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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리 해적

북아프리카 및 대서양, 지중해에서 활동한 오스만 제국 해적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바르바리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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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리 해적( - 海賊, 영어: Barbary pirates[1])은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 북아프리카지중해 연안을 거점으로 하였던 해적이다.[1] 유럽은 이 지역을 베르베르인이 사는 곳이란 의미에서 바르바리라고 불렀다. 영어권에서는 종종 바르바리 코르세어(Barbary corsairs)[2]라고도 표현하는데, 코르세어라는 낱말 자체가 바르바리 해적을 의미한다.[3] 당시 북아프리카 지역은 오스만 제국에 속한 자치령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코르세어(Ottoman corsairs)라 불리기도 하였다.[4][5] 이러한 명칭들은 유럽의 입장에서 붙인 것으로 이슬람 세계는 이와는 다른 해석을 보인다. 이들은 정식으로 국가의 허락을 받은 사략선으로 무슬림 상인은 오히려 보호했지만 이슬람 입장에서 "믿음이 없는 자들"인 유럽의 선박을 약탈하였다는 것이다.[6]:49-50 이런 입장에서 이들을 바다에서 지하드를 행하던 해군 무자헤딘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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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츠 A. 카스트로의 그림 《바르바리 해적과의 해전》(1681년경 작품)

전성기의 바르바리 해적은 지중해 전역에서 약탈을 자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 연안의 서아프리카까지 진출하였고 멀리는 브리튼 제도[8]아이슬란드까지도 항해하였다.[9] 이들은 지중해 연안 각지에서 항해 중인 상선을 나포하고 연안의 마을과 도시를 습격하여 재물을 강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들이 노예로 삼은 사람들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물론이고 무슬림도 예외가 아니었다.[6]:50

지중해의 해적 활동은 고대 이집트 시기 바다 민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10] 이슬람 해적 역시 이베리아반도알안달루스로 이슬람 세계에 편입된 8세기이후 등장하였지만 널리 알려진 바르바리 해적의 등장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2] 바르바리 해적의 성장에는 다양한 역사적 원인이 혼재되어 있다. 멀리는 14세기 무렵 종결된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과 이슬람 세계가 서로를 적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6]:49 직접적으로는 1492년 그라다나 함락으로 레콩키스타가 완료되고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이 축출되면서 터전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바르바리 해적에 가담하여 세가 커진 이유가 있다.[6]:50 유럽에서 바르바리라 부른 북아프리카 연안은 이슬람 세계에서 마그레브라고 하였다.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 등의 마그레브 도시 국가들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으나 사실상 독립적인 자치령이었다. 널리 알려진 바르바리 해적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 오루츠 레이스 형제는 1516년 알제리 점령으로 당시 통치자였던 살림 알투미를 축출하고 16세기 중반까지 알제리의 실권을 차지하였다.[11] 오스만의 술탄은 바르바리 해적을 유럽을 견재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6]:52-53

바르바리 해적들 대부분은 현지의 무슬림이었지만 종종 유럽인들도 가담하였다. 알람브라 칙령으로 이베리아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가담하였고[12], 잉글랜드 출신의 존 워드나 네덜란드 출신의 지만 단세커 같은 해적들은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바르바리 해적이 되었다.[9] 당시 여전히 갤리선을 주로 사용하였던 바르바리 해적들은 이렇게 유입된 유럽 출신들에게서 범선의 운용법을 배워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거친 대서양을 항해할 수 있게 되었고 범선의 건조 기술도 받아들이게 되었다.[9] 그 결과 17세기가 되어 전성기를 맞이한 바르바리 해적들은 "지중해의 공포"가 되었다.[2]

바르바리 해적들의 주요 사업은 각지의 연안을 습격하여 사로잡은 사람을 노예로 팔아 넘기는 노예 무역이었다. 로버트 데이비스는 1580년에서 1680년 사이 약 85만 명, 1530년에서 1780년까지로 넓히면 무려 125만 명의 사람들이 바르바리 해적에 의해 노예가 되었다고 추정하였지만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되었다는 반론이 있다.[13] 습격의 피해가 너무 큰 나머지 일부 지역에서는 해안가가 황폐화 되고 도시가 버려지기까지 하였다.[8] 바르바리 해적들은 특히 유럽 여성을 사로잡아 노예로 파는 것을 선호하였다.[6]:50

