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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의 변
1582년에 일본의 교토에서 발생한 모반 • 습격 사건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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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의 변(
노부나가는 잠들어 있던 와중에 기습을 당했고, 자신이 이미 포위되었음을 깨닫고 절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12] 노부나가의 적남(嫡男)으로 오다 가(織田家)의 당주였던 노부타다(信忠)도 습격을 당했고, 자신이 숙박하고 있던 묘카쿠지(妙覚寺)에서 니조 고신초(二条御新造)로 옮겨서 항전하였으나 마찬가지로 건물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13]
노부나가와 노부타다, 부자의 죽음으로 오다 정권(織田政権)은 와해되었으나, 미쓰히데도 6월 13일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패하고 죽었다. 이 사건은 히데요시가 대두하여 도요토미 정권(豊臣政権)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고, 센고쿠 시대의 난세는 종언으로 향하게 된다. 때문에 혼노지의 변은 센고쿠 시대라는 일본사의 한 대목 안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미쓰히데가 왜 모반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는 일본 학계에서도 의론이 분분하여 정설이 없다. 여러 가지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어 있다(각각의 설에 대해서는 정변의 요인을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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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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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10년(1582년)3월 11일에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 노부카쓰(信勝) 부자를 덴모쿠 산(天目山)에서 몰아붙여 자결[14][주석 4]로 몰아간 오다 노부나가는 3월 27일, 이름 높던 다카토 성(高遠城)을 공략하는데 성공한 아들 노부타다에게 포상과 함께 "(노부타다 너에게) 천하를 지배할 권한도 주리라"(天下支配の権も譲ろう)[15][주석 5]라는 말까지 하면서 칭찬하였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고후(甲府)에서 답례로 찾아온 노부타다를 스와(諏訪)에 남겨 두고 군세를 현지에서 해산시킨 다음, 약간의 수행원(供廻り, 도모마와리)만을 데리고 가이(甲斐)에서 도카이도(東海道)에 이르는 길을 따라 후지산(富士山) 산기슭을 바라보면서 유유히 귀국길에 오른다.
4월 3일에는 신푸 성(新府城)의 불타버린 자취를 보고, 오랫동안 자신의 가장 큰 숙적이기도 했던 신겐(信玄)이 살던 거관(居館) ・ 쓰쓰지가사키 저택(躑躅ヶ崎館) 터 위에 지어진 임시로 지은 처소에 잠시 머물다가, 4월 10일에 고후를 떠났다.[16] 오랜 적을 쓰러뜨리고, 자신의 뛰어난 후계자에 대한 상속[주석 6] 굳히기라는 목표도 이루었고, 노부나가에게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개선이 되었다.

일본이라는 천하 안에서,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에서는 다테 씨(伊達氏)[주석 7]와 모가미 씨(最上氏)[20] 그리고 아시나 씨(蘆名氏)[21]라는 주요 다이묘들도 노부나가에게 공순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간토(関東) 땅에서는 고호조 씨(後北条氏)도 이미 덴쇼 8년(1580년)에는 동맹의 산하에 들어와 있었고[주석 8] 사타케 씨(佐竹氏)[24]와도 이전부터 외교 관계가 있었는데 도고쿠(東国) 지역에서 겉으로라도 노부나가에게 대드는 것은 호쿠리쿠(北陸)의 우에스기 씨(上杉氏)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정세 1] 그리고 그 우에스기 집안의 당주는 노부나가의 오랜 숙적이었던 신겐의 라이벌이자, 노부나가 자신이 신겐만큼이나 두려워했던 '군신'(軍神)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었다.
