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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일본 서군과 동군이 맞붙은 결정적 전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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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Sekigahara no tatakai)는 1600년 10월 21일[5] 일본 기후현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일본사에서 결정적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는 당시 일본의 양대 세력이 격돌하였는데, 일본의 3대 통일자 중 한 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정권의 계승자로 지지하는 세력(서군)이었고, 다른 한쪽은 유력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여 그가 정권을 잡도록 하려는 세력(동군)이었다.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로 그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 최후의 3대 통일자’(삼영걸)로 불리게 되었으며[6], 이후 일본의 최고 정치·군사 권위자인 쇼군(将軍)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통해 250년 이상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 최후의 막부인 에도 막부가 성립하였다.[7]
당시 전장에 참전한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다수 연구자들은 약 17만~20만 명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는 이를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로 평가하기도 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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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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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상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시작한 통일 사업을 완수하여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일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변에서 주요 장수 중 한 명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미천한 출신 때문에 쇼군이 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간파쿠(関白, 섭정)라는 비교적 낮은 지위를 받아들였고, 이후 양자 도요토미 히데쓰구에게 그 직위를 넘기고 자신은 태합(太閤, 퇴임한 간파쿠)이라 칭했다.[9] 57세에 이르러 그는 친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얻었고, 이에 히데쓰구에게 할복을 명했다. 자신의 사망 후 분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해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로 구성된 ‘오대로’를 임명하여, 히데요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공동으로 정사를 맡도록 하고 자신과 같이 대우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10]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다. 이에야스는 정략결혼을 통해 유력 다이묘들과 연합을 맺기 시작했으며,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대신하여 싸우겠다고 주장하는 미쓰나리의 반대에 맞서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11][12] 이에 반발한 5명의 봉행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였다.[11] 아무도 이에야스에 맞서려 하지 않자 미쓰나리는 암살을 계획했으나, 이를 알게 된 이에야스 측 장수들이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미쓰나리는 여장을 하고 가마를 타고 오사카성으로 도피했고,[13] 놀랍게도 직접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후시미성의 손님으로 받아들였으나, 1599년 봄이 되자 자신의 성인 사와야마성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13]
미쓰나리의 암살 계획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도시나가는 그러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논쟁 없이 평화롭게 도쿠가와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11]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섭정 중 한 명인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군대를 증강하여 이에야스에 맞섰고, 이에야스는 교토에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수상한 활동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이에 나오에 가네쓰구는 이에야스 자신이 히데요시의 명령을 위반했음을 지적하는 조롱 섞인 편지로 응수했다.[14]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마시타 나가모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만나 반(反)도쿠가와 군대를 일으킬 것을 모의했으며, 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모리 데루모토가 임명되었다. 이 연합은 서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데루모토는 도쿠가와군의 주력이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진압하러 가는 동안 즉시 진군하여 오사카성을 점령했다.[15]
다이묘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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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직전의 상황
요약
관점