유럽에서는 이미 를 버리고 대형 돛으로 항해하는 범선이 대세가 된 이후에도 바르바리 해적들 대다수는 여전히 많은 노를 저어 항해하는 갤리선을 사용하였다. 갤리선을 탄 해적들이 커틀러스나 다른 소형 무기로 무장한 반면, 유럽 각국 해군의 범선은 노를 치워 넓어진 공간을 대포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17세기 후반 무렵이 되면 바르바리 해적의 배들은 유럽의 프리깃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이 시기 바르바리 해적들은 치안이 부실한 연안을 약탈하다가 유럽의 해군 함선을 발견하면 도주하였다.[14]

유럽 각국은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 행위를 막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하였다. 17세기 후반 유럽 각국이 더욱 강력해진 해군을 동원하여 소탕에 나서면서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15] 그러나 취약한 지역에 대한 약탈 행위는 19세기까지도 이어졌고 특히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은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1801년부터 1816년까지 바르바리 전쟁을 벌였다.[16]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 이후 더욱 강력해진 해적 단속이 진행되자 바르바리 해적은 완전히 소멸하였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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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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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얀소니우스의 《바르바리아》(1650년 무렵). 당시 바르바리아로 알려진 북아프리카 연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해적은 역사 초기부터 세계 여러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지중해에서도 바다를 통해 선박과 연안의 마을을 습격하는 일은 고대 이집트 시기 기록된 바다 민족 이후 계속되었다.[10] 고대 지중해 역시 늘 해적이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해적들에게 잡혀 몸값을 내고 풀려난 일화는 유명하다.[18] 중세 시기 바이킹도 지중해까지 활동을 넓히며 맹위를 떨쳤다.[19]

바르바리 해적은 지중해의 이러한 해적의 역사와 맞닿아 있지만 이전의 해적들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대개 해적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금지되는 범죄 행위이지만 바르바리 해적의 경우 명목상 국가의 승인을 받은 사략이었다.[6]:49 지금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당시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과 오스만 제국은 모두 타국에 대한 사략을 승인하고 있었다. 유럽의 경우도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 이후 대서양을 횡단하는 선박에 대한 타국 사략선의 습격은 공공연한 것이었다.[20] 적대 세력에 대한 사략 행위는 상대에게 손실을 입히면서 자신은 이득을 얻는 것이어서 사략 해적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른바 대항해 시대는 동시에 해적의 황금기이기도 하였다.[21]

여기에 더해 유럽의 여러 나라와 오스만 제국의 적대 관계가 바르바리 해적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14세기 무렵 막을 내린 십자군 전쟁 이후로도 두 세력의 갈등에는 종교적 이유가 겹쳐있었다. 1452년 선포된 교황 니콜라오 5세교황 칙서둠 디베르사스(라틴어: Dum Diversas, 차이가 있는 동안)는 이른바 사라센과 싸우는 것은 성전이라고 선언하고 있었고[22] 이러한 사정은 이슬람 세계 역시 다르지 않아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을 종종 지하드로 포장하였다.[23] 바르바리 해적들이 유럽인을 노예로 삼는 사이 유럽 각지의 사략선들도 무슬림을 납치하여 노예로 삼았다.[24]

스페인레콩키스타를 통해 이슬람을 축출하며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국가이고 1492년 알람브라 칙령을 통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 무어인유대인을 추방하였다.[25] 이러한 스페인의 강경한 정책은 스페인 이단심문소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었다.[26] 그 결과 수 많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추방되었다. 유대인의 경우 이웃한 포르투갈과 유럽 각지로 이주한 경우도 있었지만[27], 무슬림의 경우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바르바리 국가들로 피신 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이렇게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결국 해적에 합류하였다.[6]:49 이러한 사정은 유대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상당수가 해적에 합류하였다.[12]