호조 우지마사 ・ 우지나오(氏直) 부자는 공동으로 고슈(甲州)로 출진하기로 약속하고 있었는데, 이즈의 도쿠라 성(戸倉城)을 공략한 뒤에는 아무 공헌이 없었고, 3월 21일에는 酒・白鳥徳利を、26일에는 스와에 米俵千俵를 바치고, 4월 2일에는 꿩 5백 마리, 4일에는 말 열세 필과 매 세 마리를 보내는 등, 단기간에 여러 차례 진상품을 보내 노부나가와의 우의를 두텁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 우지마사 부자가 보낸 말과 매는 모두 노부나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돌려 보냈다. [16] 다른 한편으로 노부나가는 오랜 기간 자신의 동맹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는 스루가(駿河) 일국(一国)을 주고, 이에 대한 답례로 이에야스는 자신의 령국(領国)을 지나는 노부나가 일행을 만전에 만전을 기한 배려로 접대하였으며, 하급 무사에 이르기까지 극진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이에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25] 이들 노부나가의 '동맹자'들은 이제는 노부나가의 다음 표적이 되기보다 그 위에 복종하여 종속된다는 자세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26]
서쪽으로는 주고쿠 지방(中国地方)에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소료로 하는 모리 씨(毛利氏)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정세 2] 시코쿠(四国)에서도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가 노부나가의 지도를 거부하면서 조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 교전 상태에 들어갔는데[27](상세한 것은 후술) 규슈(九州)에서는 오토모 씨(大友氏)와 우호 관계에 있었다. 시마즈 씨(島津氏)와도 외교가 있었고, 전년 6월에는 교토 조정의 준삼궁(准三宮)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주석 9]를 중개자로 하여 두 사람을 화목케 함으로써,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로부터 공물을 받았다.[28][주석 10]
노부나가는 덴쇼 9년(1581년)8월 13일, "노부나가 스스로 출진하여 동서의 군세를 부딪쳐 합전을 벌이고, 사이고쿠의 세를 모조리 쳐내어, 일본 전국을 남김없이 노부나가의 지배 아래 두겠다"(信長自ら出陣し、東西の軍勢がぶつかって合戦を遂げ、西国勢をことごとく討ち果たし、日本全国残るところなく信長の支配下に置く決意である)[29]라고 그 의향을 거듭 표명하였지만, 고즈키 성(上月城)에서의 공방전[30] 무렵에는 믿었던 중신이 반항을 했고, 돗토리 성(鳥取城) 공격 때에는 출진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노부나가 자신이 몸소 출진한 이가 평정(伊賀平定)을 마치고 (고야산을 제외한)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기나이(畿内)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번에야말로 제3차 노부나가 포위망[주석 11]을 타도하고 사이고쿠 최대의 센고쿠 다이묘였던 모리 씨를 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정세 2]
한편으로 노부나가는 덴쇼 6년(1578년)4월 9일에 자신이 교토 조정으로부터 받은 우다이진(右大臣) ・ 우콘노에노다이쇼(右近衛大将) 관위를 사양한[31] 이래로 무관(無官) ・ 산이(散位)인 채였다.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과는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에게 양위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고, 덴쇼 9년 3월에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의 양위를 조건으로 사다이진(左大臣) 수락을 일단 받아들였는데, 천황이 金神을 이유로 양위를 중지하면서[32] 노부나가의 임관 이야기도 그대로 공중에 붕 떠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교토 조정은 고슈 정벌의 전승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칙사로서 가주지 하루토요(勧修寺晴豊, 사네히토 친왕의 義兄)을 내려 보내고, 하루토요는 노부나가가 개선하고 이틀 뒤인 덴쇼 10년 4월 23일에 아즈치(安土)에 도착하였다. 