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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량 (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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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량(鄭希亮, ?~1728년)은 조선 영조 4년(1728년)에 이인좌가 일으킨 반란인 이인좌의 난(일명 무신란)의 가담자이다. 본명은 준유(遵儒)[1],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간략 정보 정희량 ...

생애

요약
관점

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정중원(鄭重元)[1]이다.

이인좌의 난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정희량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영조실록》 영조 4년(1728년) 3월 20일조에서이다. 윤덕유(尹德裕)와 이하(李河)의 대질심문에서 윤덕유의 발언으로 자신이 3월 초에 부동(部洞)에서 이유익(李有翼)을 만났고 그에게서(이유익은 이인좌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하였다) "근래에 들으니, 영남(嶺南)에 정동계(鄭桐溪)의 후손으로 이름이 정희량(鄭希亮)이라는 자가 있어 여러 해 동안 군사 모으는 일을 경영하여 호남과 서로 통하고 있는데, 모두 모이는 날은 3월 초닷새이다."라고 하였다는 데서 나온다.[2]

이후 이레 뒤인 3월 27일 이인좌의 공초에서 이인좌의 입으로 정희량의 신원이 조금 더 자세하게 등장하는데[1] 정희량의 아버지 정중원은 원래 대대로 안음현(安陰縣)에 살면서 온 도(道)에 부유함으로 이름이 자자하여 장획(臧獲)과 전택(田宅)이 매우 많았는데, 만년에 순흥(順興)으로 이사하여 얼마 안 가서 사망하였다.[1]

정희량이 이인좌·박필현·한세홍(韓世弘)의 무리와 체결(締結)하여 영남에서 거사하여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한 뒤 안음의 옛집에다 전곡(錢穀)을 쌓아두고 가동(家僮)과 민정(民丁)을 모집하였다. 이때 '조상의 무덤을 이장하겠다'는 것을 사람을 모으는 핑계로 삼았으며, 병사를 일으키기 직전에도 자신이 조상 무덤 자리를 순흥의 부석사(浮石寺) 뒤편에 이장하려는데 부석사 승려들이 그것을 막으려 들었으므로 혹시 있을 충돌에 대비하여 쌀과 돈을 주고 민정을 모은 것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1]

영남에서의 무신란

안음과 거창, 합천의 함락

이인좌가 청주를 함락시키고 양성(陽城)으로 향해 갈 때 이웅보(이인좌의 동생)는 미리 정희량과 안동(安東)에서 만나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3월 13일에 안동에 이르렀다. 이때 정희량은 아직 안음에서 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에 이웅보가 안음으로 가서 정희량이 모집해 놓은 군사를 고현창(古縣倉)에서 일으키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먹였다.[3]

3월 20일에 정희량과 이웅보는 칼을 차고 말을 타고서 곧장 안음현의 관아로 들어가 현감 오수욱(吳遂郁)에게

나라의 운수가 기울어 병민(兵民)이 사방에서 일어나 종사(宗社)가 장차 위태롭게 되었으니, 마치 불이 처음 붙은 것과 같아 그 형세는 반드시 꺼야만 한다. 이러한 때에 그 누가 능히 한 모책(謀策)을 내어 나라를 위한 심장(深長)한 걱정을 하겠는가? 이웅보(李熊輔)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상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하므로, 마땅히 죽을 힘을 다해 분발해서 위로는 종사를 안정시키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이에 3월 20일에 동지(同志) 한두 사람과 함께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사직(社稷)을 위할 계책을 하는데, 혹 이런 충적(忠赤)을 좌우(左右)에 알려 주지 않아서 포란(暴亂)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감히 이런 충정(衷情)을 알리니, 이 죄를 조금만 용서하여 이 일이 성공되게 한다면 종사의 다행함이 될 것이다.

