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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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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이탈리아어: Bari, 이탈리아어 발음: [ˈbaːri] ( ), 바리어 nap; 라틴어: Barium)는 바리 광역시 및 풀리아 지역의 핵심 도시이며, 남부 이탈리아 아드리아해에 위치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본토 지역 내 가장 중요한 경제 중심지 중 한 곳이다. 항구 및 대학 도시이며 성 니콜라오스를 수호성인으로 삼고 있다. 면적 116 제곱킬로미터 (45 mi2)가 넘는 바리 자체 인구는 315,473명이며, 대도시권에서는 인구가 750,000명이다. 광역권 내에는 120만 명에 이른다.[1]
바리는 네 개 도시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에는 현대식 항구 두 곳 사이 반도에 자리한 밀집된 구도심이 있으며, 이곳에는 성 니콜라 대성당, 산 사비노 대성당 (1035년~1171년), 그리고 현재는 주요 야간 명소 역할을 하기도 하는 노르만-슈바벤 성이 있다. 남쪽에는 현재 바리의 중심지인 뮈라 지구 (조아킴 뮈라가 건립)가 있으며, 바다를 따라 난 산책로와 주요 쇼핑 거리(via Sparano, via Argiro)를 품은 사각 격자형 도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바리 중심부를 둘러싼 오늘날 거주 지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기간 건립되었으며 도시의 성문에서부터 깔린 도시를 따라 개발된 옛 교외 지역을 대체하였다. 그 밖에도, 외부의 교외 지역은 1990년대 기간 빠르게 개발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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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고대
고대 시대에는 '바리움'(Barium)으로 알려졌던 바리는 야퓌기아인계 페우케티족의 항구이었다.[3][4] 에티몰로기쿰 마그눔의 저자들은 바리움에 대한 고대 시대 저자들의 어원을 보존하고 있는데, 거기서 이들은 메사피아어로 '집'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5] 바리움은 로마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의 강한 영향을 품고 있었다.[6] 고대 그리스 시대, 이곳은 '바리온'(Βάριον)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3세기, 로마 공화정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로마화가 이뤄졌다. 이 도시는 해안 도로와 트라이아나 가도, 그리고 동쪽으로 향하는 항구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전략적 중요성을 발전시켰으며 타렌툼으로 향하는 지선 도로가 바리움에서 이어진다. 이르면 기원전 181년에 언급된 바리움의 항구는 고대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해당 지역의 주요 항구였고, 어업의 중심지였다.[7] 기록상 최초의 바리 주교는 게르바시우스로 347년 세르디카 공의회에서 언급된 바 있다.[8]
중세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이 벌어진 뒤, 바리는 야만족들의 침입을 받았고 동고트족에 점령되었다. 고트 전쟁 기간 비잔티움 제국이 바리를 탈환하였다가 이후 두 세기 기간을 랑고바르드족계 베네벤토 공국과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9]
“이 시기 내내, 그리고 실제로 중세 전반에 걸쳐, 바리는 지중해의 주요 노예 시장 중 하나로, 슬라브인 노예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10] 노예는 달마티아에서 베네치아나 현재 독일 동부 및 폴란드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또는 발칸반도에서 비잔티움 측에 의해 잡혀온 이들이 대다수였고, 일반적으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가장 흔히) 지중해 주변 무슬림 국가들인 아바스 칼리파국, 우마이야 칼리파국, 코르도바 칼리파국, 시칠리아 토후국, 파티마 칼리파국 등에서 하역되었다(파티마 같은 경우 사칼라바 맘루크 군단을 바리 시장에서 사들인 슬라브인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11]
