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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작가)
일제 강점기의 문학인, 언론인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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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朴英熙, 일본식 이름: 芳村香道 요시무라 고도[*], 1901년 12월 20일 ~ 1950년)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친일 사회주의 성향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작가, 언론인이자 대한민국의 시인, 작가, 교육자이자 국문학자, 대학 교수이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주요 멤버의 한 사람이다. 1945년 12월부터 1946년 12월 춘천공립중학교(춘천중학교의 전신) 교사로 재직했다. 1948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민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 강사로 출강했다.
주로 그는 시인, 잡지인으로 동인 활동, 문학 활동을 하였으며 1920년대 대표적인 카프 문학가로 활동했지만 1933년 카프에서 탈퇴, 이후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사상 전향을 발표하고 친일 문학가로 변절했다. 해방 후 춘천중 교사 등으로 교단에 서기도 했고, 대학 강사로도 활동했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실종됐다. 호는 회월(懷月), 송은(松隱), 본명은 박거복(朴巨福)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한성부 천연동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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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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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성장
1901년(광무 5) 12월 20일 한성부 서대문 천연동에서 태어났다. 모물전(털로 된 조끼, 목도리, 털옷, 두루마기)을 취급하던 모물 의류상 박병욱(朴秉旭)과 김승일(金昇日)의 3녀 1남 중 막내이자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박거복(朴巨福)인데, 오래 살라는 뜻에서 거복으로 이름을 지었다. 뒤에 영희로 개명했다. 호는 회월(懷月)인데, 달을 품는다는 뜻이다. 그밖의 아호로는 송은(松隱), 방촌향도(芳村香道) 등이 있다. 세 명의 누나는 어려서 요절하였다.
교회 전도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가족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1910년(융희 4) 그는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인 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에 입학, 1916년 공옥(功玉) 소학교를 졸업했다. 소학교 졸업 후,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로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5일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때 함께 체포되었으나 훈계 방면되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나도향, 박종화, 안석주, 이능선, 김복진, 김기진 등과는 만나 친교를 맺었다. 그 가운데, 김기진은 고교 3년을 같은 반 동창으로, 뒷날 카프에서 함께 활동한다. 그는 김기진의 권고로 일본 유학을 준비한다. 그는 술을 전혀 안 마셨는데, 박종화는 그를 추도하면서 술도 마시지 못하는 친구라 회고하였다. 박종화에 의하면 그가 성격은 아주 얌전하고 내성적이며, 마음 약한 사람이었다고 했고, 김기진은 양심적 내성적 그리고 소심한 성품이고, 다정한 성격이라 한다.
유학과 귀국
1920년 3월 배재고보를 수료한 뒤, 졸업시험을 보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그가 동경 유학을 떠나던 날 전송 나온 친구 진일선이 서울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노량진역에서 뛰어내리다가 기차 바퀴에 빨려들어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 인사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일로 배재고보 동창들의 반감을 샀고, 이후 일부는 그를 배신자라 공격하기도 했다. 유학 직후, 부친이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받고 1920년 4월 귀국, 한 살 아래의 김봉업과 그해 6월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도쿄의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8개월간 수학했다. 6월, 최승일, 나도향 등과 《신청년》을 발간, 《목동의 적(笛)》이란 시를 실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이듬 해 1921년 귀국했다.
문단 등단과 낭만주의 문학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1년 귀국한 뒤, 1921년 5월 박종화,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 (薔薇村)》을 발행하며 창간호에 〈적(笛)의 비곡(悲曲)〉, 〈과거의 왕국〉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같은 해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안석주, 이능선, 이상화, 현진건, 노자영 등과 함께 잡지 《신청년(新靑年)》에 동인으로 참가했고, 1922년에는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감상적인 내용을 담은 낭만주의적 시를 썼다.
