 집행)과 사업 관행(산업 노동자의 무자비한 착취, 레드라이닝, 짐 크로우 경제)의 개혁에 반대하는 미국 그룹 및 공동체들 사이에서 더 환영받게 만들었습니다.
세대주의는 또한 근본주의자들로 하여금 현대 과학의 새로운 경향이 사람들을 그들이 필수적인 진리로 보는 것에서 멀어지게 할 것을 두려워하게 했으며, 개신교 교회 내 모더니스트(modernist) 진영이 세속적 견해와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유산을 포기했다고 믿게 했습니다. 이러한 근본주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선호되는 방식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사실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고, 이 운동은 1925년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이 공개적인 당혹감의 쓰라림으로 인해 근본주의자들은 더욱 분리주의(separatism)로 후퇴했습니다. 개신교 모더니스트들은 근본주의자들의 분리주의적 자기 고립과 이전 세기 개신교 활동가들이 발전시킨 사회 복음(Social Gospel)**을 거부한 것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이 무렵, 모더니스트들은 "복음주의자(evangelical)"라는 용어를 대체로 포기했으며, 현대 과학 및 심지어 성경 연구에서도 진화론적 이론을 용인했다. 1930년대에, 자신들의 교단이 내세우는 모더니스트적 관점을 거부한 근본주의 목사와 교인들은 지도와 공동체를 위해 세대주의적 성경 연구소(Bible institutes)로 점점 더 많이 향했습니다. 이러한 학교 중 가장 큰 무디 성경 연구소(Moody Bible Institute)는 강연자 초청, 평생 교육 과정에서부터 성경 컨퍼런스, 잡지, 라디오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근본주의 아웃리치 서비스를 제공하며 흐름을 주도했습니다.
1942년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에이미 셈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이 인도한 14시간 성령 집회 중 엔젤러스 템플(Angelus Temple)에 모인 회중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고 비전을 전 세계로 확장했습니다. 미국 내에서 복음주의 활동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이는 "부흥주의의 부활"이었습니다. 종말론과 휴거에 집중하는 세대주의 교리는 계속해서 주요 주제였습니다. 이전의 많은 복음 전도자들은 '톱밥 길(sawdust trail)'을 따라 작은 마을의 청중들에게 천막에서 설교했지만, 새로운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인의 삶을 지배하게 된 대도시에서 영혼을 구원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청년 그리스도 연합(Youth for Christ)은 군인, 선원, 도시 십 대들에게 복음주의 메시지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1940년에 결성되었으며, 나중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전후 부흥 전도 집회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는 1908년에 조직된 주류 연방 교회 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에 대한 대응으로 1942년에 결성되었습니다. 찰스 풀러(Charles Fuller)는 1937년에 《옛날식 부흥 시간》(Old-Fashioned Revival Hour)을 방송하기 시작했는데, 1943년까지 2천만 명의 주간 청취자를 기록하며 전국 라디오 청취자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는 그들이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현대 문화에 직접적이고 건설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세상에 근본주의자로 알려지는 것에 대한 주저함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케네스 칸처(Kenneth Kantzer)가 말했듯이,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은 "명예의 배지가 아닌 당혹감"이 되었습니다. 풀러 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창립 총장인 해럴드 오켕가(Harold Ockenga)는 1947년에 근본주의 기독교 내에서 자신이 본 뚜렷한 운동을 지칭하기 위해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이 새로운 세대의 복음주의자들은 다른 전통들과 더욱 개방적이고 비판단적인 대화를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복음을 사회학, 정치, 경제 분야에 더 많이 적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이에 대응하여 반대자들을 "근본주의자"라는 이름에서 분리하고, 오켕가의 용어인 "신복음주의자(neo-Evangelical)" 또는 단순히 "복음주의자(evangelicals)"라는 경멸적인 용어로 종종 특징지어지는 이 더 개방적인 그룹과 자신들을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냉전 시기 복음주의의 성장
요약
관점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1948년 무렵 냉전(Cold War)의 시작은 복음주의 확장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에 핵폭탄을 사용한 후 1945년 8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습니다. 심지어 비종교인들조차도 이 폭탄들의 거의 상상할 수 없는 파괴력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적인 언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종전은 미국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백만 명의 남성이 군대에서 복귀했고, 수백만 명의 여성이 일시적인 전시 산업 일자리를 떠났습니다. 