라는 글을 던지고 나와 버렸고, 거창현감 신정모에게도 글을 보내어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이제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종사가 망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 못된다. 내가 선파(璿派)의 가계(家系)에서 태어났으니 비단 세신(世臣)일 뿐만이 아니므로, 의리상 나라와 함께 죽어야 한다. 망령되이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고자 하여 밤낮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드디어 동계(同溪)의 후손 정희량(鄭希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종사(宗社)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전케 할 계책을 삼고자 하니, 마땅히 먼저 합하(閤下)에게 나가 충적(忠赤)을 토론하면 거의 양해하여 좌우(左右)로 공제(共濟)할 것 같기에 감히 전진하지 않고 고현(古縣)에 퇴복(退伏)하여 신사(信使)가 왕복하기를 기다리겠다. 이로써 이 놈의 온 가슴속에 충적(忠赤)이 있을 뿐 맹세코 다른 마음이 없음을 밝힌 연후에 함께 죽을 힘을 다해 종사를 붙들기를 원하나, 충심(衷心)을 폭로하지 못하여 두려움이 더욱 깊다. 이는 국가의 일이므로 외읍(外邑)의 수령 역시 범연하게 보거나 대수롭지 않게 듣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된다. 귀읍(貴邑)의 병마(兵馬) 및 제반 군기(軍器)를 혹 빌려준다면 며칠 안에 북상(北上)하여 국난(國難)에 달려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오수욱은 두려워하며 진주(晉州)의 병영(兵營)으로 도망쳤고, 신정모도 좌수 이술원(李述源)이 산골짜기까지 뒤쫓아와 말리는 것도 뿌리치며 담을 넘어 달아나 버렸다.[주 1] 이술원은 거창에 들어온 정희량과 이웅보의 반군에 저항하다 죽임을 당했다.[3] 같은 고을의 향임(鄕任) 신명익(愼溟翊)도 반군에게 잡혀 장을 맞아 죽었다.

안음과 거창은 모두 정희량의 반군에게 함락되었다. 반군은 창고의 곡식과 공세(貢稅)의 미포(米布)를 내어 군민(軍民)에게 나누어 주고, 관내 각 사찰의 승려들을 징발하여 기계(器械)와 기고(旗鼓)를 나르게 하였으며, 각 역참에서 마필을 내어 세워놓게 하였다.[3]

합천(陜川)에서도 고을 사람 조성좌(曹聖佐)가 정희량에게 호응하려고 먼저 군수(郡守) 이정필(李廷弼)에게 안음에서의 반란군의 상황을 크게 부풀리며 위협하였는데, 이정필은 나중에야 그가 반란군에 가담했음을 알고 그 형제를 체포해 가둬 버리고 군사를 객사(客舍) 바깥에 포진하여 방비하였다. 이때 조성좌와 내통하고 있던 좌수(座首) 정상림(鄭商霖)이 이정필에게 안음과 거창의 병세가 성대해서 승산이 없고 조성좌 형제에게도 거느린 가동(家僮)이 수백 명이나 된다며 진주로 가서 병영(兵營)에 구원을 청하자고 하여, 이정필이 그 말에 따라 새벽에 합천을 나가 병영으로 향하였다. 그 사이에 정상림은 즉시 옥문을 열고 조성좌 등을 석방하고, 군중(軍中)에 들어가 장교(將校)와 이졸(吏卒)을 거느리고 조성좌에게 절을 올렸다.[3]

삼가(三嘉)에서도 좌수 신만항(愼萬恒)이 현감 이정수(李廷秀)를 쫓아내고 그 군사를 가지고 합천에 있던 반란군에게 가담하였다.