이미 중세부터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전까지 크게 맹위를 떨치지 못하던 바르바리 지역의 해적들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추방된 인구의 유입과 오스만 제국의 유럽 견제를 위한 후원을 통해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28]

1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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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베자 해전, 1538년

이슬람 세계에서 흔히 마그레브로 불리는 북아프리카 연안은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붕괴 이후 페스,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 등의 주요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각자의 독립적인 정치 체제를 조직하고 있었다. 한 때 모로코의 페스를 거점으로 하는 무와히드 칼리파국이 마그레브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이 지역을 정복하고자 하는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후퇴하게 된다. 16세기 중반 이들 지역은 형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지만 실제로는 자체적인 군사력을 유지한 채 독립적인 자치령이었다.[29] 한편 1415년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 연안의 거점을 확보하자[30] 이들 각 도시국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항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시난 레이스사무엘 팔라체 같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인 세파르딤이 오스만 제국의 깃발 아래 스페인의 선박을 공격하였다.[31][32]

1518년에서 1587년 사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서 베일레르베이(오스만 튀르크어: بكلربكی, 사령관들의 사령관이란 의미에서 제독을 뜻함)에 임명된 지역 실권자들은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유럽 연안을 기습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주로 노예 사냥이었다. 1587년 이후 이들의 해적 행위는 보다 사업화 되었다. 알제나 트리폴리의 실권자인 파샤, 베이, 데이 등이 해적 선장을 후원하였고 레이스라고 불린 선장들은 이들의 후원을 받아 잘 갖추어진 장비로 약탈에 나섰다. 선장은 후원자들에게 약탈품의 10 % 정도를 사례비로 건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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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시카의 제노바탑제노바코르시카를 지배하던 시절 바르바리 해적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1544년, 하이레딘은 이스키아섬을 점령하고 4천여 명의 포로를 잡았고, 리파리 주민 약 2천 - 7천여 명을 노예로 삼았다.[33][34] 1551년, 드라구트몰타 제도고조섬에서 5천 - 6천여 명의 주민 전체를 노예로 사로잡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보냈다. 1554년, 드라구트 휘하의 해적들은 비에스테를 약탈하고 주민 5천 여명을 참수했으며 6천여 명을 납치하였다.[35]

17세기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제임스 1세가 즉위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가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다수의 사략 해적들이 제임스 1세를 비난하며 바르바리 해적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해적이라 손가락질 받던 잉글랜드와 달리 바르바리에서 존중받았으며 선박의 수리와 재보급을 하고 안전한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36]

17세기 동안 유럽 각지와 아프리카 북부는 상대의 약탈에 약탈로 보복하기를 반복하였다.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이 워낙에 광범위하기는 하였으나 유럽 역시 약탈에 나섰다. 1607년 자코포 잉기라미 성 스테파노 기사단이 알제리의 보나를 약탈하여 470명을 살해하고 1,464명을 포로로 잡았다.[37] 베르나르디노 포체티피렌체피티궁에 이를 기념하는 프레스코화 《보나에서의 승리》를 그렸다.[38][39][40] 1611년, 나폴리 왕국에서 출발한 스페인 갤리선들은 몰타 기사단의 갤리선과 함께 튀니지 해안의 케르케나제도를 습격하여 5백여 명의 무슬림 포로를 사로잡았다.[41] 1568년과 1634년 사이에 성 스테파노 기사단이 사로잡은 무슬림은 약 1만4천여 명으로 이 가운데 3분의 1은 연안 습격으로, 3분의 2는 선박 나포로 포획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41] 당시 유럽은 나폴리발렌시아에 대규모 노예 시장이 있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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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다리아노회의 사업은 무슬림에게 잡힌 기독교인의 해방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1637년 작품)