가주지 하루토요의 일기인 《하루토요코키》(晴豊公記)에 따르면 4월 25일에 노부나가를 다조다이진(太政大臣)이냐, 간파쿠(関白)냐,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이, 이 가운데 노부나가 본인이 원하는 관직을 하나 고르면 추거하겠다고 하는, 이른바 '삼직추임'(三職推任)을 타진하였고, 5월 4일에는 사네히토 친왕의 친서를 가지고 두 번째 칙사가 방문했다고 한다. 조정에서 두 번째 칙사를 보내 온 것에 곤혹스러워진 노부나가는 모리 란마루(森蘭丸)를 하루토요 앞으로 보내어 조정의 의향을 엿보게 하였고, "노부나가를 쇼군으로 추임하고자 하는 칙사이다"(信長を将軍に推任したいという勅使だ)[33]라고 하루토요는 대답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6일, 7일에 칙사를 향응하면서도 이 건에 대해서는 딱히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34] 그런 가운데 5월 17일에 빗추(備中)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부터 모리 데루모토가 곧 출진한다는 취지가 알려짐과 동시에, 노부나가에의 출마 요청이 도착했다. 이에 노부나가는 출진을 결의하였다. 삼직추임문제는 그렇게 유야무야된 채 혼노지의 변이 벌어지게 된다(계속)

아케치 미쓰히데의 입장
시코쿠 ・ 조소카베 문제
이보다 앞서 도사(土佐)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던 도사의 센고쿠 다이묘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는 노부나가에게 사탕(砂糖) 등을 바치며[35] 소유한 영지에 대해 안도받았다.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의 적남인 야사부로(弥三郎)의 에보시오야(烏帽子親)가 되어 그에게 자신의 이름 '노부'(信)를 주는 등[36] 우의를 두텁게 하고[주석 12] 「四国の儀は元親手柄次第に切取候へ」[35]라고 쓴 주인장(朱印状)을 보냈다. 노부나가도 당시에는 아와(阿波) ・ 사누키(讃岐) ・ 가와치(河内)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미요시 일당(三好一党)이나 이요(伊予)의 고노 씨(河野氏)와의 연결하는 모리씨와 대치하고 있었고, 이들의 배후를 위협할 목적으로 조소카베 씨의 세력 팽창을 종용하였던 것이다.[37] 그 무렵에 취차역(取次役)이 된 것이 아케치 미쓰히데로, 아케치 씨의 가신으로 사이토 도시미쓰(斎藤利三)의 형 요리토키(頼辰)는 호코슈(奉公衆) 이시가이 미쓰마사(石谷光政, 구넨空然)의 서양자(婿養子)로 미쓰마사의 다른 딸이 모토치카의 정실, 즉 노부치카의 생모였을 관계성[주석 13]에 있었다.
그러나 그 뒤 미요시 세력은 쇠락하였고, 노부나가에게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덴쇼 3년(1575년), 가와치의 다카야 성(高屋城)에서 농성하고 있던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 쇼간笑岩)는 투항하고 곧장 마쓰이 도모야스(松井友閑)를 중개로 하여 명품 차솥 '미카즈키'(三日月)를 바치고 노부나가에게 큰 환심을 샀으며, 한번에 가신으로 후대받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도사를 거의 통일한 조소카베 씨도 덴쇼 8년 6월에는 사탕 3천 근을 바치는 등 노부나가와 친분을 맺을 의사를 보이고 있었다.[40] 한편으로 아와 ・ 사누키에까지 크게 세력을 떨치며 쇼간의 아들인 야스토시(康俊)를 꾀어 항복하게 하고, 조카 소고 마사야스(十河存保)를 공격하는 등, 노부나가의 배신(陪臣)이 공격당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쇼간은 하시바 히데요시[주석 14]에게 접근하여 그의 누나의 아들인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를 양사자(養嗣子)로 삼음으로써, 오다 가문의 중신인 하시바 씨와 의를 맺어 조소카베 씨에 대항했다. 