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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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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대(孫命大, 1675~1733)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있던 숙종 32년(1706년) 함평현감(咸平縣監) 정이운(鄭以雲)과 마찬가지로 '치정(治政)을 잘못하였다'는 전라우도 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 이교악(李喬岳)의 탄핵을 받았다.[1] 또한 경상감영의 비장(裨將)으로 있으면서 수축에 관여한 문경 조령 관문이 수마석(水磨石) 및 조각난 작은 잡석(雜石)으로 쌓아서 장맛비를 조금만 만나도 손상되고 터지는 곳이 많았고 쌓은지 겨우 몇 년만에 무너진 것이 반이 넘었다 하여, 문경현감(聞慶縣監) 이중창(李重昌)과 함께 논죄되었다.[2]

이인좌의 난(1728년) 1년 전에 운봉영장(雲峰營將)으로 임명되었다. 안음(安陰)에서 이인좌에 호응하여 난을 일으킨 정희량(鄭希亮) 등이 거창(居昌)을 점령하고 함양(咸陽)을 거쳐 전라도로 넘어가려 하였을 때, 손명대는 미처 감사(監司)나 병사(兵使)에게 보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운봉의 군사를 동원하여 팔량령(八良嶺)를 틀어막았고, 정희량의 반군이 전라도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았다.[3]

난이 평정된 뒤에 공적을 인정받아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영조 9년(1733년)에 제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지로 가던 도중에 강진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2품 관직이 추증되었다.[4]

승정원일기》에는 영조 9년(1733년)에 막 제주목사로 임명되어 희정당에서 서원 영장(西原營將) 이진철(李眞哲)과 함께 입시하여 영조를 뵈었는데, 나갈 때 정문으로 나갔다 하여 우부승지 이귀휴가 추고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영조는 입시하는 것이 생소해서 실수한 것이므로 추고하지 말라고 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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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손명대에게는 손진민(孫鎭民)과 손진방(孫鎭邦) 두 아들이 있었고, 딸은 최흥원에게 시집가서 아들 최주진(周鎭)과 딸을 낳았으며, 그 딸은 이경록(李經祿)에게 시집갔다.

각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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