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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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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풍(右扶風)은 중국 전한의 관직으로, 수도 주변 지역인 삼보를 관할하는 특수한 지방 장관이다. 본래는 진나라의 주작중위(主爵中尉)를 계승한 주작도위(主爵都尉)였다. 삼국 시대에 관할 영역이 보통의 군인 부풍군(扶風郡)으로 바뀌면서 관직명도 태수, 즉 부풍태수(扶風太守)로 바뀐다. 당나라때부터는 지금의 바오지시 일대로 고정되었고 바오지시의 전신이 되었다.
전한
요약
관점
전한의 수도권을 관할하는 직책은 경조윤, 좌풍익, 우부풍이 있으며 이는 모두 전한의 내사와 관련이 있다. 전한 고제가 옹나라를 정복하고서 농서군과 북지군과 중지군을 세웠는데 우부풍의 관할 영역은 이 중 중지군에 상당한다. 고제 9년(기원전 198년), 전한의 수도권 지역의 군을 폐지하고 진나라처럼 내사를 두면서 중지군도 폐지됐다. 무제 건원 6년(기원전 135년)에 내사의 관할 영역을 좌우로 나누면서 우내사에 옛 위남군과 중지군이 속하고 좌내사에 옛 하상군이 속했다.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에 우내사의 관할 영역을 나누고 주작도위의 이름을 우부풍으로 고쳐 옛 중지군 영역을 관할하게 했다.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21만 6377호, 83만 6070명, 21현을 관할했다. 현대의 시안시 서부와 바오지시·셴양시 일대에 해당한다.
왕망(王莽)이 신나라를 세우고서는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후한
15성 71,352호 93,091명을 거느렸다. 후한말 헌제 탈출전시기 이각, 곽사의 난으로 경조윤, 좌풍익과 함께 크게 황폐화되었다.[3]
위진
헌제탈출전시기 크게 황폐화되고 옹주가 설치되면서 풍익군으로 강등되었다. 220년년경 한안군에서 개명된 한흥군이 폐지되면서 두양현, 옹현, 유미후국, 진창현이 본군으로 돌아왔다. 266년 군의 일부가 시평군으로 분리되었다. 구 주질현 서남쪽에 촉한과 연결된 잔도중 하나인 낙곡이 있어 낙곡 대전이 본군일대에서 발발했다. 서진대에는 6현 23,000호를 거느렸다.[4]
북위
북위 태무제시기인 태평진군연간에 시평군을 통폐합해서 5현을 거느렸다.[5]
남조
황하서쪽 옹주, 진주, 양주의 주민들이 영가의 난으로 고향이 크게 황폐화되면서 난양 시, 샹양 시일대로 이주했고 이에 따라 부풍군의 일부 현이 그곳으로 교치되었다. 457년(유송 무제 대명 원년)에 위창현(魏昌縣)이 폐지되었다. 송나라때는 3현 2,157호 7,290명을 거느렸다.
수
요약
관점
대업초 수양제시기에 설치되었다. 주현제를 실시할 때는 기주(岐州)라고 칭했다. 9현 92,223호를 거느렸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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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당나라가 주현제를 실시함에 따라 기주(岐州)로 불렸다가 당 현종시기 일시적으로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부풍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757년 봉상부로 승격되었다. 당나라 이후 본군의 연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봉상부참조.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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