쇼간의 본래 영지였던 아와 미마(美馬) ・ 미요시(三好) 두 군을 조소카베에게 빼앗기자 덴쇼 9년 노부나가에게 옛 영지 회복을 호소하여 오다 씨의 방침이 철회되도록 하였다.[41] 노부나가는 미요시와 조소카베 씨 사이를 조정하겠다며 모토치카에게 아와의 점령지 반을 미요시에게 반환하도록 통고했지만, 모토치카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덴쇼 10년 정월에 노부나가는 미쓰히데를 중개로 하여 조소카베에게 도사(土佐) 한 구니의와 남부 아와 2개 군 외에는 반납하라는 내용으로 새로 주인장[41]을 보내 이를 따르도록 명했고, 사이토 도시미쓰도 石谷空然를 통해 모토치카를 설득하려 하였다.[42] 그리고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 무렵 미쓰히데는 조소카베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도 노부나가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고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지만 모토치카의 대답을 얻지 못하고 드디어 노부나가는 셋째 아들 간베 노부타카(神戸信孝)를 총대장으로 하는 시코쿠 정벌(四国征伐)을 명령했고, (혼노지의 변 다음날인) 6월 3일, 시코쿠로 건너가기로 되어 있었다.[43]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의 변경은 취차역으로써의 아케치 미쓰히데의 체면을 손상시켰다.[36][b]
빨라도 전년 가을 단계에서 아와・아와지(淡路)에서의 군사 활동을 개시한 흔적이 있는 쇼간은[44] 2월 9일에 노부나가로부터 시코쿠 출진을 명받았다.[45] 5월에는 오다 군세의 선봉으로 임명되어 勝瑞城에 들었다. 미요시 군세가 아와의 이치노미야 성(一宮城)과 夷山城을 함락시키고 이와쿠라 성(岩倉城)에 거하고 있던 야스토시는 다시금 돌아서서 오다에 호응했다.[42] 혼노지의 변 직전, 미요시 세력은 아와 절반의 탈환에 성공한 상태였고, 머지않은 노부타카의 출진만 기다리고 있었다. 모토치카는 도시미쓰와의 5월 21일자 편지에서 이치노미야 성, 이나야마 성(夷山城), 하타야마 성(畑山城)에서의 철퇴를 허락하면서도 도사로 들어오는 입구에 해당하는 가이후 성(海部城)・아와 오오니시 성(大西城)에 대해서는 확보하고자 한다는 의향을 보였으며[46] '아와 ・ 사누키에서 전면 철퇴하라'는 태도를 강경하게 비친 노부나가와의 사이에서 벼랑 끝 외교를 벌이고 있었다.[42]
긴키간레이(近畿管領)
일본 학계의 현대의 입장은,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 전국 평정' 전략이 각지에서 착실하게 결실을 맺어가고 있던[47] 시기에, 오다 집안의 중신들이 거느린 군단은 사이코쿠 ・ 시코쿠 ・ 호쿠리쿠 ・ 간토에 나가 있었고, 기나이에 남아 '유격군'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입장은 특수한 것이 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긴키 지방 일원에 정치적 ・ 군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미쓰히데는 오미(近江) ・ 단바(丹波) ・ 야마시로(山城)에 자신의 직속 가신을 데리고 있었고, 나아가 요리키 다이묘(与力大名, 組下大名)로써 단고(丹後) 미야쓰 성(宮津城)의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藤孝) ・ 다다오키(忠興) 부자, 야마토(大和) 고오리야마 성(郡山城)의 쓰쓰이 슌케이(筒井順慶), 셋쓰(摂津) 아리오카 성(有岡城)의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이바라키 성(茨木城)의 나카가와 세이슈(中川清秀), 高槻城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따르고 있었다.[48]
일본의 역사학자 다카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寿)는 저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서