함양으로의 진군 실패

정희량 등은 거창에서 방향을 틀어 방향을 돌려 함양(咸陽)으로 향했다. 함양에서는 함양군수 박사한(朴師漢)이 군사를 내어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함양 백성들이 백성들이 모두 적과 내응하고 있었고, 낭패한 박사헌은 함양을 빠져나와 안음현감 오수욱과 마찬가지로 손명대의 군사에 의지해 영애(嶺隘)를 지키려 하였는데, 운봉영장(雲峰營將) 손명대(孫命大)가 안음에서의 소식을 듣고 미처 감사(監司)·병사(兵使)에게 보고하지 못하고 서둘러 속읍의 군사를 동원하여 먼저 팔량령(八良嶺)을 점거하여 반란군의 길을 틀어막았고, 정희량 등은 함양을 포기하고 거창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손명대의 휘하에 있던 천총(千摠) 정후교(鄭後僑)라는 사람의 공이 컸다.[4] 손명대의 치보에 따르면 그가 운봉의 군사를 동원하여 영애를 틀어막은 것은 3월 23일의 일이었다.[5]

반란군이 함양을 떠나자 박사한도 함양군으로 들어가 함양의 아전과 백성 가운데 적을 따랐던 자들을 색출해 죽였다.[4] 난이 평정된 뒤인 영조 4년(1728년) 4월 7일의 운봉현감 손명대의 장계에는 함양군수 박사한이 '가짜 함양 군수' 최존서(崔存緖) 및 허격(許格) 등을 잡아서 엄중히 가두었는데, 최존서는 함양에 살면서 병기(兵器)를 도적의 진중(陣中)으로 수송하였고, 허격은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 반란군의 보급을 댄 자라고 하였다.[6] 이때 손명대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던 정후교가 자신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양으로 가서 적괴의 머리를 베어 바치겠다고 손명대에게 청했지만, 손명대는 감사(監司)가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며 거절하였다.[4] 함양에서 돌아온 정희량의 군은 둘로 나누어서 이웅보는 우지령(牛旨嶺) 밑에, 정희량은 생초역(省草驛)에 주둔하면서 각각 지례(知禮)와 무주(茂朱)로 향하려 하였다.[7]

이인좌의 공초를 통해 정희량에 대한 신원 정보가 알려졌던 3월 27일, 전라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는 정희량이 안음 옛 현에 진을 치고 있음을 조정에 보고하였다.[8]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정희량을 잡으러 순흥(順興)에 도착하자 순흥부사 이성지(李聖至)는 오히려 금부도사를 도둑이라며 잡으려 드는가 하면 순흥에는 '정희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며 한나절을 버티고서야 포졸을 내어 체포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때 이미 정희량은 그의 자질(子姪)들과 마찬가지로 도망쳐 버리고 없는 상태였다. 이어 순흥에 도착한 영남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이성지를 꾸짖으며 정희량의 어미와 처를 잡아 가두게 하고, 장계를 올려 이성지를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성지가 두려워하여 정희량의 자질 가운데 도망쳤던 자를 잡아 바쳤고, 이 일로 훗날 조정으로부터 이성지를 나문(拿問)했으나 풀려났다.[1]

3월 29일에는 정희량의 반란군으로 보이는 적도들이 남원 지리산의 연곡사쌍계사 사이에 둔취하고 있다고 전라감사 정사효가 보고하였다.[9]

관군의 정비

경상감사를 맡고 있던 황선(黃璿)이 성주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爀)을 우방장(右防將)을 삼아 성주·지례(知禮)·고령(高靈) 등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초계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을 좌방장(左防將)으로 삼아 의령(宜寧)·함안(咸安)·단성(丹城) 등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좌우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였다. 선산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은 본진(本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면서 상주영장(尙州營將) 한날(韓㻋)을 후원(後援)으로 삼았다.[3]