17세기는 바르바리 해적의 전성기였다. 이들은 지중해에서 무차별적인 약탈과 노예 사냥을 하였고 지브롤터를 넘어 대서양 연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1631년 6월 알제의 해적들과 오스만의 병력은 아일랜드 남단 코크주볼티모어를 침략하였다.[17] 이 약탈을 이끈 무라트 레이스는 사로잡은 108명의 주민들을 알제에서 노예로 팔아치웠지만 몇년 뒤인 1635년 자신도 몰타 기사단에게 잡혀 수감되었다. 5년의 수감 생활 끝에 탈출한 무라트는 해적 생활을 접고 모로코의 관리가 되어 여생을 보냈다.[6]:60 볼티모어에서 노예가 된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갤리선에서 사슬에 묶여 노를 저으며 살았고, 여성들은 귀족의 하렘에 끌려가 노예첩이 되었다. 이 가운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든 단 두 명 뿐이었다.[43] 1640년에는 잉글램드 남단의 펜잰스도 알제리 해적의 습격을 받아 80여 명이 사로잡혔다.[44][45]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만 해적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모로코 역시 사략 해적을 후원하였다. 특히 알라위 왕조의 2대 술탄 이스마일 이븐 샤리프는 해적들의 노예 사냥을 후원하며 많은 이득을 얻었다.[46]

잡혀 온 포로들은 일정 기간 수감하면서 몸값을 받고 석방하거나 노예로 팔았다. 막대한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르바리 해적의 전성기에는 알제에만 2만 명 이상의 포로가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로잡혔던 사람들의 목록에는 이탈리아나 시칠리아와 같이 바르바리 해적들의 근거지에서 가까운 지역뿐만 아니라 독일 처럼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사람들도 보인다.[17]

1675년, 존 나버러 휘하의 영국 왕립 해군 함대는 도시에 포격을 가한 끝에 튀니스, 트리폴리와 불가침 협약을 맺었다.[47] 이 협정으로 영국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의 상선들은 보다 안전하게 지중해를 오갈 수 있게 되었지만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쳐야 하였다.

17세기 동안 유럽의 각국은 명목상 해적 퇴치를 공언하였지만 실제는 보다 복잡한 사정으로 얽혀 있었다. 올리버 크롬웰 치하의 잉글랜드는 로버트 블레이크를 튀니스 원정에 파견하였고 프랑스도 1682년 - 1683년 알제를 공격하였지만 실질적인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페인과 적대 관계였던 이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이 스페인 연안을 공격하는 것을 오히려 반겼기 때문이다.[6]:61

18세기~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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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의 데이에게 조공을 바치는 윌리엄 베인브리지 함장(1800년 무렵)

바르바리 해적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사람들을 석방하는 일은 국가가 직접 뛰어들어야 할 정도의 문제가 되었다. 덴마크는 18세기 초 모든 교회를 동원하여 몸값 마련을 위한 자금을 모았고 171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노예 기금"을 설치하였다. 기금은 모든 선원들에게 보험금 형태로 강제 징수되었다. 덴마크는 이 기금으로 1716년에서 1736년 사이 165 명을 구출하였다.[48] 1716년에서 1754년 사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선박 19 척, 선원 208 명이 바르바리 해적에게 납치되었고, 이는 상선의 항해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48]

바르바리 해적 문제는 미국까지 휘말리게 되었다. 독립 이전 영국의 식민지이었던 시절 바르바리 해적들은 영국과의 협상에 따라 미국 선박을 공격하지 않았으나 1776년 미국 독립 선언 이후 미국 독립 전쟁이 진행되자 미국 선박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777년 12월 20일 모로코의 술탄 모하메드 벤 아브달라는 미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공격을 중지하였다.[49] 1786년 채결된 모로코-미국 우호 조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미국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호 조약으로 남았다.[50][51]

바르바리 해적의 위협은 1794년 3월 미국 해군이 창설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바르바리 국가들과 평화 조약을 맺었지만,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상당한 양의 조공을 지불해야 했다. 1795년부터 알제리 섭정국에 지불된 연례 공물은 미국 연방 정부 연간 지출의 20%에 달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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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페레 제독의 알제 프랑스 폭격, 1830년 6월 13일

