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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인

고려의 무신 (?-1179)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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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인(宋有仁, ? ∼1179년 명종(明宗) 9)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무신(武臣)으로, 정중부(鄭仲夫)의 사위이자, 정균(鄭筠)의 매부이다. 아버지가 인종(仁宗) 때 큰 공을 세운 덕분에 음서로 무신이 된 인물이다.

간략 정보 송유인, 로마자 표기 ...
간략 정보 송유인 ...

본래 산원에서 시작해서 얼마 후에 태자부지유로 위장군이 되었는데 당시 태자였던 의종이 그를 총애해서 많은 하사품을 주었다. 본래 송유인은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처는 송나라의 현지처였던 서덕언으로 신분은 낮았지만 재산이 엄청났기에 송유인은 백금 40근을 얻어서 종3품인 대장군에 올랐다.

의종 말기에 대장군이던 그는 문신들과 친하게 지내서 무신들에게 홀대를 받는 형국이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송유인은 본처를 버리고 정중부에게 붙어서 정중부의 사위가 되게 해달라고 졸랐는데 정중부가 이를 받아들여서 정중부의 사위가 되었다. 대장군까지 올랐으면서도 군사 운용 능력이나 무예는 뛰어나지 않았고 형편이 없었다.

명종 초에 서북면병마사가 되었지만 서북 지방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제대로 제어하거나 진압하지 못하는 무능한 행태를 벌였고 병을 핑계로 교대해 줄 것을 청하는 모습만 보였다.

그럼에도 정중부의 사위라는 이유로 병부상서 겸 추밀원부사에 올랐고 상벌을 장악해서 인사행정을 쥐락펴락 했으며 형부상서로 옮겼다가 참지정사로 승진했다.

이후 송유인은 많은 횡포를 부렸는데 본래 관례상 재상이 사신으로 금나라에 갈 경우 수행원의 수가 정해져 있었는데 장사로 이익을 보려는 자들이 사신에게 은 몇 근을 뇌물로 준 후 따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내시낭중 최정(崔貞)이 생일회사사(生日回謝使)로 임명되자 송유인이 자기 집 노비 1명을 같이 데리고 가달라고 최정에게 부탁했지만 이미 그 사절단 일행에 뇌물을 바치고 군식구로 들어간 장사치들이 많아 넣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노비가 주인의 권세를 믿고 그냥 따라갔다가 금나라의 검열에 걸려 송환되었고 그 일로 최정도 면직되고 말았다. 또한 태학박사 노보여(盧寶璵)가 울주방어부사(蔚州防禦副使)가 되자 송유인은 외직 관리는 문관과 무관이 섞여 임명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울주방어부사도 문관이므로 문관인 노보여를 울주방어부사로 임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부임하고 있던 명주부사(溟州副使)와 관성현령(管城縣令)도 모두 문관이었지만 이부(吏部)에서는 고을의 판관과 위(尉)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했으며 대성(臺省)도 이미 서명을 마친 상태였다. 노보여가 이를 들어 송유인에게 항의했지만 전에 잘못 서명한 일이 있으므로 반대 건의를 올리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에 송유인은 중방을 꼬드겨 반대 의견을 내도록 하여 노보여 및 명주판관(溟州判官)과 관성위(管城尉)가 모두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팔관회가 열리자 왕이 내시대부소경(內侍大府少卿) 정국검(鄭國儉)을 시켜 관례에 따라 각 성(省)의 재상들에게 화주(花酒)를 하사했는데 시간이 조금 늦었다고 송유인이 화를 내며 받지 않았다. 왕이 승선(承宣)을 보내어 간곡하게 달래자 그제야 받았으며 정국검은 탄핵을 당하여 내시(內侍) 관적(官籍)에서 삭제되었다가 뒤에 송유인에 아부하여 관적이 회복되었다.

정중부가 문하시중에 있을 때는 그의 사위였기 때문에 중서문하성의 재상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추밀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본래 처에게 부탁해서 수사공과 상서복야 벼슬을 받았다. 그러다가 정중부가 은퇴한 뒤에는 문하시랑평장사 벼슬을 받았다. 당시 민영모(閔令謨)가 먼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있었으나 무인이자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의 기세에 눌린 왕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민영모보다 상위 관직에 임명했는데 송유인이 굳이 사양하자 다시 민영모를 문하시랑평장사로 삼아 송유인의 위에 두었다.

또한 송유인이 수덕궁(壽德宮)을 달라고 요구해 자기 처소로 삼았는데 부귀와 사치가 왕실 못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송유인은 추밀원사로 있던 문극겸과 추밀원부사로 있던 한문준을 눈엣가시로 여겨 이들을 탄핵했고 이들을 좌천시켰다. 하지만 그건 송유인이 몰락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겸 판병부사가 되었으나 결국 1179년 경대승(慶大升)에 의하여, 장인 정중부(鄭仲夫)와 그의 아들이자 송유인의 처남인 정균(鄭筠)과 함께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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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가계

  • 아버지 : 송씨(宋氏)
  • 어머니 : 미상
  • 장인 : 정중부(鄭仲夫, 1106~1179)
  • 장모 : 미상

대중 문화

영상 매체에서 송유인을 연기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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