20년간, 바리는 바리 토후국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바리는 847년에 '칼푼'이라고 하는 초대 에미르들에게 점령되었는데, 이들은 베네벤토의 라델키스 1세가 외국인 수비대로 배치시켰던 자들이었다.[12] 바리는 비잔티움 제국 함대의 도움을 받은 프랑크 제국 황제 루이 2세가 벌인 5년간 원정 끝에 정복되었고 871년에 토호국은 축출되었다.[13] 크리스 위컴은 루이가 바리를 약화시키고 점령하기 위해 5년을 보냈으며, "그리고 그것도 결국 비잔틴/슬라브 해상 봉쇄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이어 "루이가 그 공을 가로챘다" 고 덧붙이며, '적어도 프랑크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 성공 이후에도 루이가 남이탈리아에 오랫동안 머무른 결과 "거의의 불가능한 일을 이루었는데 즉 베네벤토인·살레르노인·나폴리인·스폴레토인을 모두 자기에게 맞서는 연합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데, "후대의 기록에서는 사와단(Sawadān)도 여기에 포함된다" 고 덧붙인다. 885년, 바리는 비잔티움 제국의 '카타판' 또는 총독의 거처가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총독부에 맞선 바리의 멜루스와 그의 매형 다투스 등 랑고바르드 귀족들의 반란 (1009년–1011년)은 칸네 전투에서 완전히 진압당하기는 했으나, 노르만인들로 하여금 이 지역에 첫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025년, 대주교 비잔티우스 지도 하에, 바리는 성좌에 속하게 되며 '관구' 지위를 부여받았다.[14]
1071년에, 바리는 3년간의 포위 끝에 로베르 기스카르에 점령되었으며, 이 지역에 남은 비잔티움의 세력이 축출되었다.[15] 이후에, 바리의 실체적 그리고 정치적 모습들이 변화하게 되었으며,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프라토리움'(praetorium)은 성 니콜라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성 니콜라오스의 성물이 1087년 바리로 전달되어 대성당에 놓였다.[16]
1095년, 피에르 레르미트이 이곳에서 제1차 십자군 전쟁에 대해 연설을 했다.[7] 1089년 성 니콜라 대성당을 축성한 바 있던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8년 10월에 바리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며, 이 공의회는 필리오퀘 문제를 두고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 조율을 의도로 소집된 시노드 중 하나로, 교황의 옆에 자리 잡은 안셀무스가 이를 능숙하게 옹호하였다.[17]
1136년,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는 바리를 점령했다.[18] 비잔틴 군대는 1155년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1세로부터 바리의 지배권을 차지했다. 굴리엘모는 다음 해 도시를 재점령하였고, 자신의 집이 파괴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보복전을 벌였고, 이는 도시 전역에 걸친 광범위한 파괴를 초래하였다. 바리의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이 행위에 대해 고고학자 Giulia Bellato는 바리의 지위를 떨어트리고 그곳 거주민들에 모욕을 주려는 상징적인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 사건들은 후고 팔칸두스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16]
나폴리의 조반나 1세가 헝가리와 분쟁이던 기간, 바리는 1349년 독일 및 헝가리 연합군에 의해 포위를 당했고 함락되었다.[19]
근대

알도이노 필란지에리 디 칸디다의 지배 및 1282년부터 1806년까지 이탈리아 남부 본토를 통치했던 나폴리 국왕들의 통치 아래에서 도시는 긴 쇠퇴기를 겪었다. 이 쇠퇴는 하지만 이곳을 나폴리 국왕이 부여한 지위인 바리 공작으로서 다스렸던 스포르차 가문의 지도 덕에 멈추었으며, 특히 루도비코 및 베아트리체 데스테,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라곤의 이사벨라와 보나 스포르차 등 통치 하에서 그랬다. 바리는 또한 베네치아의 통치도 겪었으며, 이때 항구의 확장과 대단한 번영의 시기로 이어졌고, 또한 외국 시장에서 대단한 수요의 대상이던 내륙 교역품 무역으로 이득을 누렸다.[20][21]
1556년에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두 번째 부인 아라곤의 보나 스포르차는 폴란드를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남겨준 바리에 정착하였다. 통치 기간에 그녀는 성곽 안뜰을 둘러싼 처마의 청동판에 새겨진 비문이 보여주듯 도시의 성을 보강하였고, 또한 여러 교회와 수도원, 두 개의 물 저장고를 건립했으며, 산 니콜라 대성당의 수도사들에게 많은 기부를 행하였다. 보나 스포르차는 1557년 이곳에서 사망했다.[21] 그녀가 죽은 뒤, 바리는 나폴리 국왕의 직접 통치에 놓였다.[22]
1813년, 나폴레옹 시대의 나폴리 국왕 조아킴 뮈라는 새로운 도시화를 시작하며, 도시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체스판 성장 모델을 수립하였으며, 이는 이후 수년간 지속되었다. 구도심의 경에 당시 지어진 마을들은 여전히 당시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23]
현대적인 상수도 시설은 1915년 4월 24일에 바리시에 도입되었는데, 이는 갓 시작된 풀리아 수로의 첫 번째 완공 구간이었다. 1930년대에는 바리의 시장이 아랄도 디 크롤란차가 현대 항만의 개발을 주도하였다.[24]
제2차 세계대전
1943년 9월 11일, 카시빌레 휴전과 관련하여, 바리는 영국 제1공수사단에 저항 없이 점령되었고, 그 뒤 1943년 10월과 11월 제2 뉴질랜드 사단의 뉴질랜드군이 바리에 소집되었다.[25]
1943년 화학전 재앙
독일 루프트바페의 폭격기 대대가 1943년 12월 2일 바리에 있던 연합군과 함선들을을 공격했다. 겨자탄 2,000기 이상이 실려 있던 미국의 함선 SS John Harvey이 파괴되며 공중과 바다로 가스 노출을 야기했고, 선원을 비롯해 도시의 민간인들에게 사망, 화학화상,실명을 일으켰다.