결혼율과 출산율이 급증하여, 전쟁 중 이미 시작되었던 베이비 붐(baby boom)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젊은 미국 가족들이 새로운 교회들로 몰려들자, 목사, 신부, 랍비들은 그들을 이끌고 격변하는 세상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미국에서 세계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복음주의 및 근본주의 설교자들보다 더 뜨겁게 표명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설교에서 핵심 요소는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세상의 종말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49년 9월, 30세의 전도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은 로스앤젤레스 주차장에 서커스 천막을 설치하고 일련의 부흥 집회를 열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키 크고 잘생긴,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가진 매혹적인 설교자인 그레이엄은 청중들을 우선 재앙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길 잃은 죄인이라는 두려움으로 가득 채운 다음, 삶을 돌이키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자 하는 깊은 갈망을 갖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 전도 집회는 1949년 9월 25일에 시작되었으며, 9월 25일부터 10월 17일까지 3주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부흥회가 시작되기 이틀 전인 1949년 9월 23일,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 소련이 8월 29일에 자체 핵폭탄을 만들고 성공적으로 폭파했음을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부흥회가 시작된 지 6일 후, 중국 본토는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홍군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냉전 사건들을 보도하는 신문 헤드라인은 미국 전체를 불안하고 종말론적인 분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던 10월, 보수 성향의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는 자신이 소유한 신문 체인의 모든 편집자에게 "그레이엄을 띄워라"라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 결과, 그레이엄은 닷새 만에 전국적인 보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3주 동안 계획되었던 이 행사는 8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레이엄은 통신사 및 전국 잡지의 집중적인 보도로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이후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선교 활동의 확장과 새로운 위협
전후 시대에 복음주의자들의 국제 선교 활동 또한 확장되었습니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세계 대전에서 국가가 승리한 후 새로운 열정과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들 중 다수는 1930년대 대공황 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가난한 농촌 지역 출신이었지만, 전시와 전후의 번영은 선교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재정 자원을 극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은 극동 복음 전도회(Far Eastern Gospel Crusade)와 같은 조직에서 전후 역할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패배한 후, 새로 동원된 복음주의자들은 무신론적 공산주의, 세속주의, 다윈주의, 자유주의, 가톨릭 그리고 (해외 선교에서는) 이교로부터 오는 것으로 인식되는 위협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주류 개신교 교단이 해외 선교사 수를 1935년 7,000명에서 1980년 3,000명으로 줄인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같은 기간 동안 전임 해외 선교사 수를 세 배로 늘렸습니다. 즉, 1935년 12,000명에서 1980년 35,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45년 시카고 솔저 필드(Soldier Field)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열린 청년 그리스도 연합의 70,000명(경기장 수용 인원 74,000명) 집회에서는 군인과 간호사들이 행진했으며, 세대주의적 복음을 아직 기다리고 있는 모든 민족을 상징하는 의상을 입은 선교 대표자들도 행진했습니다. 1936년에 전 세계 개신교 선교사의 41%만이 북미 출신이었지만, 이 비율은 1952년 52%, 1969년에는 72%로 증가했습니다. 전후 해외 선교 노력을 확대한 교단으로는 1945년에 결성된 연합 오순절 교회 인터내셔널(United Pentecostal Church International)과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가 있는데, 하나님의 성회는 1935년 230명에서 1952년 626명으로 거의 세 배 증가했습니다. 남침례교(Southern Baptist) 선교사는 405명에서 855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나사렛 교회(Church of the Nazarene)에서 파송한 선교사도 88명에서 200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교회 성장과 새로운 운동
전후 기간에는 또한 교회 일치 운동(ecumenical movement)의 성장과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1948년)의 설립이 있었는데, 이는 복음주의 공동체에서는 대체로 의심의 눈초리로 여겨졌습니다. 1950년대 동안, 미국 교회 신자 수는 6,450만 명에서 1억 1,450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60년까지 미국 인구의 60% 이상이 교회에 소속되었습니다. 웨일스 감리교 부흥 운동에 이어, 1906년의 아주사 거리 부흥 운동(Azusa Street Revival)은 북미에서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를 확산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은 1960년대에 시작되어 오순절 신학과 관행이 많은 주류 교단에 도입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뉴프론티어스(Newfrontiers)와 빈야드 교회 협회(Association of Vineyard Churches)와 같은 은사주의 그룹들은 그들의 뿌리를 이 시기에 두고 있습니다.
