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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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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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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라틴어: Spartacus)는 기원전 73년부터 2년 뒤인 기원전 71년까지 노예들을 이끌고 반(反)로마 공화정 항쟁을 지도한 노예 검투사이다.

간략 정보 스파르타쿠스Spartacus, 사망 ...

생애

처음에는 병사로 있다가, 후에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되어 싸우다가 잡혀 노예가 되었다. 그는 건강한 몸과 뛰어난 무예로써 노예 투사가 되었다. 그 후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칼 잘 쓰는 노예들을 거느리고, 항쟁을 일으켰다. 한때는 그의 세력이 컸고 대규모 진압 군대까지 격파했으나, 크라수스폼페이우스에게 항쟁은 진압되었고, 약 6,000여 명의 항쟁 가담자들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계급 투쟁

그에게 동조하는 70명의 검투사들과 이탈리아 남부의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 항쟁을 일으켜 한때는 남부전역을 장악했다. 그의 이러한 승승장구는 계급투쟁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로마 공화정의 어리석음과 대농장(라티푼디움)을 소유한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긴 몰락농민들의 불만 덕분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계급투쟁은 투쟁 노선대립으로 인한 내분(스파르타쿠스는 노예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로마 공화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항쟁을 일으켰으나, 대다수의 노예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했다)등으로 인해 진압당했다. 진압으로 붙잡힌 6,000명의 포로들이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형으로 공개처형당했을 정도로 스파르타쿠스의 계급투쟁은 거대한 항전이었다.

당시 포로들의 계급투쟁을 군대의 힘으로 진압한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고 묻자, 서로 자기가 스파르타쿠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는 억압받는 계급들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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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완 사실

요약
관점

본 단락은 고전 사가(플루타르코스·아피아노스·플로루스 등)와 현대 연구(배리 스트라우스, 메리 비어드 등)에 따른 보완 정보를 요약한다.

출생·배경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특히 남서 트라키아 변방의 마이디(Maedi) 부족과 연관된 인물로 전한다.[1][2]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유목적 기원의 트라키아인”으로 묘사하고, 아내는 마이디 부족의 여예언자였으며 그와 함께 노예가 되었다고 기록한다.[3] 출생연도는 대체로 기원전 103년경으로 추정되고, 사망 시 연령은 약 30대 초반으로 비정된다.[4] 지리적으로는 오늘날 불가리아 남서부, 로마령 마케도니아 속주 경계의 트라키아 지역(스트루마/스트리몬 강 유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5] 이름학적으로는 흑해권에서 “스파르타쿠스/스파르타코스” 계열 이름이 빈발했는데, 보스포로스 왕국 스파르토키드 왕조의 왕들 가운데 다수가 이 계열의 이름을 가졌고, 트라키아계 인명 ‘스파라도코스(Sparadokos)’도 전해진다.[6][7]

검투사 유형과 무장

그는 카푸아 인근의 렌툴루스 바티아투스 소유 검투사 양성소(루두스)에서 훈련을 받았고, 무르밀로[8]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9] 다만 사료에 따라 트라키아식(Thraex) 범주로도 분류되며, 로마와의 관계 역시 “한때 로마군으로 복무”했다는 전승과 “로마와 싸우다 포로가 됨”이라는 번역 차(아피아노스의 상이한 번역본)가 공존한다.[10]

봉기 개시와 전개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루두스에서 약 70명 안팎이 주방 도구로 무장해 탈출한 뒤 무기 수레를 탈취했다는 보도가 있다(플루타르코스 78명, 리비우스 74명, 아피아노스 “약 70명”, 플로루스 30명 내외).[11] 탈출 직후 반란군은 크릭수스오이노마오스를 포함한 지도부를 구성했고,[12]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베수비오 산에 가한 포위를 포도덩굴 줄로 절벽을 하강해 기습, 로마군 진영 배후를 타격해 돌파했다.[13] 반란군은 73/72년 겨울 동안 신병을 훈련·무장시키며 작전권을 놀라, 누케리아, 투리이, 메타폰툼까지 넓혔다.[14] 이러한 성공으로 농촌 노예·목자·축산인 등이 대거 합류해 병력은 최대 7만 명에 달했다는 추정이 전한다.[15][16] 사회전쟁(기원전 91–87) 참전 베테랑이 일부 포함됐다는 견해도 있다.[17] 한편 로마 측 대응이 초기에는 미흡했던 배경으로, 당시 본토의 정규 군단 상당수가 세르토리우스의 히스파니아 반란과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수행에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으로 설명된다.[18] 이후 원로원은 루키우스 겔리우스그나이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의 영사군을 파견해 가르가누스 근처에서 크릭수스의 별동대를 격파했으나, 곧 스파르타쿠스에게 연패했다.[19]

