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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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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誕生, 영어: nativity of Jesus) 혹은 성탄(聖誕)은[1] 신약성경루가의 복음서마태오의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이다. 두 복음서 모두 예수가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 마리아다윗 왕의 후손인 요셉과 약혼 중이었으나 요셉은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고, 예수의 탄생은 신적 개입으로 이루어졌음을 언급하고 있다.

성탄은 기독교의 절기인 크리스마스의 기초가 되며, 기독교 전례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기독교인은 전통적으로 집 안팎에 구유 장면을 묘사한 작은 성탄 장식을 전시하거나, 크리스마스 트리 등을 장식한다. 이는 유럽 대륙 여러 나라에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수 탄생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주제로 4세기 이래로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13세기 이후 성탄 장면을 묘사할 때에는 초기의 군주 이미지에서 벗어나 더 온화하고 겸손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이는 같은 시기의 기독교 목회 활동에서의 접근 방식 변화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롯한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 두 복음서의 성탄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2][3] 두 복음서가 상충하는 내용과 조화되지 않는 계보를 제시하며, 당시 세속 역사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탄생 및 유년기 이야기에 일부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4][5][6] 복음서가 주로 신학적 목적을 가진 문서로 쓰였다는 점에서 역사성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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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기록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마르코의 복음서요한의 복음서에는 기록되어있지 않다.[7] 두 복음서는 예수가 헤롯 왕 시대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가 마리아이고, 남편 요셉이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족보의 세부 사항에서는 의견이 다르고, 요셉이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님을 부정하며 탄생, 정확히는 잉태가 신적 개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8]

이 외에는 두 복음서 간의 공통점이 거의 없다.[8]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요셉이 중심인물로 묘사되며,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마리아가 중심에 있다.[9]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요셉이 이미 베들레헴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처럼 기술하며,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나사렛에 살다가 베들레헴으로 이동했다고 기록한다.[8]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는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고,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에게 나타난다.[9]

또한, 특정 사건들은 각 복음서에만 등장한다. 루가의 복음서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포함해, 퀴리니우스의 호구 조사, 목자들의 경배, 예수 탄생 8일 후 성전에 봉헌된 이야기가 있다. 반면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동방 박사, 베들레헴의 별, 헤롯의 음모, 유아 학살, 이집트로의 피난 이야기가 포함된다.[9] 두 복음서의 여정도 매우 다르다. 마태오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가족은 베들레헴에서 시작해 출생 후 이집트로 피신하고, 이후 나사렛에 정착한다. 반면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나사렛에서 출발해 베들레헴으로 가서 출생 후 곧바로 나사렛으로 돌아간다.[10][주해 1]

이 두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조화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시각이나, 성서비평학을 수용한 현대에서는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조화될 수 없으며, 동일한 자료(Q 자료)에 기반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를 각각 "마태복음 특수 자료(M 자료)"와 "누가복음 특수 자료(L 자료)"로 분류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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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요약
관점

예수 탄생의 신학적 의미는 초기 교부들부터 20세기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교리의 핵심 요소로 여겨져 왔다.[11][12][13] 이러한 신학적 문제는 사도 바울로 시기부터 논의되었으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논쟁이 이어졌다. 이는 결국 기독교 내에서 그리스도론마리아론의 차이를 야기하였으며, 5세기경 교회의 초기 분열로 이어졌다.

예수의 탄생은 말씀의 육화로서 테오시스 교리로 연결된다. 성 아타나시오스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14]라고 말했다.[15]

새 사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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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밤.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1490년 경

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15-16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창조의 모델로 묘사한다.[16][17][18][19]

사도 바울로는 예수의 탄생을 우주적 중요성을 가진 사건으로 간주하며, 이를 통해 첫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피해를 되돌리는 "새 사람"이 탄생했다고 보았다.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성육신로고스로 묘사하며 그의 탄생이 보편적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 것처럼, 바울 신학은 예수의 탄생을 통해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강조한다. 바울의 종말론적 관점에서 예수는 도덕과 순종의 새 인간으로 자리 잡으며, 불순종으로 타락한 아담과 대조된다. 아담과 달리, 예수 안에서 태어난 새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도덕과 구원의 세계를 가져온다.[20]

바울로의 관점에서는 아담이 첫 인간으로서 자신을 불순종으로 타락시키며 인류를 저주로 오염시킨 반면, 예수의 탄생은 아담의 타락을 상쇄하며 구원을 가져오고 손상을 회복하는 사건으로 이해된다.[21]

교부 신학에서 바울로가 제시한 예수와 아담의 대비는 예수 탄생의 독특성과 그의 삶의 사건을 논의하는 틀을 제공했다. 예수의 성탄은 우주적 기독론의 출발점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탄생, 삶, 부활이 보편적 의미를 갖는다는 관점이 형성되었다.[20][22][23]

