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상궁 김씨

광해군 때의 상궁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상궁 김씨(1584년 ~ 1623년)는 선조, 광해군 때의 상궁으로, 본명은 김개시(金介屎)이다. 광해군 때 국정에 개입해 권력을 휘두르다가 인조 반정으로 참수되었다. 연산군 시절의 장녹수와 함께 조선시대의 폐비이다.[1]

간략 정보 상궁 김씨, 휘 ...

광해군의 세자시절 처소인 동궁에 입궁하게 되었다. 머리가 똑똑하고 문서처리에 능하여 선조의 나인으로 발탁된후, 선조의 승은(承恩)을 받아 특별상궁이 되었으나,[2] 후궁에 오르지는 못했다. 춤과 노래에 능하고 판단력, 정치감각이 뛰어나며 술수에 능하여[3][1] 광해군의 측근이 된후 정승 버금가는 권력을 휘둘렀다. 광해군을 배신하고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협력하였으나 반정후에 요부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4]

Remove ads

생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는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計巧)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5] 『계축일기』에서는 '가히'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또 그의 이름이 『연려실기술』과 『공사견문록』 등에 각각 '개희(介姬)', '가시(可屎)'라고도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이름 '개시(介屎)'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아니라 '가희'의 음차인 것으로 보인다.[6]

원래 춘궁(왕세자, 즉 광해군)의 시녀였는데, 글을 잘알고 문서 처리에 능했기에 선조의 나인으로 발탁되었다.[1] 이후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의 승은(承恩)을 받아 특별상궁이 되었으나,[2] 후궁에는 오르지 못했다.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7] 연산군 시절에 장녹수는 예술적 재능만 있었으나 김개시는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판단력이 뛰어나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 능했다.[3][1]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위해 광해군을 추종하는 세력인 대북파와 손을 잡았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지밀나인이 되었다가[1] 훗날 제조상궁이 되었다.[8] 선왕의 특별상궁을 가까이 한다하여 비난의 소리가 있었으나[8] 광해군은 김개시를 신임했고 김개시 역시 광해에게 충심을 다하며 온갖 악역을 도맡아 했다.[8] 반대 세력인 소북파 숙청작업, 선조의 유일 적자인 영창대군 사망,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 서궁유폐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김개시는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8]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는 등[9] 그 해독이 커서 윤선도, 이회(李洄) 등이 여러 번 상소하여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었다.[4] 조야집요에 따르면, 그의 권력은 중전 유씨를 능가하여 광해군이 어느 후궁의 처소에 침소를 드는 것까지 광해군에게 직접 정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반정의 주력인물인 김자점에게서 뇌물을 받고 광해군을 배신하였다. 수 차례 반정에 관한 상소가 올라왔으나 김개시는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10] 인조반정 당일 구체적인 반정 참여명단이 포함된 상소가 올라왔지만 광해군은 김개시의 말만 듣고 이를 무시한채 연회를 즐겼다.[11][12]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3일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 반정이 성공한 뒤, 인조 측에 의해 요부로 지목된 후 처형되었다.[4]

Remove ads

일화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대립관계였는데, 인목왕후가 정명공주를 회임하였을 때 도깨비 소동으로 유산을 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계축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가계

  • 아버지 : 김씨
  • 어머니 : 강씨

상궁 김씨가 등장한 작품

영화
드라마

같이 보기

각주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