미국의 장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의료 담당관이던 Stewart F. Alexander가 공격 이후 바리로 파견되었다. Alexander는 매릴랜드에 있는 엣지우드 병기창에서 훈련을 받았고,[26][출처 필요] 겨자탄이 일으키는 효과에 어느 정도 익숙하였다. 그는 'John Harvey' 호가 싣은 화물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물과 기름에 희석된 (공기 중 전파된 것이 아닌)겨자탄에 노출됨으로써 비정형적 증상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속히 겨자탄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지휘 계통으로부터 이에 대한 어떠한 공식적인 확인도 받을 수 없었지만, Alexander는 의료진들을 설득하여 환자들을 겨자 가스 노출 환자로 치료하게 했고, 그 결과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바리에서 부검된 희생자들의 많은 조직 표본을 보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표본들은 겨자 가스를 기반으로 한 초기 형태의 화학요법, 즉 머스틴의 개발로 이어졌다.[27]
연합군 지도자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 아이젠하워 등의 명령으로, 기록들이 파괴되었고 사건의 전말은 전쟁이 오랜 기간 비밀에 붙여졌다. 이 공격에 대한 미국 측의 기록이 1959년에 기밀 해제되었으나 이 사건은 1967년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가 작가 Glenn B. Infield가 저서 'Disaster at Bari'에서 공개하였다.[27] 추가적으로,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에 대한 상당한 논쟁도 존재한다. 한 기록에서는 "69명이 온전히 또는 부분적으로는 겨자 가스로 인해 사망하였으며, 그 중 다수는 미국의 상선 선원들이었다."라고 하였고,[28] 다른 기록에서는 많으면 "연합군 군인 1,000명 이상과 이탈리아 민간인 1,0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라고 수치를 제시했다.[29]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책은 두 권이 존재하며 Glenn B. Infield의 'Disaster at Bari'와 Gerald Reminick의 'Nightmare in Bari: The World War II Liberty Ship Poison Gas Disaster and Coverup'이다.
1988년, 닉 T. 스팍 그리고 미 상원의원 데니스 디컨시니와 빌 브래들리의 노력으로, Stewart Alexander는 바리 재앙 당시 그의 활동에 대해 미육군 의무감으로부터 표창을 수여받았다.[30]
'찰스 헨더슨호' 폭발 사건
바리 항구는 1945년 4월 9일 다시 한번 재앙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리버티선 '찰스 헨더슨호가 2,000톤의 공중 투하 폭탄을 하역 중에 항만에서 폭발하고 만 것이다 (폭탄 중 절반은 폭발 당시에 하역이 완료되었다). 360명이 사망했고 1,730명이 부상을 입었다. 항구는 다시 가동 불능 상태가 되었으며, 이번에는 한 달 동안 지속되었다.
- 1945년 4월 9일 – 막사에서 본 광경. 바리에서 주둔하고 있던 준위(WOJG) Hubert Platt Henderson가 촬영한 사진.
- 1945년 4월 9일 – 바리에서 주둔하고 있던 준위(WOJG) Hubert Platt Henderson가 촬영한 사진.
- 1945년 4월 9일 – 바리에서 주둔하고 있던 준위(WOJG) Hubert Platt Henderson가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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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요약
관점
바리는 아드리아해 지역 최대 도시 구역이자 광역 도시 지역이다.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하며, 나폴리보다 더 북쪽 위도에 있고, 로마보다는 더 남쪽에 있다.
기후
바리의 기후는 뜨거운 여름을 지닌 지중해성 기후 (쾨펜: Csa)를 띠면서도 높은 증발산으로 인해 냉대 스텝 기후 (쾨펜: BSk) 접하여, 온화한 겨울과 동시에 뜨겁고 건조한 여름 기후를 띠고 있다.