한편 대구에서는 영장 하옥(河沃)이 풍병이 심하게 나는 바람에 경상감사 황선이 그 군관인 김진옥(金振玉)을 차출해 가영장(假營將, 임시 영장)으로 삼고 '독전장'(督戰將)이라 칭하여 여러 고을의 진군하는 군사를 독려하게 했다. 또한 안동의 영장 김정상(金鼎相)에게 속읍(屬邑)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날과 기각(掎角)을 이루어 함께 나가도록 하였다.[3]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이시번(李時蕃)과 진주의 영장 이석복(李碩復)에게도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따라 진군하게 하였다. 이시번은 조정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서 출동하려 하지 않았는데, 안음과 거창, 합천에서 도망쳐 온 오수욱·신정모·이정필 등이 경상우병영으로 와서 군사를 청했음에도 이시번은 끝내 듣지 않았다. 곤양군수 우하형이 군사를 일으켜 진주로 와서 이시번에게 면담을 청하고 군사 동원 명령을 요구하였을 때, 이시번은 우하형에게 반군과 내통하는 자들이 모두 진주와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있는데 자신이 출동하여 성을 비운 틈에 이들이 성으로 들어오는 사태를 우려하여 성을 떠나지 못한다고 하면서 우하형과 영장 이석복(李碩復)에게 먼저 일곱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으로 갈 것과, 이시번 자신은 김해에서 병력이 오기를 기다려서 삼가로 출격할 것을 말하였다고 한다.[10] 그나마 상장(上將)으로써 우하형과 동행한 영장 이석복은 단성과 안음을 거쳐 산음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우하형에게 선봉을 떠넘겼고, 경상우병사 이시번도 삼가현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우하형만이 천총(千摠)인 남해현감(南海縣監) 윤하(尹㵑)와 기복(起復)한 전임 현감(縣監) 하필도(河必圖) 등을 데리고 진군하였다.[11] 경상감사 황선은 반란군이 서로 연계하고 있음을 조정에 알리고, 오수욱·신정모를 잡아 장(杖)을 치고 이정필은 잡아 가두었다.[3]

3월 28일, 영조는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개선하지 말고 일단 백성들을 진정시킬 것을 명하고, 영남안무사 박사수와 도신(道臣)·수신(帥臣)에게 "때에 맞춰 안음(安陰)의 적을 섬멸하되, 한결같이 도순무사의 절제를 받도록 하되, 급하거든 편의대로 하라."고 유시(諭示)하였으며, 경상감사 황선과 경상우병사 이시번에게도 "안음의 적이 일어난 후 본도에서 계문(啓聞)함이 없으니, 우선 문비(問備)하고, 또 적당히 헤아려 군사를 내어 때맞춰 토멸토록 하라."고 하였으며, 반란군에 가담한 자들에게도 속히 귀순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농사를 지으라는 뜻으로 곳곳에 방(榜)을 걸어 효유(曉諭)하게 하였으며, 충청병우후(忠淸兵虞候) 박민웅(朴敏雄)을 발탁하여 상주영장(營將)으로 삼았다.[12] 이시번이 경상우병사에서 파직되어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여적(李汝迪)으로 교체된 것은 3월 29일의 일이었다(다만 이여적이 사폐 즉 왕에게 사은하고 부임지로 향한 것은 4월 1일이다).[11]

4월 1일에는 전(前) 병사(兵使) 이언상(李彦祥)을 무주부사(茂朱府使)로 삼았다. 그곳이 반란군의 소굴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11]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 윤순(尹淳)에게도 옥천(沃川)에서부터 호남(湖南)으로 전진하여 영남의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다.[11]

생초역에 주둔하고 무주로 나아가려 했던 정희량의 군은 무주에서 길이 막혀 진군할 수 없었다.[7] 우지령 밑에서 지례 방면으로 나아가려 했던 이웅보 역시 선산부사 박필건에게 막혀 나아가지 못했다.[7]

합천 수복

3월 30일, 우방장 이보혁(성주목사)이 합천군을 탈환했다.[13]

처음에 이보혁이 우방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사졸들에게 '왕사'(王師)라는 글자를 가슴에 달게 하고 3월 27일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양장평(洋腸坪)에서 규합하기로 하였다. 길에서 해인사의 승려로 반란군에 가담했던 해림(海林)과 철묵(哲默)을 잡았는데, 이보혁은 그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해림을 적중으로 들여 보내서 '왕사(관군)의 형세가 굉장하다'고 크게 떠들어 적의 마음을 동요하게 하고, 이어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던 전령(傳令)을 잡아서 그를 효유하였다.[13]

