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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네히토 친왕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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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네히토 친왕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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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네히토 친왕(일본어: 誠仁親王, 1552년 5월 16일 ~ 1586년 9월 7일)은 일본의 황족이자 황태자이며, 제 106대 천황 오기마치 천황의 다섯째 아들이다.

간략 정보 사네히토 친왕, 출생일 ...

오기마치 천황의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서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그 역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뒤이어 그의 아들이자, 오기마치 천황의 손자인 고요제이 천황이 107대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요코인(일본어: 陽光院)으로 추존되었다.[1] 요코 태상천황(일본어: 陽光太上天皇)이라고도 한다.

현대 일본 왕실은 사네히토의 남계 후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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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에이로쿠(永禄) 11년(1568년) 12월 15일,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고 원복(元服)을 행하였다.[2]

당시 일본은 센고쿠 시대의 전란으로 인해 왕실에서조차 천황의 즉위식은 고사하고 선대 천황의 장례식을 치를 돈조차 모자랄 정도로 자금난을 앓고 있었고, 사네히토 친왕 역시 친왕선하나 원복의 의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판이었다. 이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비용을 부담하여 겨우 이를 치를 수 있었다.[3] 벳토(別当)로는 기쿠테이 하루스에(菊亭晴季)가, 게시(家司)로는 간로지 쓰네모토(甘露寺経元) ・ 니와다 시게미치(庭田重通) ・ 야마시나 고토쓰네(山科言経) ・ 나카야마 지카쓰나(中山親綱) ・ 가라스마루 미쓰노부(烏丸光宣)가 임명되었다.

정식 입태자례(立太子礼)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들, 오기마치 천황에게는 사네히토 이외에 다른 아들이 없었기에(그리고 다른 아들들도 어린 나이에 요절했기에) 당대의 사료에는 사네히토를 가리켜서 '춘궁'(春宮) ・ '동궁'(東宮) ・ '태자'(太子)로 부르는 예도 보인다.[2] '국왕의 장성한 외동아들'이라는 사네히토의 지위는 굳이 태자 책봉이라는 의례적 절차를 거칠 필요도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원복에 앞서 에이로쿠 10년(1567년) 11월에는 가주지 하루코(勧修寺晴子)를 죠로(上臈)[주 1]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뇨보(女房)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네히토의 기사키(妃, 부인)로, 하루코와의 사이에 열세 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었다.[2]

사네히토는 젊은 시절부터 와카(和歌)나 생황 연주에 뛰어났으며, 특히 와카에 관해서는 만년까지 여러 차례 가회(歌会)를 열기도 하였다.[4]

덴쇼(天正) 연간에 들면 견의 상론(絹衣相論) ・ 고후쿠지 벳토 상론(興福寺別当相論) 같은 조정에 대해 들어오는 소송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특히 후자의 경우 노부나가가 일찍이 천황에게 의견을 냈으나 무시당하자 분노한 것을 알고 곧장 천황을 대신해 사죄하는 서장을 보냈다.[5] 또한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에서 노부나가와 겐뇨(顕如)의 청화(講和) 중개자로써 여러 차례 등장하였으며, 덴쇼 8년(1580년)에는 칙명강화(勅命講和)에 따라 최종적으로 해결할 즈음에도 겐뇨에게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서 퇴거하도록 설득하는 서장을 보냈다.[5]