아이즈번의 다이묘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영지 내에서 방어 시설을 신속히 신축·확장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가 그 이유를 묻자, 가게카쓰는 주요 가신을 통해 “도시의 사무라이들이 다도구를 모으는 동안, 시골 사무라이들은 무기를 모은다”라는 냉소적인 답변을 보냈다. 이에야스는 그에게 직접 출두하여 행동에 대한 해명을 하라고 명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7월 12일 오사카에서 동맹들을 소집했고, 같은 달 24일에 이에야스와 그의 군은 오사카를 출발하여 아이즈로 향했다[17] 가게카쓰는 이러한 정세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위험에 처하기 전에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의 군이 이에야스를 공격할 것이라 판단하여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가게카쓰는 선수를 쳐 공격하기로 결심했고, 이에 모가미 요시아키와 다테 마사무네 등 도쿠가와씨의 동맹이 즉각 반격하여 상황을 제압했다.[18]
이에야스는 7월 25일 후시미성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그곳은 주요 가신인 도리이 모토타다가 수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날 오후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18] 두 사람 모두 미쓰나리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가 이 성을 공격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된다면 모토타다가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모토타다는 병력이 자신보다 열 배 많아야만 성이 함락될 것이라고 장담했다.[19]
‘동군’이 목적지를 향해 행군하는 동안, 미쓰나리는 우키타 히데이에(미쓰나리의 측근), 시마즈 요시히로(사쓰마국의 다이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나베시마 가쓰시게, 조소카베 모리치카, 오타니 요시쓰구 등 주요 공모자들을 사와야마성에 소집했다.[18] 도쿠가와와 그의 군은 적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느린 속도로 전진했고, 8월 10일에 에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9월 1일까지 머문 뒤, 병력 5만 명을 이끌고 오야마 북쪽을 향해 재차 행군을 시작했다.[18] 한편 오사카에서는 깃카와 히로이에가 미쓰나리가 자신의 번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전쟁 후 사면받는 조건으로 전투 중에 모리 가문이 편을 바꿀 것을 약속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와 구로다 나가마사는 이러한 깃카와 히로이에와의 서신 교환에서 동군 대표로 활동했다.[20] 깃카와 히로이에와 그의 고위 가신 후쿠바라 히로토시는 동군과의 협력에 대한 증거로 도쿠가와 측에 인질을 보냈다.[21]
후시미성

8월 27일, 서군의 병력이 후시미성에 도착했는데,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리이 모토타다가 예상한 바였다.[18] 서군에는 원래 도쿠가와 측에 가담했던 시마즈 요시히로도 있었으나, 성 입성을 허락하지 않은 모토타다의 모욕에 격분하여 서군으로 전향하였다. 성 안에는 고가국 출신의 닌자 백여 명이 있었으며, 일부는 성 내부에서 방어를 지원하고 나머지는 주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22] 수비군은 4만 명의 공격군을 상대로 열흘을 버텼다.[23] 이에야스가 나카센도를 따라 적군의 성들을 점령할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모토타다는 항복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24]
열흘 후, 미쓰나리가 한 병사의 아내와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겠다고 협박하여 회유하자, 그는 성의 한 망루에 불을 질렀고, 이를 틈타 서군이 본성까지 돌입했다.[19] 불타는 성 안에서 생존자는 200명뿐이었으며, 모토타다는 다섯 차례 역습을 감행하다가 병력이 10명만 남게 되었다.[19] 결국 모토타다와 남은 부하들은 생포를 피하기 위해 할복했다[24] 같은 날인 9월 6일, 미쓰나리 군은 마침내 성을 함락시켰으나 약 3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24]
양군 이동
후시미성이 함락된 뒤, 서군의 동맹군은 오가키성에서 안전하게 합류한 뒤 북쪽과 동쪽으로 진군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그를 미카와국 영지에 고립시키려 했다. 9월 10일, 이에야스는 이미 에도로 돌아와 최종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15일에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의 군이 오가키성에 도착하자 이에야스는 오사카로 복귀할 생각을 하였다. 기요스성과 기후성은 오가키성에서 약 24km 떨어져 있었으며, 나카센도와 도카이도 길목과 가까워 이를 장악하는 자가 교통로를 지배할 수 있었다.[16]
기요스성은 도쿠가와 측 동맹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가신 오사키 겐바(적들에게 ‘귀신 겐바’라 불림)가 수비했고, 기후성은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 오다 히데노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미쓰나리 측에 가담하고 있었다.[16] 히데노부가 주는 위협을 인식한 이에야스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혼다 다다카쓰, 이이 나오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1만6천 명을 맡겨 먼저 기요스성을 확보한 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후성을 함락하도록 명령했다.[16] 이어 이케다 데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야마노우치 가즈토요에게 15,000명을, 그리고 장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36,000명을 맡겨 나카센도를 따라 이동시키며 목표 달성을 확실히 하도록 했다.[25]
도카이도 방면의 병력 31,000명은 9월 28일 기후성을 포위하였고, 다음 날 동군이 성을 점령했다. 히데노부는 전투 이후 이에야스가 거취를 결정할 때까지 한 사찰에 유폐되었다. 10월 7일, 이에야스는 3만 명의 군을 이끌고 에도를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불과 수백 명만을 대 40일이 걸렸던 이전 이동과 달리, 이번에는 같은 거리를 단 2주 만에 주파했다.[25]
우에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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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 병풍화
- 세키가하라 전투도 병풍(6곡 한 척) 기후 세키가하라 옛 전장 기념관 수장 (에도 시대 후기)
참고 문헌
- 후지이 지자에몬, 《세키가하라 합전》 (세키가하라 관광 협회)
- 후지이 지자에몬, 《세키가하라 합전 사료집》 (신진부쓰오라이샤)
- 가사야 카즈히코, 《세키가하라 합전, 사백년의 수수께끼》 (신진부쓰오라이샤)
- 시로미즈 다다시, 《도설(図説) 세키가하라의 합전》 (기후 신문사)
- 후타키 겐이치, 《세키가하라 합전》 (츄코신쇼)
- 宮川尚古「関原軍記大成1~4」(国史研究会)
각주
외부 링크
Wikiwand -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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