1923년 그는 잡지 《백조》에 <미소의 허영시>, <환영(幻影)의 황금탑>,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을 발표했다. '병적 낭만주의'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현실 도피적이고 유약한 감상에 도취된 〈월광으로 짠 병실〉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카프 결성과 경향파 문학
1923년 김기진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개벽》에 입사한 후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서구식 낭만주의풍의 작품 경향에도 변화가 왔다. 도쿄에 유학한 친구 김기진이 일본에서 유행한 프로문학에 먼저 입문하면서 박영희의 감상적 낭만주의를 강력히 비판한 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백조》를 와해시키고 프로문학을 한국에 소개했다.
파스큘라는 1925년 염군사와의 통합을 통해 카프로 발전하였으며, 박영희는 카프 창립부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았다. 이 시기부터는 시 창작보다는 소설과 평론 작업으로 관심도 옮겨갔다.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사냥개〉는 박영희의 의식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도덕하고 인색한 지주인 구두쇠 노인이 기르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다는 줄거리의 〈사냥개〉는 우화적 수법으로 쓴 신경향파 소설로, 이기영의 〈쥐 이야기〉, 김기진의 〈붉은 쥐〉와 유사하게 동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1926년 프로문학 반대 진영의 대표적 작가인 염상섭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그해 말부터는 김기진과 계급문학과 카프의 노선을 놓고 내용과 형식 중 어떤 것을 우선시할 것이냐는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김기진이 다소 유화적인 입장으로 포괄적 계급문학을 주창한데 반하여 박영희는 강경 노선을 택하여 이데올로기 우선을 내세웠다. 역시 강경파인 임화가 박영희 편에 가세하고 김기진을 공박했고, 이어진 아나키즘 논쟁을 거쳐 김화산 등 아나키스트 분파를 제명하면서 카프의 제1차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신간회 활동과 카프 문학에 대한 회의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박영희는 신간회의 활동이 활성화 됨에 따라 기존의 계급 운동, 즉 인텔리 계층에 국한된 기존의 계급문학운동에 반성하고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즉 대중적 조직과 기반 조성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이념 논쟁을 거듭했다는 비판을 스스로 내렸던 셈이다. 이를 확인한 박영희는 '목적의식론'을 주창하며 계급의식의 추종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실천적 구체성을 획득해야 함을 강조했다.[1]
이러한 목적의식론'이 제기되자 카프 내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1927년 이후 카프는 경성 지부(박영희 등)와 동경 지부(이북만, 임화 및 제3전선파)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쟁점 대부분은 '계급문학운동의 방향 전환과 그 실천방향'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요점은 '계급문학운동이 대중적 정치 투쟁의 전면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박영희와 경성지부는 '의식 투쟁으로 그 한계를 정해둔 것'을 주창한 반면, 이와 반대로 이북만 및 동경지부에서는 정치적 진출과 대중 투쟁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카프는 질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으나 양적으로는 성장해서 전국에 지부를 결성하고 조직을 확대하게 된다.
1928년 2월과 7월에 공산당 검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각각 3차, 4차 공산당 사건이라 불리는데 이 두 차례의 검거 사건으로 모든 사회 운동은 위축되고 만다. 심지어 '민족 단일당'이라고 불리던 신간회조차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검거로 활력을 잃게 되었다.[2] 그리고 동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나중에 이것을 '12월 테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 '12월 테제'에 카프의 동경 지부가 반응하면서 박영희 등이 결정하고 있던 신간회 노선 지지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공산당이 힘을 잃어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신간회를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1929년 5월, 독자적으로 《무산자사》(無産者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정치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9년 11월에 카프 동경 지부 해체를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론이었다. 이때부터 박영희는 카프에서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어갔고, 박영희 자신은 카프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카프도 박영희의 손에서 떠나 무산자사를 세운 기존 동경지부의 주장대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먼저 신간회가 1931년에 해체되었고 평양 등에서 파업을 선동하여 노동 계급의 조직과 투쟁 역량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공산당 재건 운동의 기반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일본 경찰이 주목하기 시작한다. 1931년 5월, 신간회 본부가 해체될 때 경성지부 해소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6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제1차 카프 검거 사건)
