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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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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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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은 제2공화국 당시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1960년 11월 15일에 등록되었으며[1] 1961년 2월 20일에 결당대회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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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과정

민주당의 신구파는 이미 제1공화국 내내 갈등을 빚고 있었다.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때부터 활동해온 구파와 자유당이나 무소속 출신으로 민주당 창당 때 반독재 기치 아래 합류한 신파는 당권 경쟁, 대선 후보 선출, 개헌 문제 등 중요한 문제마다 치열한 대립을 보였다. 그런 가운데 치러진 7·29 총선거에서는 공천 문제를 두고 내홍이 심해져, 상당수 지역구에서 결국 공천을 받지 못한 후보가 독자 출마해 결국 두 파벌의 후보가 둘 다 출마할 정도였다. 이 즈음 구파는 분당론을 처음 제기하기 시작했다.[2]

총선 후 분열은 가속화되어 8월 4일, 구파는 유진산 의원을 통해 성명을 내고 분당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성명에서 구파는 분당의 이유로 일당 독재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 건전한 야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민주당 지도부 및 국회의원 당선자 비율에서 신파에게 수적으로 밀린 구파가, 당내에서 신파와 경쟁해봐야 승산이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졌다. 신파는 대통령은 구파, 총리는 신파로 하자는 안배론을 밀고 있었는데, 대통령과 총리 모두 구파에서 차지해야 한다는 구파의 주장은 신파가 수가 더 많은 상무위원회나 의원총회에서 논의할 경우 꼼짝없이 신파 주장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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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민의원 및 초대 참의원 당선자 대회

요약
관점

신구파는 국회의원 당선자 대회도 따로 열었는데, 각 계파는 기차역에서 기다리다가 초선 의원들을 마중나가 사실상 납치하듯 데려오기까지 하며 머리수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 8월 6일 종로 대명관에서 열린 신파 측 당선자 대회엔 민의원의원 당선자 75명, 참의원의원 당선자 10명 등 85명이 참석했으며, 같은 날 시청 앞 아서원에서 열린 구파 측 당선자 대회엔 민의원의원 당선자 83명, 참의원의원 당선자 12명 등 95명이 참석했다.[4] 구파는 또한 백남억, 박준규, 권중돈, 김광준, 강승구, 최해용, 전석봉 등 7명은 미리 불참 통고를 보냈다고 밝혔다. 신파는 한근조, 류성권, 김재곤, 장면, 곽상훈, 이상면, 김동욱, 박순천, 조일재, 서정귀, 태완선, 김광준, 전석봉, 황인원, 류진, 김채용, 최해용, 이민우 등 15명이 미리 불참 통고를 했다고 밝혔으나, 이 중엔 사실 구파 대회에 참석 중인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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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

23인위원회

구파는 분당 운동 초 20인위원회가 이끌다가, 8월 6일 당선자 대회를 기점으로 23인위원회 체제로 개편했다. 23인위는 국회의장단, 대통령, 총리 등의 선거에서 구파의 후보 결정 및 선거 전략에 대한 권한을 당선자 대회로부터 위임 받았으며, 분당 및 신당 창당의 준비를 이끌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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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위원회

신파는 13인위원회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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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내각

23인위원회는 윤보선계와 김도연계가 치열하게 대결한 끝에 윤보선을 대통령, 김도연을 총리로 하기로 합의했다. 13인위원회는 곽상훈을 대통령, 장면을 총리로 하는 안, 아예 제3의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는 안 등 여러 가지 안을 고민한 끝에 파벌 균형 원칙에 따라 윤보선을 대통령, 장면을 총리로 지지하기로 했다. 이에 23인위원회 내에서는 신파의 책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김도연을 대통령, 윤보선을 총리로 찍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결국 원래대로 가기로 했다. 이후 양파의 지지를 받은 윤보선은 무난히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윤보선 대통령이 총리로 김도연을 지명하자 다시금 두 파벌이 치열하게 대결하게 되었다. 그 결과 김도연 총리 인준안은 간발의 차로 부결됐고, 윤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장면을 지명한다. 장면의 인준안이 통과되어, 장면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장면 총리는 내각에 적어도 구파 의원 5명을 입각시킬 것을 약속하는 등, 구파를 품으려는 행보를 보였으나, 신파 내부의 반발로 정헌주 의원 딱 1명만 입각시키며 다시 계파 갈등이 악화됐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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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창당

구파는 8월 31일 구파동지회를 원내 교섭단체로 등록시켰고, 9월 22일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23일엔 신파가 단독으로 민주당으로 교섭단체를 등록해, 사실상 민주당은 분당됐다. 11월 8일, 구파는 발기준비대회를 열고 당명을 신민당으로 확정지었으며, 11월 15일에 국무원 사무처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1960년 지방선거에 참여한 신민당은 이듬해인 1961년 2월 20일 결당 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당 창당을 선포했다. 신민당은 창당과 함께 국회의원 79명을 보유한 제1야당이 되었다.[2] 신민당은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존속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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