29일 밤에 이보혁은 합천에서 5리 떨어져 있는 금양역(金陽驛)에 주둔하였다. 반란군의 군교(軍校) 하세호(河世浩)가 와서 도전(挑戰)하였는데, 이보혁이 앞서 오명항이 안성·죽산의 적을 격파했음을 전하는 관문(關文)을 내보였고, 도전하면서 관군의 기세를 엿보려 했던 하세호는 크게 놀라 이보혁 휘하의 성주의 장교들과 사사로이 적을 잡아 공을 세우겠다고 약속하고는 돌아갔다. 앞서 첩자로 들여 보냈던 해림도 적중에서 돌아와 적장을 잡을 수 있게 된 상황을 보고하였다.[13]

한편 합천 성내에서는 하세호와 동조하여 이보혁의 관군과 호응하기로 한 반란군의 장교 함만중(咸萬重)이 인리(人吏) 이소경(李召卿)과 함께 모의하고 조성좌 등을 속여 밤에 몰래 객사를 나와 빙고현(氷庫峴)[주 2]에다 진을 치게 권했다.[13]

30일 새벽에 하세호·김계(金洎)·함만중은 조성좌·조정좌(曹鼎佐)·허택(許澤)이 있던 장막(帳幕)의 죽삭(竹索)을 끊어버리고 그들을 덮쳐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들은 이보혁이 얼른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려 하였는데, 합천군수 이정필이 갑자기 나타나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조성좌 등을 처형해 버리고, 경상우병사 이시번에게 그들의 목을 보냈다.[13] 이에 대해서 경상감사 황선은 이정필이 전에 이미 제 목숨 보전하겠다며 군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이제는 또 제멋대로 적괴를 처형했다고 치계하고 조정에 그를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13]

이정필의 아들인 이인휘와 이준휘는 난이 끝난 뒤에도 여러 차례 격쟁을 올려, "내 아버지는 고을을 버리고 달아난 것이 아니고, 적을 일부러 놓아준 적도 없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호소하였다. 영남안찰사를 지냈던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은 영조 22년(1746년)에 이정필의 신원을 청하는 이조판서 정우량에게 동조하여,

  • 이정필은 합천에서 적을 사로잡고자 비밀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이보혁은 성주에서 막 합천으로 와서 군내에 주둔하면서 역시 정탐군을 세워 정탐을 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애당초 계획을 상의한 적이 없는 상태였으며,
  • 이러한 상황에서 이정필이 먼저 도착하여 적을 죽였으나 그 수급(首級)을 처음 건네준 자는 바로 성주 주둔군으로 여기서 또 각자가 그 공을 빼앗길까 의심하게 되었고,
  • 또 이보혁은 순영(巡營, 경상감사 황선)에 보고하였는데 이정필은 병영(兵營, 경상우병사 이시번)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도신(경상감사)인 황선으로써는 이정필이 이보혁의 공을 빼앗은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14]

합천을 탈환한 이보혁과 정양빈은 거창으로 진군하였다.

반란군의 진압

선산부사 박필건은 이웅보의 진의 상황을 정탐하여 그들이 많이 위축되어 있음을 알고 아전 김진평(金鎭平)을 시켜 적진(賊陣)에 들어가 장교·군졸과 더불어 기(旗)를 휘둘러 신호(信號)를 삼을 것을 약속케 하고, 박필건 자신이 선봉이 되어 우지치를 넘어 적진을 바라보고 기를 휘두르면서 크게 고함치니, 적병이 일시에 모두 무너졌다. 이웅보는 몸을 빼어 말을 버리고 달아나 정희량의 군진(軍陣)이 있는 생초역으로 들어갔다.