구역

바리는 2014년에 구성된 5개 구역 (Municipi)으로 구분된다.[33] 구역은 17개 콰르티에레로 다시 구분된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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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요약
관점
2015년 기준, 바리에는 315,473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중에 48.1%는 남성이고 51.9%는 여성이었으며, 인구의 3.8%는 외국인이었다.[37]
이주
바리 내 도시 이주 연구에 따르면, 도시 지역으로의 귀환 이주에 따른 유입이, 도시 지역에서의 이주로 인한 유출보다 더 크다. 도시 지역에서 이주해 나간 사람들은 농촌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는 다른 장소로 이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결과는 바리로 귀환한 211명의 이주민 표본의 배경과 행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바리는 항구 도시로서, 그리스·북아프리카·동지중해와의 강력한 교역 관계 덕분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바리의 경제 구조는 산업, 상업, 서비스, 행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도시 고용의 약 3분의 2는 항구·상업·행정 기능을 포함한 3차 산업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바리의 노동 인구 중 가장 높은 비율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그 비율은 45.6%이다. 1958년부터 1982년까지 약 20%의 이주민은 바리를 떠나 다른 이탈리아 지방자치단체로 갔으며, 약 17%의 이주민은 다른 이탈리아 코무네에서 바리로 들어왔다. 2% 미만의 이주민만이 바리를 떠나 해외로 갔거나 해외에서 바리로 들어왔다.[38]
문화
요리와 미식

바리의 요리는 풀리아 지역 일대에서 발견되는 농산물 세 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밀, 올리브유, 포도주이다.[39]
스포츠

현재 세리에 B에서 참가 중인 현지 축구 팀 SSC 바리는 1990년 FIFA 월드컵 목적으로 건설된, 건축학적으로 혁신적인 58,000석 규모의 스타디오 산 니콜라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경기장에서는 1990-91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이 열리기도 했었다.
2007년, 바리는 최초이자 유일한 수중 스포츠 세계 대회가 열린 곳이다.
교육
- 바리 미술 대학교
- 바리 음악학교
- 바리 이공대학교
- 바리 대학교
교통

바리에는 바리 카롤 보이티와 공항이라는 자체 공항을 두고 있으며, 바리 중심부에서 북서쪽 8 km (5.0 mi) 거리에 있다. 바리 공항역을 통해서 도시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다.
바리 중앙역은 아드리아 노선에 놓여 있으며 로마, 밀라노, 볼로냐, 토리노, 베네치아 등 도시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 외 주요 노선에는 남쪽으로 향하는 바리-타란토 선이 연결되어 있다. 바리 광역 철도가 현지의 통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포자, 바를레타, 브린디시, 레체, 타란토를 비롯해 풀리아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마을들로도 운영을 하고 있다.
바리는 오래된 어업 항구(Porto Vecchio)와 북쪽의 신 항구를 비롯해 일부 요트 정박지를 갖추고 있다. 바리 항구는 동남유럽 지역의 중요한 화물 운송 중심지이다. 바리에서 운영되는 다양한 여객 운송 노선에는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또는 두브로브니크로 향하는 일부 계절별 페리 노선이 포함된다. 바리 – 이구메니차 노선은 그리스로 향하는 인기 있는 페리선 항로이다. 일부 크루즈선이 바리에 정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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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화에서
잔리코 카로필리오의 소설 Guido Guerrieri 시리즈는 바리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소설 상 Guerrieri는 범죄 변호사로 등장하며, 도시에 대한 많은 묘사들이 등장한다.
바리는 렉스 스타우트 1954년 소설 'The Black Mountain'의 주요 배경지이며, 등장인물들이 공산 유고슬라비아로 향하기 위해 승선하는 출발지이다.
1995년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이탈리아인 주부 Francesca Johnson은 바리 출신으로 나폴리에서 자랐다고 언급된다.
출신 유명 인물
- 리차 알바네세
- 조반니 알레만노
- 에마누엘레 아르출리
- 아르귀로스
- 프란체스코 아톨리코
- 리노 반피
- 알레시오 박스
- 교황 베네딕토 13세
- 조이아 브루노
- 잔리코 카로필리오
- 안토니오 카사노
- 리카르도 쿠촐라
- 니콜로 델라르카
- 키아라 푸마이
- 조반니 피에트로 갈로[40]
- 프란코 조르다노
- 알프레도 조비네
- 이반 이우스코
- 가에타노 라틸라
- 구이도 마르출리
- 안토니오 마타레세
- 에르말 메타
- 마르코 미시아냐
- 도메니코 모두뇨
- 알도 모로
- 폼포니오 넨나
- 마리오 누촐레세
- 조 올랜도
- 안나 옥사
- 피노 파스칼리
- 니코 페로네
- 니콜로 피친니
- 빅토르 포사
- 라자루스 라카넬리
- 프란체스코 라카넬리
- 프란체스코 리에폴로
- 로코 로디오
- 세르조 루비니
- 가에타노 살베미니
- 보나 스포르차
- 체사레 스테아
- 카티아 숨마리아
- 젬마 타코냐
- 교황 우르바노 6세
- 니키 벤돌라
- 케코 찰로네
- 둘치타 리에지
- 파비오 델비노
국제 관계
자매 도시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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