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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중국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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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중국 갈등은 1979년 베트남-중국 전쟁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국경 및 해상 무력 충돌이다. 이 충돌은 베트남-중국 전쟁이 종료된 이후부터 1991년 양국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9년 3월, 베트남-중국 전쟁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중국은 베트남 영토의 "1인치도 탐내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1] 그러나 실제로는 전투 발발 이전까지 베트남이 실효 지배하던 약 60km2의 분쟁 지역을 점령하였다.[2] 랑선 인근의 우의관 주변과 같이 군사적 가치는 낮지만 상징적 의미가 큰 지역도 점령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베트남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있는 고지를 점령하였다.[3]
중국의 국경 지역 점령은 베트남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양국은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지속적인 국경 충돌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충돌은 1988년까지 이어졌으며, 특히 1984~1985년 사이에 가장 격렬했다.[4] 1990년대 초,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수와 소련의 붕괴 등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함께 양국 관계는 점차 정상화되었다. 1991년, 양국은 외교 관계 정상화를 선언하면서 국경 분쟁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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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79년 이후, 베트남-중국 국경에서는 1980년 6월과 10월, 1981년 5월, 1983년 4월, 1984년 4월, 1985년 6월, 그리고 1986년 10월~1987년 1월까지 적어도 여섯 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서방 관측통들에 따르면, 이 모든 충돌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국이 시작했거나 도발한 것이었다.[5] 북쪽 이웃의 또 다른 침공이 임박했다는 위협은 베트남으로 하여금 막대한 방어 병력을 구축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동안, 약 60만[6]~80만 명[7]에 달하는 베트남 정규군과 준군사 병력이 국경 지역에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맞서 약 20만[7]~40만 명[6]의 중국군이 배치되었다.
갈등 전반에 걸쳐, 베트남의 비쑤옌현은 가장 격렬한 전선이었다. 대략적인 분석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 이 전장에서 베트남군의 일곱 개 사단 (313사단, 314사단, 325사단, 328사단, 354사단, 356사단, 411사단)과 하나의 독립 연대 (266연대/341사단 소속)가 투입되었다.[8] 중국 측에서는 일곱 개 군구의 군대가 이 지역에 교대로 파병되었는데, 이는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이 전투 경험을 쌓는 것을 뜻하며 비유적으로 표현한 "호랑이 엉덩이를 건드리다"는 표현에 따른 것이다.[9]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최소 14개 중국 야전군 (제1군, 제12군, 제13군, 제14군, 제16군, 제20군, 제23군, 제26군, 제27군, 제38군, 제41군, 제42군, 제47군, 제67군)이 교대로 이 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다.[8]
정규군의 사용 외에도, 중국은 베트남과 라오스 정부에 맞서 비정규전을 수행하기 위해 소수민족 저항 세력들 (특히 몽족)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켰다.[10] 그러나 1985년부터 라오스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함에 따라, 중국의 반군 지원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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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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