전향과 순수 문학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봄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나 석방되었다. 이후 카프의 좌경향에 회의를 품던 중 1933년 12월 10일 카프를 탈퇴했다. 그리고 박영희는 이듬해 1934년 1월 2일, 《동아일보》에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이라는 사설을 기고하여 공개적으로 카프 탈퇴 선언과 전향 선언을 발표하고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이후 극단 신건설 창립을 계기로 1935년 5월 20일 제2차 카프 검거 사건[3] 이 발생하면서 체포되어 약 1년가량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출옥한 뒤에도 사상범으로 보호관찰소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시기의 평론은 초기와 같은 신비주의적이고 심미적인 경향을 보인다. 초기 시를 묶어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1937)도 발간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의 친일 문학

1936년 12월 12일 조선총독부의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 공 이후 민족운동, 사회운동 단체들의 해산과 친일 어용단체에의 가입 압력에 직면한 조선인 문인들은 고문과 협박, 회유, 강압 등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전향하여 친일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1938년 전향자 대표로 선출되어 그해 6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라는 행사에 조선인 대표자의 1인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귀국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고,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선출되고, 일본 북지파견군(北支派遣軍)에 종군하며 요시무라(芳村香道)로 창씨개명을 했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그해 조선문인보국회 총무국장에 선출됐다. 그는 김동인, 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에 포함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된 뒤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총 1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으며[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매일신보》에 실은 〈국민문학의 건설〉(1940) 등 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문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논설들이다.
광복과 한국 전쟁
광복 후 친일 경력 때문에 논란이 되자, 잠시 강원도 춘천으로 낙향, 1945년 12월 춘천공립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46년 12월 사직했다. 1948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민대학교, 국학대학, 홍익대학교 등에서 문학 강사를 지냈고, 담당 교과목은 국문학사였다. 이후 1949년 좌익 경력을 가진 전향자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선도위원으로 정백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
1948년 현대조선문학사(現代朝鮮文學史)를 집필, 탈고했으나 생전에 간행을 보지 못했다. 10년 뒤 백철(白鐵), 김진구 등의 도움으로, 사상계(思想界) 잡지에 1958년 4월부터 1959년 4월에 연재되었다.
1950년 7월 부친에게 1만원을 얻어 서울을 떠난 것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행적이다. 그는한국 전쟁 개전 초기에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피해 피신하다가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납북된 것으로 추정[5] 되나 북한에서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
그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또한 1920년 6월 김봉업과 혼인한 뒤로 이성교제, 연애는 하지 않았고, 가정적이고 가정에 충실했다 한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중년기 이후에는 가정이 단란했다 한다.
그의 친구였던 박종화는 시대적인 제약 밑에서 의무와 책임 아래 전개된 풍운아적 일생, 시대의 격랑 속에서 미처 자신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휩쓸려 가버린 불 행한 역사의 불운한 선구자, 술도 마시지 못하였고 더구나 방랑생활은 그의 기질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사람', 성격은 아주 얌전하고 내성적이며, 마음 약한 사람이었다는 평을 내렸다.
김기진은 그를 양심적 내성적 그리고 소심한 성품인 동시에 다정한 성격이었다고 했다. 백철은 그가 문학평론을 일반 문학에서 독립시킨 선구자라 평했다. 신문학사상 비평을 전담하여 문학비평을 독립시킨 최초의 비평가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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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아버지 : 박병욱(朴秉旭)
- 어머니 : 김승일(金昇日)
- 누나 3명
- 부인 : 김봉업(1902년 ~ ?)
- 장녀 : 박정옥(朴貞玉)
- 차녀 : 박명옥(朴明玉)
- 삼녀 : 박광옥(朴光玉)
- 사녀 : 박인옥(朴仁玉)
- 장남 : 박기원(朴基元)
- 차남 : 박영원(朴榮元)
- 삼남 : 박문웅(朴文雄)
참고자료
- 권영민 (2004년 2월 25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348~350쪽쪽. ISBN 8952104617.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5년 7월 1일). 〈박영희 : 카프문학의 맹장에서 친일문학의 선봉으로 (임규찬)〉.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8971990139.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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