덴쇼 7년(1579년) 11월 이후 사네히토 친왕은 오다 노부나가가 헌상한 '니조 신고쇼(二条新御所)라 불리는 저택에 거처하게 되었다. 이는 원래 니조 가(二条家)의 저택으로 노부나가가 마음에 들어서 니조 가로부터 양도받아서 대대적으로 개조해 자신의 거관(居館)으로 삼았던 건물이었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지은 니조 성(二条城)과는 별개의 건물이다. 니조 신고쇼는 아버지 오기마치 천황이 거주하는 '우에노고쇼'(上御所)와 대비되어 '시타노고쇼'(下御所)라 하였으며, 긴리(禁裏, 우에노고쇼)처럼 오반(小番)도 정비되어 오기마치 천황조차도 조정의 의지 결정에 즈음해서는 반드시 아들 사네히토 친왕에게 의견을 구하게 되어, 마치 '부조정'(副朝廷)의 구상을 띠었다. 나라(奈良)의 고후쿠지(興福寺) 승려가 남긴 일지인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나 렌세이인 기록(蓮成院記録)에서는 사네히토를 '왕'(王)[주 2], '주상'(主上), '금상황제'(今上皇帝) 등으로 부르는 등, 즉위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의 천황(공동 통치자)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기마치 천황은 이미 당시로써는 고령이었고, 사네히토 친왕도 장성하여 언제 즉위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그러나 당시 교토 조정이 양위에 수반하는 일련의 의식들을 자력으로 거행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했고, 또한 선선대인 고카시와바라 천황(後柏原天皇) ・ 선대 고나라 천황(後奈良天皇) ・ 그리고 오기마치 천황 자신까지도 장례식이나 즉위식을 거행할 경비가 없는 상황에서 일본 전국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들로부터 널리 '기부금'을 받아 장례와 즉위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했는데,[주 3] 이마저도 오다 노부나가라는 강력한 권력자의 패권 아래에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교토 조정은 양위 실현을 위해서는 노부나가에게 기대어 그를 움직이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고, 노부나가에 대한 사다이진(左大臣) 추임(推任)이며 삼직추임(三職推任) 등 온갖 파격적인 교환 조건을 제시하며 노부나가를 움직여 보려 애썼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확실하게 거절의 의사 표명을 하지도 않은 채, 그 자신이 죽기 전까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다만 아즈치 성(安土城)에는 천황의 행행(行幸)을 맞이하는 공간인 '御幸の間'이 설치되어 있어서, 이것이 사네히토 친왕의 즉위를 상정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되기도 한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때 노부나가의 적남 노부타다(信忠)는 숙소 묘카쿠지(妙覚寺)를 버리고 보다 군사시설로써 뛰어난 니조 신고쇼(二条新御所)에서 농성하였다. 《예수회 일본 연보》에 따르면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군세가 고쇼를 포위하였는데, 사네히토 친왕은 미쓰히데에게 "나도 할복해야 하느냐?"(自分も腹を切るべきか)라고 물었다고 한다. 자신이 노부나가에게 옹립되어 노부나가에게 의존하는 존재였으므로 노부나가가 쓰러진 상황에서 그에 따라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입장이라고 사네히토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노부타다와 동행하고 있던 무라이 사다카쓰(村井貞勝)의 교섭으로 사네히토 친왕과 그 처자 ・ 숙직하던 구게(公家)들은 고쇼를 빠져나와 긴리(禁裏)로 도망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행에 끼어 도주자가 나올 것을 경계했던 미쓰히데가 말이나 가마, 우차 같은 탈것을 쓰지 못하게 했고, 때문에 사네히토 친왕은 긴리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이때 친왕과 동행하고 있던 렌카시(連歌師) 사토무라 조와(里村紹巴)가 어디서 조악한 짐 운반용 가마를 가져와 바쳤고, 사네히토 친왕만 도중에 그것을 탈 수 있었다고 한다.

덴쇼 12년(1584년) 1월, 3품(三品)에 서위되었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양위하고 상황(上皇)로 물러난 오기마치 천황을 위한 '인노고쇼'(院御所) 건설에 착수하는 등 양위에 적극적으로 지원하려는 자세를 보였는데, 사네히토 친왕은 양위를 기다리지 못하고 덴쇼 14년(1586년) 7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네히토 친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 일본 전역에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히데요시가 사네히토 친왕의 후궁과 밀통한 것을 알고 이에 대해 자결로써 항의한 것이다"라거나, "사네히토 친왕을 대신해 히데요시가 천황이 될 것이다"라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또한 아버지 오기마치 천황도 큰 충격을 받아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는데, 이게 세간에는 "절식한 나머지 굶어죽었다"거나 "아들의 뒤를 따라 할복했다"라고 와전되어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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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사네히토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가즈히토 친왕(和仁親王)이 그 해 11월에 할아버지의 유자(猶子)가 되어, 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가 된 오기마치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요제이 천황은 요절한 아버지에게 '요코인'(陽光院)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존호를 추증하였다.[1]

사네히토 친왕의 다섯째 아들 교이 법친왕(興意法親王)은 오다 노부나가의 유자가 되었고, 여섯째 아들 도모히토 친왕(智仁親王)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자가 되었다. 한편 사네히토 친왕이 노부나가의 유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사네히토 친왕도 교이 법친왕도 모두 '고노미야'(五宮)이라고 불리고 있었던[6] 데에서 비롯된 오해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오기마치 천황의 자식들은 사네히토 친왕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네히토 친왕이 '고노미야'라고 불린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애초에 사네히토 친왕이 '고노미야'라고 불린 적이 실제로 있었는가부터 의심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6]

사네히토 친왕의 뇨보 가운데 한 사람인 덴치노 쓰보네(典侍局)는 덴쇼 10년(1582년) 사네히토 친왕을 떠나 혼간지(本願寺)의 문주(門主) 겐뇨 코사(顕如光佐)의 차남인 고쇼지(興正寺) 문주 겐손 사소(顕尊佐超)와 혼인하였다. 이를 둘러싸고 연담에 적극적인 오다 노부나가와 소극적이었던 사네히토 친왕과의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고, 이것이 쓰보네의 친정인 가미레이제이 가(上冷泉家)의 당주로 쓰보네의 오빠였던 레이제이 다메미쓰(冷泉為満) ・ 친오빠이자 시조 가(四条家)로 양자 입적해 시조 가를 이은 시조 다카마사(四条隆昌) ・ 자서(姉婿)인 야마시나 고토쓰네(山科言経) 이렇게 세 사람이 덴쇼 13년(1585년)에 칙감(勅勘)을 제기하였던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일본의 역사연구자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의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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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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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도

틀:皇室室町

각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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