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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일제강점기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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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三千里)는 1929년 6월 창간된 잡지이다.[1]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던 김동환이 주축이되어 설립한 삼천리사에서 발간하였다.[2] 각종 가십, 시사, 문예 등을 다루며 1942년 1월 폐간까지 통권 152호를 발행한 대중 종합잡지였다.[3]

간략 정보 《삼천리》, 편집인 ...

삼천리는 한 때 1만부를 발행하며 대중적 인기를 끌었고 만주, 중국, 일본, 미국 등으로 배송된 것까지 합치면 1930년대 초 발행 부수가 3만부에 달했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4] 창간 초기 문화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였던 《삼천리》는 1931년 만주사변신간회의 해체 이후 통속 잡지의 모습을 보이다가 1937년 무렵 발행인 김동환이 친일로 전향한 뒤 급속히 친일 성향을 보이게 되었고[5] 1941년 잡지의 이름마저 《대동아》로 바꾸었으나 결국 폐간되었다.[1]

해방 이후 김동환은 반민특위에 친일행적을 자수하고 《삼천리》 재발간을 시도하였으나 그리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되었다.[6] 이후 대한민국의 학계에서는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삼천리》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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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김동환은 1922년 일본의 도요대학교 로 유학하였으나 이듬해인 1923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귀국하였고 이후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예 창작도 겸하였다.[6] 1925년 발표한 국경의 밤은 한국 최초의 근대 서사시로 거론되기도 한다.[7] 기자 생활과 문인 활동으로 문학계의 여러 인물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6]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입하였으나 스스로는 민족주의자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5] 《삼천리》는 발행을 위해 삼천리사를 법인으로 등록하였으나 창간부터 폐간까지 김동환이 주도하는 잡지였고, 1931년 최정희가 합류하였다.[8]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한 《삼천리》 창간호에는 〈민족문학과 무산문학의 합치점과 차이점〉과 같은 논쟁을 실을 수 있었다. 참여 문인 역시 이광수, 한용운 등에서 부터 주요한, 염상섭, 정칠성, 문일평, 박팔양과 같이 민족문학계와 카프 소속 문인을 두루 아우를 수 있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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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김동환은 1930년 신간회의 간부로 선임되었고[6] 삼천리는 좌우를 넘나드는 문인들이 기고하는 잡지로 성장하였다. 《삼천리》는 본격적인 대중 종합잡지였다. 《개벽》과 같은 잡지가 천도교라는 종교를 배경으로한 것과 달리 《삼천리》는 대중의 통속적인 관심사를 다루었는데, 이는 김동환이 조선일보의 사회부 차장을 하며 익힌 기자로서의 감각때문일 것이다.[5] 초기 삼천리의 성격은 문화적 민족주의를 표방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발행인 김동환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기반이 그다지 든든한 것은 아니었고, 이념 면에서도 사회주의파시즘을 한 공간에서 찬양하는 모순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5]

일제강점기의 모든 정기간행물은 검열 대상이었기 때문에 《삼천리》 역시 검열로 기사가 압수되거나 삭제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삼천리》는 당국의 이러한 검열에 대응하여 정치적인 기사의 수를 줄이고 점차 문학작품의 비중을 늘렸다. 이를 통해 《삼천리》는 정간이나 폐간 없이 13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10] 최정희가 합류한 1931년 이후로는 여성의 활동도 두드러져 당시까지 주류 문학에 포함되지 못하였던 여성과 농민의 참여 공간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11] 1931년에는 이광수 염상섭 나혜석 최승희 등을 심사위원으로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보내온 사진을 통해 심사하였다.[12]

삼천리는 창간 초기 제주도해녀를 반나체로 남성 사이를 활보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등[13]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고 호기심의 차원에서 접근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후 정칠성, 나혜석 등의 활동 공간을 제공하며 여성주의를 알리기도 하였다.[14]

《삼천리》는 탈코르셋, 이혼, 성욕, 해외여행과 같이 당시 조선에서는 접하기 힘든 주제들을 다루며 근대적 욕망의 표출을 선도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5] 나혜석의 〈이혼고백서〉는 당시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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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화와 폐간

김동환은 1937년 중일전쟁 시기부터 친일적 모습을 보였고 《삼천리》역시 발행인의 변화에 따라 친일 잡지로 변모하였다.[1] 이후 조선 총독의 훈시, 전쟁 특집, 각종 관료의 기고 등을 실으며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총독부는 1941년 11월 태평양전쟁에 따른 전시 출판 정책의 일환으로 신문과 잡지의 폐간을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삼천리》 역시 폐간되었으나 1942년 김동환은 전시 홍보용 잡지인 《대동아》를 발간하면서 삼천리 재개라는 문구를 넣어 《대동아》가 《삼천리》의 연장선에 있음을 표방하였다.[17]

김동환은 태평양전쟁 당시 친일 시국 연설과 징집 연설에 동원되어 전쟁에 나가 싸우다 죽는 것이 황국 신민으로서 조선인의 의무라고 강변하였다.[18]

해방 이후

김동환은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자수하였고[2] 이후 《삼천리》의 복간을 시도하였다.[6] 1948년 5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속간 삼천리》를 발행하였으나[19]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납북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다.[6]

같이 보기

외부 링크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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