이때 곤양군수 우하형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정희량의 군과 5리 거리를 두고 성초역(省草驛)을 핍박하였다. 이때 정희량의 군진에 있던 장교 정빈주(鄭彬周)와 금위군(禁衛軍) 여해달(呂海達)·염마당(廉馬堂) 등이 이웅보·정희량과 반군의 도지휘(都指揮) 나숭곤(羅崇坤) 및 그 무리 이세규(李世奎) 등 21인을 결박하였다. 이때 정희량은 여력(膂力)이 있었으므로, 결박한 때에 조총(鳥銃)을 등에 댄 뒤에야 겨우 묶었으며, 이웅보는 흰 노새를 탔는데, 그 크기가 손을 위로 올려야만 등을 만질 정도였다고 한다.[15]

정빈주 등은 정희량과 이웅보 등을 포박하여 장차 관군에게 보내려 하였는데, 길에서 우하형의 군과 맞닥뜨렸고, 우하형이 보는 앞에서 정희량은 모욕적인 말로 우하형을 도발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우하형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군중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자신이 죽이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가 앞서 거창에서 정희량에게 죽임을 당한 좌수 이술원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그가 정희량과 이웅보의 목을 베고 시체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 먹는 모습을 보이고 나서의 일이었다.[15]

정희량과 이웅보 등의 수급은 경상감사 황선이 수습해 함에 담아 서울로 올려 보냈다. 황선은 치계에서 박필건의 공이 가장 뛰어나고 우하형이 그 뒤를 잇는다고 평가하면서도 생포한 이웅보, 정희량 등을 서울로 보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심문도 없이 즉결처분해 버린 것은 부당하다고 치계에서 비판하였으며, 또한 이석복이 우하형의 후원으로써 황선으로부터 여러 차례 발병(發兵)을 재촉받고도 산음(山陰)에 주둔하면서 관망만 하다가 이보혁 등이 합천을 평정하고 거창으로 진군하여 반군이 지례(知禮)로 지례로 달아나고 있음을 알고서야 뒤따라 와서 우하형이 미처 죽이지 못한 다른 적괴를 처형하고서 공적이랍시고 포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 이시번이 경상우병사로써 처음에는 진주성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나오지 않고 있다가 일이 다급해져서도 조정의 처분을 핑계로 삼가(三嘉)에 처박혀 전투가 끝나고 나자 진주로 돌아간 것, 상주영장인 한날은 느릿느릿 행군하여 가는 곳마다 지체하고 머물렀다는 것 등을 보고하며 이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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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영조실록》에는 난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정미년(1727년) 가을에 도하(都下)에 어떤 시골의 풍채 좋은 거사(居士)가 건장한 말을 타고 종복(從僕)과 자장(資裝)을 매우 성대하게 갖추고 여사(閭舍)에 와서 그 주인더러 저자 백성을 불러 오게 하고는 "혼수(婚需)로 쓸 갖가지 색깔의 채단(綵緞)을 사고 싶다"며 먼저 은(銀) 한 봉(封)을 내어 선금으로 치르고는, 비단을 가지고 오면 그 빛깔과 품질을 봐서 내일 아침에 공평한 값으로 사들이겠다고 약속하였다. 저자 사람들은 이를 믿고 비단을 가져와 놓고 갔는데, 이튿날 아침에 그 시골 거사는 사람들이 가지고 온 채단을 모조리 가지고 도망쳐 버렸고, 그가 묵었던 곳에는 돌멩이를 은처럼 꾸민 것 몇 개가 들어 있는 궤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1]

이때 혼수를 핑계로 사람들에게 가짜 은을 보여 주고 비단을 가져오게 해서 챙겨 달아난 시골 거사가 바로 정희량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변산(邊山) 지역에서 도적들이 창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변산에서 온 도적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하였는데, 정희량이 난을 일으키면서 그때 사기 쳐서 가져온 채단으로 깃발을 만들었다. 정희량이 죽은 뒤에 적당들의 공초에 "정희량이 서울 저자의 채단을 훔쳐와서 이것을 만들었다."고 하였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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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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