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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 임씨
조선 광해군의 후궁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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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 임씨(昭容 任氏, 1598년 ~ 1628년)는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군의 후궁이다. 본명은 애영(愛英)이다.[1]
생애
왕이 끝까지 사랑하며 함께 거처한 자는 임씨(任氏)·정씨(鄭氏) 두 소용(昭容)과 김 상궁(金尙宮)·이 상궁(李尙宮) 등 4, 5명이었는데, 임씨는 자색(姿色)이 있고 아첨을 잘 부림으로 총애를 받았고 정씨는 교태를 잘 부리고 일에 익숙하여 출입하는 문서를 관리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계하(啓下)하였으므로 왕이 배로 믿었다. 그리고 김 상궁은 기교(奇巧)로써 사랑을 받았는데 이 3명이 후궁에서 으뜸이었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73권, 광해 5년 12월 30일 계축 2번째기사
풍천 임씨[2] 임몽정의 딸이자 임취정의 조카로, 어머니는 임몽정의 첩이다.[3] 한편 임수정의 딸이라는 말도 있다.[4] 광해군의 후궁으로, 품계는 정3품 소용이었다.
언제 소용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13년(광해군 5년) 음력 12월 30일의 《광해군일기》 기사에 그녀를 “소용 임씨”로 지칭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인 것은 분명한 듯 하다[5]. 한편 야사 《연려실기술》에는 그녀의 입궁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본디 부모를 일찍 여의어 사실상 임씨 집안과는 연이 끊어졌었고, 임씨의 외조모가 연줄을 이용하여 1610년(광해군 2년) 임씨가 13살이던 때 궁중에 바쳤다고 한다. 당시 원주목사로 부임한 임취정은 이러한 사실을 듣고 깜짝 놀라 이를 중지시키려고 하였으나 결국 하지 못하였다. 또 이 일로 인해 임취정은 광해군의 미움을 샀고, 마침내는 일가가 화를 입게 되었다.[6]
임씨는 용모가 매우 뛰어나고 아첨을 잘 하여, 계략이 뛰어난 김개시 및 문서 처리 능력이 훌륭했던 소용 정씨 등과 함께 광해군의 총애가 “후궁에서 으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5]
한편 임씨는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조의 명에 따라 광해군의 유배지에서 함께 있으면서 그 시중을 들었다.[7][8] 이후 그녀에 대해 폐주의 후궁이라 하여 사사가 논의되었으나, 광해군 재위 시절 이귀와 김자점이 고변을 당할 때 두 사람을 옹호한 공이 있어 죽음을 면하고 계속 해서 광해군의 곁에서 그 시중을 들 수 있었다.[3]
1628년에 유배지에서 광해군을 모시다가 잡혀 와 사형에 처해졌다[9].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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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출처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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