光秀は師団長格になり、近畿軍の司令官、近畿の管領になったのである。近畿管領などという言葉はないが、上野厩橋へ入った滝川一益を関東管領というのを認めれば、この光秀を近畿管領といっても少しも差支えないであろう
미츠히데는 사단장격이 되어 긴키군의 사령관, 긴키의 간레이가 되었던 것이다. '긴키칸레이' 같은 말은 없지만, 우에노우마야바시(上野厩橋)에 들어간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를 간토간레이(關東管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정하면, 이 미쓰히데를 '긴키칸레이'(近畿管領)라고 부른다 해도 조금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49]
라고 서술하여, 처음으로 그것을 '긴키간레이'라고 표현하였다. 일본의 역사학자 구와다 다다치카(桑田忠親)도 (같은 시대의 미쓰히데를) "긴키간레이라고도 부를 지위에 취임한 것이 되었다"(近畿管領とも称すべき地位に就くことになった)[49]라고 하여 동의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일대기를 그린 《대몽》을 집필하기도 했던 일본의 소설가 쓰모토 요(津本陽)는 미쓰히데의 입장을 "오다 군단의 '긴키 군관구 사령관' 겸 근위사단장이며, CIA 국장을 겸무하고 있었다"(織田軍団の近畿軍管区司令官兼近衛師団長であり、CIA長官を兼務していた)[50]라고 쓰고 있다. 미쓰히데는 령국인 북부 오미 ・ 단바, 나아가서는 요리키(与力)로써 단고, 와카사(若狭), 야마토(大和), 셋쓰슈(摂津衆)를 거느리고 출진하였을 뿐 아니라 고슈 정벌에서는 노부나가의 신변 경호를 행하는 등 이미 교토 부교(京都奉行)의 지위에서는 떠나 있었다 한들 구게를 통해 여전히 조정과도 교류하고 있었고, (첩보 기관을 겸하는)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의 무라이 슌초켄(村井春長軒)과 함께 교토의 행정에도 관여하며[51] 니조 고신쇼(二条御新造) 건축에도 부교(奉行)를 맡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일하고 있었다.
덴쇼 9년의 기마 열병식(馬揃え)에 미쓰히데가 그 총괄 책임자를 맡았던[52] 것은 이러한 직무를 맡고 있는 이상 필연적이었고, (이때 하시바 히데요시는 부재중이었지만) 오다 군단 안에서 노부나가를 잇는 '넘버 2의 포스트'에 올랐다는 자부심도 있었으리라고, 야망설을 주장하는 나가이 미치코(永井路子)는 생각하고 있다.[53] 그것도 특정한 관할을 지니지 않은 중신, 다키가와 가즈마스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가 잇따라 간토로 파견되거나, 시코쿠 정벌 준비나 이에야스의 접대에 한창 일이 번다해진 상황에서 기동적으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긴키칸레이' 미쓰히데 한 명밖에 없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약간의 수행원만을 거느리고 교토에 머무르고 있던 노부나가와 노부타다 부자를 습격할 수단과 기회를 모두 가진 것은 미쓰히데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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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와 미쓰히데
틀:Mapbox 덴쇼 10년(1582년) 5월 14일, 오다 노부나가는 (《兼見卿記》에 따르면) 아즈치 성으로 내려간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藤孝)에게 명하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재장(在荘)으로써 군무를 해임시키고 다음날에 아즈치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향응역(饗応役, 접반사)를 맡게 하였다.[54] 이에 미쓰히데는 교토 ・ 사카이에서 진기한 물품들을 잔뜩 모아 갖추어 두고 15일부터 사흘 동안 다케다 씨와의 싸움에서 오랜 시간 힘쓴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금 2,000장을 바치고 소유 영지를 안도받은 아나야마 바이세쓰(穴山梅雪) 등 일행을 접대하였다.