21세기
플로리다주 잭슨빌에 위치한 침례교 의료 센터(Baptist Medical Center Jacksonville, 침례교 보건 네트워크)
ABC 뉴스 및 워싱턴 포스트가 2003년부터 2017년까지 15년 동안 174,485건의 무작위 표본 전화 인터뷰를 실시한 여론조사를 분석한 2018년 보고서는 미국인의 종교 정체성에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자신을 개신교(복음주의 및 비복음주의 모두)라고 밝히는 미국인의 비율 감소와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미국인의 비율 증가가 포함됩니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보도에 따르면,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빈곤 감소, 제3세계의 에이즈 퇴치, 환경 보호 등 "영원한 영혼을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는 노력"을 포함하도록 운동의 사회적 의제를 확장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는 복음주의 공동체 내에서 매우 논란이 많았는데, 더 보수적인 입장의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경향이 중요한 문제들을 타협하고 대중성과 합의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더 넓은 문화에 대한 '굴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초 이러한 분열을 상징하는 인물은 복음주의 지도자인 제임스 돕슨(James Dobson)과 릭 워렌(Rick Warren)이었습니다. 돕슨은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버락 오바마가 승리할 경우의 위험성(자신의 관점에서)을 경고했습니다. 워렌은 교회가 정치적으로 덜 분열되기를 원하며 오바마와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John McCain) 모두와 상당 부분 동의한다는 이유로 어떤 주요 후보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우려 사항 중 다수를 다룬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습니다.
2013년 텍사스주 휴스턴 레이크우드 교회(Lakewood Church)에서의 복음주의 은사주의 예배
인구 통계
요약
관점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개신교는 남북 전쟁에서 연방에 맞서 싸운 모든 주를 포함하여 미국 남부 거의 전체를 아우르는 바이블 벨트(Bible Belt)에서 주요한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리노이주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 캠퍼스
미국 인구 중 6%에서 35%가 복음주의자로, 이는 "복음주의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2008년 한 연구에 따르면, 2000년에는 미국인의 약 9%가 특정 일요일에 복음주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2014년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미국 종교 생활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25.4%가 복음주의자였으며, 로마 가톨릭은 20.8%, 주류 개신교는 14.7%였습니다. 2020년에는 주류 개신교 신자 수가 주로 백인인 복음주의 교회의 신자 수를 넘어선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2021년 퓨 리서치 센터는 "미국 성인의 24%가 자신을 거듭난(born-again) 또는 복음주의 개신교인이라고 설명한다"고 보고했습니다. 2025년 퓨 리서치 센터는 "복음주의 개신교인은 현재 전체 미국 성인의 23%를 차지하며, 2007년의 26%에서 감소했다"고 보고했습니다.
2007년 바나 그룹(Barna Group)은 성인 미국인의 8%가 거듭난 복음주의자라고 보고했는데, 이는 2006년 조사에서 다음 아홉 가지 질문에 "예"라고 답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정의되었습니다.
- "오늘날 당신의 삶에서 여전히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께 개인적인 헌신을 했습니까?"
- "당신이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
- "오늘날 당신의 신앙이 당신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까?"
-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비기독교인과 나누어야 할 개인적인 책임이 있습니까?"
- "사탄이 존재합니까?"
- "영원한 구원은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죄 없는 삶을 사셨습니까?"
- "성경은 가르치는 모든 면에서 정확합니까?"
-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오늘날까지 다스리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완벽한 신이십니까?"
2012년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미국인의 3분의 1 이상, 1억 명 이상이 복음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고 추정했는데, 이는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복음주의 신학을 지지하지만 자신을 "복음주의자"보다는 "거듭난 기독교인(born again Christians)"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 비율이 종종 과소평가된다고 주장했습니다. 2017년 기준으로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전체 백인 복음주의자는 미국인의 약 17%를 차지하는 반면, 30세 미만 백인 복음주의자는 해당 연령대의 미국인 중 약 8%를 차지합니다.