전쟁 말기와 사망

원로원은 마침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종결 임무를 맡겼고, 그는 8개 군단(4만 명대)으로 강경 진압에 나서 “데시마티오”(10분의 1 처형)까지 부활시켜 기강을 세웠다.[20] 크라수스는 부하 무미우스의 경거망동으로 일시 패주를 겪었으나 곧 주도권을 되찾고 남하하는 반란군을 레기움 방면에서 봉쇄했다.[21] 스파르타쿠스는 킬리키아 해적과 교섭해 시칠리아로 건너가 봉기를 확산하려 했으나 배신당해 좌절되었고,[22] 이후 크라수스의 대공사로 보급이 차단되자 북동쪽 브룬두시움 돌파로 활로를 모색했다.[23] 이때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귀환해 남하한다는 소식에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 휴전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고,[24] 기원전 71년 루카니아셀레 강 일대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다만 아피아노스는 그의 시신이 끝내 수습되지 않았다고 적었다.[25] 반란 잔당 가운데 6,000명은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100마일이 넘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26]

목적과 논쟁

스파르타쿠스의 전략 목표에 관해서는 사료가 분분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병력을 치살피나 갈리아로 북상시켜 각자 고향으로 흩어지려 했다고 적는 반면,[27] 아피아노스와 플로루스는 일시적으로 로마 시내 진격을 의도했다고 쓴다(뒤에 이 계획을 접었다고도 전한다).[28] 공화정의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려 했다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해방 대상과 동원 구호는 농촌 노예·검투사·목자층에 집중돼 있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29]

사료와 방법론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동시대의 1차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서술은 모두 사건 이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나 작성된 재구성이다. 노예나 직접 목격자의 기록도 없다. 전반적인 복원은 살루스티우스,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등의 단편을 바탕으로 이뤄지며, 이 가운데 살루스티우스가 가장 시기적으로 가깝다.[30][31] 또한 아피아노스의 해당 대목은 번역본에 따라 “로마군에 복무했다” 대 “로마와 싸우다 포로가 됐다”로 갈리는 등, 번역 차이가 해석에 영향을 준다.[32]

유산과 영향

볼테르는 제3차 노예전쟁을 “역사상 유일하게 정당한 전쟁”이라고 칭했고,[33] 카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고대사의 가장 찬란한 사내”이자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라고 높이 평가했다.[34] 투생 루베르튀르는 “흑인 스파르타쿠스”로 불리며 스파르타쿠스의 상징성은 스파르타쿠스단과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등 좌파 혁명 운동의 표상으로 이어졌다.[35][36] 바이에른 일루미나티의 창립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서신에서 ‘스파르타쿠스’를 필명으로 썼다.[37] 소련 및 동구권에서는 스파르타키아드 등 각종 체육 행사와 구단 명칭에 ‘스파르타크/스파르타쿠스’가 널리 쓰였다.[38]

추가 주해(잠재 지식과의 합치)

  • 고대 그리스어 표기 Σπάρτακος(Spártakos)는 흑해·트라키아권 명명 전통과 연결되며, 스파르토키드 왕조 및 ‘스파라도코스’ 등 동계 인명과 상관성을 보인다.[39][40]
  • 반란군 성원 중에는 사회전쟁을 겪은 참전 경험자들이 일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1]
  •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현전 사료는 동시대 기록이 아니며, 노예 또는 목격자의 서술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신중한 재구성이 요구된다.[42]
  • 베수비오 산 포위 돌파 시 포도덩굴을 꼬아 만든 밧줄로 절벽을 하강, 로마 진영 배후를 기습했다는 서술은 플루타르코스와 프론티누스가 공히 전한다.[43]
  • 스파르타쿠스의 목적이 공화정 노예제를 체계적으로 폐지하는 데 있었다는 1차 사료는 없으며, 해방의 실제 초점은 검투사·농민·목자층에 맞춰졌다는 해석이 주류다.[44]
  • 종결 국면에서 폼페이우스가 잔당 격파 공으로 정치적 명성을 더했고, 크라수스는 개선식 대신 오바티오를 받았다는 점이 고대 사가에 반복된다.[45]
  • 근대 조각가 드니 포야티에(Denis Foyatier)의 대리석 작품 Spartacus(1830)는 루브르에 소장되어 스파르타쿠스의 근대적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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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이야기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1951)

  • 미국의 작가 하워드 패스트는 1951년 자비로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출간한다. 하워드는 매카시즘이 횡행할 때 미 의원의 반미조사활동위원회에 명단 제출을 거부하여 3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였는데, 이 때 이 소설을 구상하였다. 하지만 혁명가의 생애를 다룬 이야기인 하워드의 소설을 내겠다는 출판사가 없어 직접 자비출판하게 된다. 소설은 스파르타쿠스의 항쟁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로마 귀족과 장군들의 기억과 회상을 기준으로 전개된다. 미국에서는 1991년, 페이퍼백으로 재출간되었는데 작가의 서문 《스파르타쿠스와 블랙리스트》가 새로 추가되었다. 한국에서는 2008년 출판사 미래인에서 김태우 번역으로 출판되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피와 모래》(2009)

  • 미국 Starz 채널에서 2009~2010년 시즌에 방송된 13부작 미니시리즈이다. 트라키아인 스파르타쿠스가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글래디에이터로 명성을 떨치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당시 로마 귀족들의 사치와 부패,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 방영시 TV-MA 등급을 받았을만큼 잔인한 장면과 선정적인 장면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며 연인과의 사랑, 같은 검투사 간의 우정과 배신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한국 케이블 TV 방송에 방영되었다. 2012년 상반기에 시즌 2가 방영되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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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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