그런데 17일 빗추 다카마쓰 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모리 데루모토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早川隆景) ・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의 고즈메(後詰, 후방의 기습 부대)가 출몰했으므로 응원을 요청한다는 취지의 편지가 왔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지금 아키의 세와 가까이 접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린 호기다. 몸소 출진하여, 주고쿠(中国)를 하나하나 쳐내고, 규슈(九州)까지 단번에 평정해 버리자"[55][주석 15]라고 결심하고, 호리 히데마사(堀秀政)를 사자로 하여 빗추로 파견하고, 미쓰히데와 그 요리키슈(与力衆) 즉 나가오카 후지타카 ・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清秀) ・ 시오카와 나가미쓰(塩川長満) 등에게는 그 원분의 선진을 맡도록 하였다.[55] 다만 《천각태평기》(川角太閤記)에서는 단순히 히데요시에게 보낸 원군이 아니라 미쓰히데의 출진 목적은 모리 씨의 령국(領国)인 호키(伯耆) ・ 이즈모(出雲)로 난입하여 그 후방을 교란시키는 데에 있었다고 쓰고 있다.[57] 어쨌든 미쓰히데는 서둘러 17일 중에 거성(居城) 사카모토 성(坂本城)으로 돌아갔고, 출진 준비를 시작한다.
19일, 노부나가는 소켄지(摠見寺)에서 고와카 다유(幸若太夫)에게 춤을 봉납하고, 이에야스, 고노에 사키히사, 바이세쓰, 구스노키 쵸안(楠長譜), 죠운켄 묘쇼(長雲軒妙相), 마쓰이 유칸(松井友閑)에게 이를 피로하였다. 노부나가는 매우 기분이 좋고, 춤이 빨리 끝났으므로 다음날 상연하기로 되어 있던 노를 오늘 바로 상연하도록 단바 덴가쿠(丹波田楽)의 우메와카 다유(梅若太夫)에게 명하였는데, 어째서인지 보는 사이에 기분이 나빠지고, 못생겨서 보기 흉하다며 우메와카 다유를 엄하게 질책하였다. 그 뒤 고와카 다유에게 다시 춤을 추도록 하였고, 겨우 노부나가는 불쾌했던 기분을 풀었다고 한다.[55] 20일, 이에야스의 향응역을 새롭게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호리 히데마사[주석 16],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스가야 나가노리(菅屋長頼) 네 사람에게 맡게 하였다.[58]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교토 ・ 오사카 ・ 나라 ・ 사카이를 느긋하게 구경하라고 권했기 때문에, 21일, 이에야스와 바이세쓰는 교토로 출발한 하세가와 히데카즈가 안내역을 맡아 동행한다. 나가히데와 쓰다 노부즈미(津田信澄)는 오사카에 먼저 가 있으면서 이에야스를 대접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58] [c]
같은 날 노부나가의 적남 노부타다도 상경하여 이치몬슈(一門衆), 보이슈(母衣衆) 등을 데리고 묘카쿠지(妙覚寺)로 들어갔다.[62] 노부타다가 이 시기에 상경한 이유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이에야스가 오사카 ・ 사카이로 가는 데에 동행하기 위해서도 神戸信孝의 시코쿠 정벌군의 진중 문안을 할 예정으로 노부나가와 함께 아와지에 갈 생각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노부타다는 이날부터 혼노지의 변 당일까지 묘카쿠지에 오래 머물렀다.
26일, 사카모토 성을 출발한 미쓰히데는 자신의 다른 거성인 단바 가메야마 성(丹波亀山城)으로 옮긴다. 27일, 미쓰히데는 가메야마 북쪽에 위치한 아타고 산(愛宕山)에 올라 아타고 곤겐(愛宕権現)을 참배하고, 그날 그곳에서 참롱(参籠, 숙박)하였다. (《신쵸코키》에 따르면) 미쓰히데는 생각한 바가 있었는지 다로보(太郎坊)[주석 17] 앞에서 두 번, 세 번씩 오미쿠지(おみくじ, 제비뽑기)를 하였다고 한다.[5] 28일(이설에는 24일[63]), 미쓰히데는 威徳院西坊에서 렌카(連歌) 모임을 열었다. 아타고 백운(愛宕百韻)이라고 불리는, 미쓰히데의 유명한 노래 "이때는 바로/비가 발을 적시는/5월이로다"를 읊은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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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문헌
관련 항목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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