2016년 휘튼 칼리지의 미국 복음주의 연구소는 미국 인구의 약 30~35%(9천만 명에서 1억 명)를 복음주의자로 추정했습니다. 이 수치에는 백인 및 흑인 "문화적 복음주의자"(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지만 복음주의자로 여기는 미국인)가 포함됩니다. 마찬가지로, 응답자들에게 "거듭난" 또는 "복음주의자"로 자신을 규정하는지 물은 2019년 갤럽(Gallup)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7%가 긍정적으로 답했습니다.
때때로 역사적인 흑인 교회의 신자들은 복음주의자로 계산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정치적 경향을 분석할 때, 여론 조사 기관들은 종종 백인 복음주의자(공화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음)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개신교도(백인 복음주의자와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지만 민주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음)를 구별합니다.
정치적 영향력과 기독교 우파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1830년대 금주 운동(prohibition movement)과 같은 운동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이 운동은 주마다 주점과 선술집을 폐쇄하다가 1919년에 전국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기독교 우파(Christian Right)는 여러 종류의 전통주의적이고 독실한 교회 신자들로 이루어진 연합체입니다. 특히 피임과 낙태 문제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 그리고 남침례교(Southern Baptists), 미주리 시노드 루터교(Missouri Synod Lutherans) 신자 등이 포함됩니다. 1980년대 초부터 기독교 우파는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기독교 연합(Christian Coalition), 가정을 위한 포커스(Focus on the Family), 가족 연구 위원회(Family Research Council) 등 여러 정치 및 현안 중심 조직과 연관되어 왔습니다.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출구 조사를 통해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81%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고 보고되었는데, 이는 일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온 결과입니다.
인종적 차이와 정치적 다양성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는 대다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침례교, 감리교 또는 복음주의적 신념을 공유하는 다른 교단에 속해 있지만, 그들은 확고하게 민주당 연합에 속하며, (낙태와 동성애 관련 문제의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liberal)입니다.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있는 복음주의 교회
복음주의 정치 활동가들이 모두 우파인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자유주의적인 백인 복음주의자 그룹도 있습니다. 가족 연구 위원회의 토니 퍼킨스(Tony Perkins)와 같은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우파라는 용어를 신학적 보수주의 및 복음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미국 내 기독교 우파의 핵심 구성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복음주의자가 이 정치적 설명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 언론은 기독교 우파를 신학적 보수주의와 자주 혼동하지만, 종교적 보수주의자(religious conservative) 또는 보수 기독교인(conservative Christian)이라는 딱지가 신학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보수적이지만 명시적인 정치 조직을 갖지 않은 다른 종교 집단에 적용될 때 복잡해집니다. 이러한 일부 기독교 교단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것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목사인 팀 켈러(Tim Keller)는 보수 기독교 (신학)가 기독교 우파 (정치)보다 선행하며, 신학적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 정치적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경제, 인종 다양성, 가난한 사람 돕기, 부의 재분배에 관한 일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견해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와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속 보수 잡지인 디 아메리칸 컨서버티브(The American Conservative)의 선임 편집자인 로드 드레허(Rod Dreher)는 동일한 구분을 주장하며, 심지어 "전통적인 기독교인", 즉 신학적 보수주의자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념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적 진보주의자 또는 심지어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체성의 변화
2021년에 발표된 퓨 리서치 보고서는 2016년에서 2020년 사이에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하기 시작한 백인 미국인의 수가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스턴 일리노이 대학교 정치학 조교수이자 침례교 목사인 라이언 버지(Ryan Burge)는 복음주의 정체성을 수용하기 시작한 상당수의 미국인이 스스로 교회에 "전혀" 또는 "거의" 출석하지 않는다고 보고하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합니다. 버지는 또한 가톨릭, 무슬림, 심지어 정교회 기독교인, 힌두교인, 모르몬교도와 같이 개신교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서도 "복음주의자"라는 정체성을 수용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반면에, 2022년 9월에 발표된 퓨 리서치 보고서는 "기독교인으로 자랐으나 현재 무종교인 성인의 70%가 민주당 또는 민주당 성향의 무소속이며, 기독교인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의 43%, 전체 미국 성인의 51%와 비교된다"고 보고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로부터의 이탈이 최근 수십 년 동안 심화된 기독교와 정치적 보수주의 간의 연관성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진화론
창조론-진화론 논쟁(Creation–evolution controversy)
