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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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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량(朴東亮, 1569년 음력 7월 24일 ~ 1635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자룡(子龍), 호는 오창(梧窓), 봉주(鳳洲)이며 본관은 반남이다.[1] 정안옹주의 시아버지이자 박세채의 조부이다.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을 부탁한 고명칠신(顧命七臣)[2] 중 한 사람이다.[3]
생애
1590년(선조 23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박동량은 의주에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고[4] 같은 해에 정5품 정랑으로 승차하였다.[5] 이듬해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젊은 나이에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었는데 낭관에서 당상관으로 뛰어오른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사간원에서 외람된 관직 제수라고 간하였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6][7] 이듬해에는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박동량의 나이가 26세였다.[8] 이에 박동량이 여러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고[1] 병조참지 관직을 제수받았다.[9] 1597년 다시 승정원 도승지에 올랐고[10] 이듬해에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는데 이를 두고 사간원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거쳐 과분한 보상이라고 간하였고 박동량 본인도 가자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다.[11][12] 1600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13] 이듬해 이조참판에 올랐으며[14] 경기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03년에는 형조참판, 호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지냈고 이듬해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다.[15][1] 평안 감사로 재직중에 아들 금양위 박미의 병세가 위중하여 선조가 박동량을 상경하게 하였는데, 사간원 등에서 상경을 철회하거나 체차[16]시킬 것을 간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17]
1611년 부모의 상을 마치고 판의금부사로 관직에 복귀하였는데[18] 1613년 박응서의 사건과 관련해 김제남과 결탁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19] 박동량은 김제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것을 증명하려다 영창대군의 하인들이 의인왕후의 능에서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고 말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저주 사건은 인목대비와 김제남의 소행으로 몰렸으며 박동량도 신흠 등과 유배되었다.[20][21] 인조반정 후 계축옥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으며,[22] 강진에 위리안치되었다.[23] 이후 유배지가 부안을 거쳐 충원(忠原)으로 옮겨졌고[24] 1633년(인조 11년)에 석방되어 고향에서 죽었다. 사후 아들 금양위 박미 등이 박동량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고, 인조는 윤방, 김유, 김상용, 오윤겸 등과 의논하여 박동량의 관직을 회복시켰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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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실록에서는 박동량을 가리켜 '동량은 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너그러워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6]
가족 관계
조선초기에 좌의정을 지낸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의 후손으로 박조년(朴兆年)의 증손이자 박응복(朴應福)의 아들이며,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조카이다.[1] 어머니 임씨는 석천 임억령의 조카딸 증 정경부인 선산 임씨이다.[1] 연암 박지원은 박동량의 6대손이다.[3]
- 할아버지 : 박소(朴紹)
같이 보기
- 박동량 호성공신교서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 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 - 시흥시 향토유적 제12호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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