1798년, 사르데냐 근처의 작은 섬이 튀니지인들에게 공격받아 900명 이상의 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갔다.[53] 18세기 후반이 되면 유럽 전체에서 노예제가 금지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바르바리 국가들에게도 노예제 폐지를 요구하였지만 각자 독자적인 자치국가였던 이들은 통일된 규제를 수립하지 못하였다. 이미 수백년에 걸쳐 주요 사업이 되어버린 노예 시장은 북아프리카 연안의 경제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알제는 강력한 보복이 우려되는 유럽 연안 대신 보호받기 어려운 민족들을 노렸다. 1818년 열린 엑스라샤펠 회의나폴레옹 전쟁 이후 수립된 빈 체제의 동맹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지만[54] 바르바리 해적의 노예 사냥이 계속될 경우에 대한 보복 조치 역시 다루어졌다. 1824년 해리 버러드 닐 휘하의 영국 함대가 알제를 폭격했지만 해적 활동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다.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 이후 프랑스는 식민지가 된 알제에서 강력한 해적 단속을 벌였고 알제 해적은 소멸하였다.[17]

아프리카 북부의 다른 지역 역시 점차 해적 활동이 잦아들었다. 튀니지는 1883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 바르바리 전쟁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였던 트리폴리 역시 1835년 자치권을 박탈당하며 오스만의 직접 통치를 받다가 1912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모로코는 1843-1845년 사이 스웨덴, 노르웨이-덴마크의 연합 함대가 벌인 모로코 원정의 위협을 받으며 그 동안 받아오던 조공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55] 1851년 모로코의 살레에 가해진 보복 포격을 끝으로 모로코 역시 해적 행위가 소멸되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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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리 노예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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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 알제의 노예 시장

바르바리 해적들의 주요 수입원은 노예 무역이었다. 이들은 적어도 1500년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잉글랜드, 아일랜드, 아이슬란드에 이르는 유럽 각지를 습격하고 노예를 사냥하여 팔았다.[57]

수용소

해적들은 노예 수용소를 바그니오라고 불렀는데 이탈리아에서 공중목욕탕을 뜻하는 바뇨에서 온 말이다.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공중목욕탕을 감옥으로 쓴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58] 잡아온 사람들이 분류되고 팔려나가기 까지 종종 북적였던 바그니오에는 예배당, 병원, 상점, 그리고 포로들이 운영하는 술집이 있었다.[59]

갤리 노예

노예로 잡힌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갤리 노예로 보내졌다. 이들은 바르바리 갤리선에서 노를 저었다. 대개는 일년에 80~100일 정도 바다에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죽을 때까지 갤리선에 갖혀 육지를 밟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륙이 허용된 경우에도 여전히 중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에 갤리 노예의 삶은 그야말로 참혹한 것이었다.[60]

규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르바리 해적에게 노예로 잡혔는 지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로버트 데이비스는 16세기에서 19세기 사이 대략 100만에서 125만 명의 유럽인이 노예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61][62]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250년 동안 사로잡힌 사람들이 수가 해마다 꾸준하였다는 가정에 바탕을 한 것이어서 다소 과장되었을 수 있다.[13]

영향

바르바리 해적의 노예 사냥은 종종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간 흑인 노예와 비교되지만, 지중해의 상황은 그 보다 더 복잡하다. 바르바리 해적이 지중해 각지에서 노예를 잡아들이는 사이, 유럽 역시 무슬림을 사로잡아 노예로 부렸기 때문이다. 두 세력의 노예 사냥 밑바닥에는 패권을 다투는 유럽과 오스만의 정치적 대결이 있었다.[63]

바르바리 해적의 노예 사냥은 이후 일어날 유럽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사냥에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 비록 지중해 연안에서는 유럽인이 노예를 부리기 보다는 노예가 될 확율이 더 높았지만 결국은 유럽 역시 바르바리 해적의 전철을 따라 노예를 포획하였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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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인물

요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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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

영국의 역사가 아드리안 티니즈우드는 바르바리 해적 가운데 가장 악명을 떨쳤던 인물들 가운데 유럽인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지중해가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에 이주하여 선박의 건조와 운용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바르바리 해적들은 새로운 항해술로 지중해를 넘어 대서양 연안까지 활동하게 되었다.[9] 잉글랜드의 변호사 출신 헨리 메인워링의 경우 처럼 해적으로 악명을 떨치다 사면을 받고 귀향한 경우도 있다. 그는 잉글랜드에 돌아온 후 지중해 해적의 현황과 대응법을 담은 《해적 담론》을 저술하였다.[9]

외부에서 유입된 또 다른 부류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이었다. 1487년 무렵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케말 레이스 휘하의 오스만 사략선이 악명을 떨쳤다.[65]

이러한 외부인들 외에도 전통적으로 마그레브에 살던 주민들 역시 해적 활동에 가담하였다.