복음주의자들은 주류 과학적 견해가 전통적인 "젊은 지구" 연대기와 성경의 특정 구절과 모순된다는 우려 때문에 종종 이를 거부합니다. 스코필드(Scofield)의 영향을 받은 세대주의자와 다른 근본주의자들은 진화론 대신 창조 과학(creation science)과 홍수 지질학(flood geology)을 선호합니다(이 두 가지 모두 과학적 합의와 확립된 지질 시대에 모순됩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생명체의 복잡성과 다양성이 하느님 또는 다른 능동적인 지능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를 가르치도록 강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세간의 이목을 끄는 법정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진화론이 기독교와 양립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빌리 그레이엄, B. B. 워필드(B. B. Warfield), 존 스토트(John Stott)와 같은 저명한 복음주의자들은 이 이론이 기독교 가르침과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문 과학자인 복음주의자들의 조직인 미국 과학 제휴(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의 신중한 연구는 "엄격한" 창조론을 거부하고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지지하게 했으며,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진화론 수용을 장려했습니다. 바이오로고스 재단(The BioLogos Foundation)은 하느님이 진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실현한다는 믿음인 진화적 창조(evolutionary creation)를 옹호하는 복음주의 단체입니다. 바이오로고스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한다고 믿습니다. 바이오로고스는 과학과 신앙이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견해를 대변합니다.
낙태
기독교와 낙태
1980년 이래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정치 활동을 동기 부여하는 중심 현안은 낙태였습니다. 1973년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낙태를 연방 차원에서 합법화)은 가톨릭 신자와 복음주의자를 정치적 연합으로 결집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 연합은 1980년 대통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을 위해 유권자들을 성공적으로 동원했을 때 기독교 우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교회와 국가의 분리
공립학교에서의 조직적인 기도회를 불법화하고 교회 관련 학교를 제한한(예: 인종 차별에 관여하면서 세금 면제를 받는 것을 방지하는 등) 대법원 판결도 기독교 우파를 동원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2002년에 발표된 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31~39%는 '기독교 국가' 헌법 수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복음주의자의 60~75%는 기독교와 정치적 자유주의가 양립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5월에 수행된 한 연구는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선언하는 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가 자신을 복음주의자 또는 거듭난 기독교인으로 규정하는 공화당원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인구통계학적 그룹의 78%가 미국을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로 선언하는 것에 찬성하며, 이는 전체 공화당원의 48%와 비교됩니다.
기후 변화
**복음주의 기후 이니셔티브(Evangelical Climate Initiative)는 지구 온난화를 완화하기 위한 시장 기반 메커니즘을 촉진하기 위한 미국 교회 지도자 및 조직의 캠페인입니다. 복음주의 기후 이니셔티브는 2006년 2월에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가 하버드 의과대학의 건강 및 지구 환경 센터(Center for Health and the Global Environment)와 협력하여 과학자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이 프로젝트를 위해 모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기후 행동을 위한 젊은 복음주의자들(Young Evangelicals for Climate Action)은 "전국의 젊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교육하고 동원하여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합니다."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영향
기독교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도 참조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외교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다른 종교 및 세속 그룹과의 연합을 통해 수단 내전 종식, 아프리카의 에이즈 위기 해결, 인신매매 퇴치와 같은 문제에 대한 조치를 촉구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미국 외교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만든 국제 종교 자유법(International Religions Freedom Act) 통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법은 종교 자유에 대한 국가들의 이행을 모니터링하는 기관을 설립하고 성적이 저조한 국가에 대한 잠재적인 제재를 허용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또한 북한 인권 특사 임명을 요구하고 향후 북한과의 협상에서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 2004년 북한 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 of 2004) 통과에도 관여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인신매매를 억제하고, 인신매매범을 처벌하며, 피해자를 보호하고 재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법(Trafficking Victims Protection Act)도 지지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세대주의적 성경 틀을 통해 중동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땅을 유대인에게 주셨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은 많은 미국 개신교인들에게 성경 예언의 성취로 여겨졌으며, 종교적 의무로서의 시오니즘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있으며, 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직된 입장을 취합니다. 일부는 점령 지역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지지했으며, 다른 일부는 영토 타협이 포함되는 특정 평화 이니셔티브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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