바르바로스 형제

바르바리 해적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로 오루츠 레이스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를 꼽을 수 있다. 친형제였던 둘은 모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임명한 제독이자 사략 해적이었고 훗날 알제리 섭정국의 실권자가 되었다.[66] 이들은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을 뜻하는 바르바로스로 불렸다. 1502년에서 1503년 무렵 오루츠는 하프시드를 위해 제르바섬을 점령하였고 주로 스페인 연안을 공격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스페인과 대결하며 해적 활동을 하던 형제는 1516년 알제의 실권자가 되었다. 1518년 오루츠가 스페인에 사로 잡혀 처형되자 동생인 하이레딘 파샤가 알제의 실권을 승계하였다. 오스만 제국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유럽의 연합함대를 상대로 승리하였고 1545년 은퇴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존 워드 선장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잉글랜드의 사략 해적이었던 존 워드는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바르바리 해적에 합류하여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잉글랜드 시절부터 운용하던 횡범장의 범선을 바르바리 해적에 소개하여 갤리선을 대체하도록 권하였고 이후 바르바리 해적이 지중해를 누빌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1622년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사이다 알후라

상인 가문 출신의 사이다 알 후라는 보기 드문 여자 해적이었다. 훗날 테투안의 총독이 되었고 모로코 술탄과 결혼하였다.[67][68] 1485년 무렵 그라나다에서 태어난 사이다 알후라는 레콩키스타를 피해 아주 어릴 때 모로코로 도피했다. 모로코에서 자신과 처지가 같은 망명한 무어인들을 모아 해적이 되었다. 그는 레콩키스타에 대한 복수, 기독교 해적으로부터 모로코인 보호 등을 명분으로 활동하여 큰 부를 거머쥐었고 아흐마드 알와타시의 비가 되었다. 사이다 알후라는 모로코의 수도 페스가 아니라 자신의 근거지인 테토안에서 결혼식을 올릴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모로코의 군주가 수도를 벗어나 결혼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라이스 하미두

라이스 하미두로 널리 알려진 하미두 밴 알리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까지 활약한 알제 해적이다. 미국 문헌에서는 아미돈(Amidon)으로 알려져 있다.[69] 많게는 2백여 척으로 추정하는 선박을 나포했다.[70] 그는 19세기 초 유럽을 상대로 항전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알제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1815년 미국과의 전투 중 사망하였다.[71]

그 외 인물

  • 케말 레이스 (1451년경–1511년)
  • 무함마드 벤 하산 (1688년경 – 1724년)
  • 무함마드 1세 파샤 (1688년경–1784년)
  • 하산 파샤 (1517년경–1572년)
  • 게디크 아흐메드 파샤 (1482년 사망)
  • 시난 레이스 (1546년 사망)
  • 피리 레이스 (1554년 또는 1555년 사망)
  • 드라구트 (1485년–1565년)
  • 시난 파샤 (1553년 사망)
  • 쿠르토을루 무슬리히딘 레이스 (1487년–1535년경)
  • 쿠르토을루 히즈르 레이스
  • 살리흐 레이스 (1488년경–1568년)
  • 세이디 알리 레이스 (1498년–1563년)
  • 피얄레 파샤 (1515년경–1578년)
  • 라이스 하미두 (1773년–1815년)
  • 울루츠 알리 레이스 (1519년–1587년)
  • 알리 비친 (1560년경–1645년)
  • 시몬 드 단서 또는 시몬 레이스 (1579년경–1611년경)
  • 살로모 드 빈보어 또는 술라이만 레이스 (1620년 사망)
  • 무라트 레이스 장로 (1534년경–1638년)
  • 얀 얀스존 또는 무라트 레이스 주니어 (1570년경–1641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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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추가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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