예수를 "새 인간"으로 보는 개념은 그의 성탄에서 시작해 부활로 이어지는 탄생과 재탄생의 순환 속에서 반복된다. 예수는 탄생 이후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며 도덕적 삶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조화를 시작했다. 예수의 성탄과 부활은 새로운 인류의 창조자이자 본보기가 되었다.[24]

2세기 교부 이레네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가 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셨을 때,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며, 간결하고도 포괄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어버렸던 것,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존재했던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25][26]

이레네오는 "둘째 아담과 둘째 이브"라는 비유를 사용한 초기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리아를 "둘째 이브"로 제안하며, 이브가 묶어놓은 죄의 매듭을 풀었다고 설명했다. 이브가 아담을 유혹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었다면, 마리아는 수태고지에서부터 갈보리까지 순종의 길을 열어 예수(둘째 아담)가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아담의 타락으로 생긴 손상을 예수가 회복했다고 보았다.[27]

4세기에는 예수의 성탄과 성육신의 신비가 신학과 찬미가의 중심 요소로 부각되었다. 시리아의 에프렘은 예수 탄생의 독특성을 창조주의 위엄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보았다. 그는 전능한 하나님이 작은 아기로 세상에 오실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했다. 에프렘에게 성탄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경이로운 상호작용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28]

중세에는 예수의 탄생이 "둘째 아담"으로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한 죄악(Felix culpa)" 개념과 연결되며,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관한 대중적 교훈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29]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이 세상의 출생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성탄을 공경하라"[30]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성탄에 대한 발언을 자주 인용하였다. 여기에 더해 "아담 안에서 모두 죽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생명을 얻을 것이다"[30][31]라는 발언 역시 여러 차례 인용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개념은 종교개혁 시기에도 지속되었으며, 장 칼뱅은 속죄의 여섯 가지 방식을 논의할 때 둘째 아담을 그 중 하나로 언급했다.[32] 칼뱅은 예수의 순종을 강조하며 그가 인간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주장했다.

20세기에 이르러, 칼 바르트는 같은 논리를 확장하여 예수의 성탄을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간주했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예수는 아담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로 행동하며, 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구원을 가져올 수 있었다.[11]

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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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1471년 사본)에서 예수의 탄생에 대한 여러 신학적 논쟁을 다루었다.

예수의 탄생은 초기 기독교부터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기독론적 문제에 영향을 미쳤다. 루가의 복음서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지상적 존재와 천상적 존재라는 이중적 본성을 중심으로 한 변증법에 초점을 맞춘 반면, 마태오의 복음서의 기독론은 예수의 구원 사명과 구세주로서의 역할에 집중한다.[33][34]

예수의 신성을 믿는 것은 "예수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인간인가, 아니면 여인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초기 기독교 4세기 동안 예수의 탄생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신념이 제시되었고, 일부는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예컨대, 마리아에게 붙여진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나님을 낳은 자)"라는 칭호는 마리아론이 기독론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 중 일부는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다른 관점들은 분열을 일으켜 새로운 교파 형성으로 이어졌다.[35][36][37][38]

마태오의 복음서 1장 21절에서 강조된 구원론적 메시지는 이후 예수의 여러 이름들의 신학적 문제 및 예수 숭배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39][40][41] 한편, 마태오의 복음서 1장 23절은 임마누엘 기독론의 유일한 논거를 제공한다. 여기에서 마태오는 예수를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임마누엘)"으로 식별하는 데 분명한 관심을 보이며, 이후 그의 복음서 전체에서 임마누엘로서의 예수의 성격을 발전시켰다.[42]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구절과 연결되며, 예수가 마지막 날까지 신자들과 함께할 것임을 나타낸다.[42][43] 울리히 루츠(Ulrich Luz)는 임마누엘 모티프가 마태복음 1장 23절과 28장 20절 사이에서 복음서를 괄호로 묶고 있으며, 다른 구절에서도 명시적 또는 암시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44]

4세기와 5세기 동안, 예수의 본성과 탄생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는 '위격적 연합(hypostasis)', '단성론(Monophysitism)', '합성론(Miaphysitism)', '분리론(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45][46] 특히 칼케돈 공의회(451년)는 기독론 논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칼케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지닌 분임을 선언하는 '위격적 연합' 교리를 확립했다. 이는 정통 기독교 신앙의 신조에 포함되었으며, 5세기 동로마 제국 내 교회의 분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47][48][49][50]

5세기 교부 중 하나인 교황 레오 1세는 성탄을 자신의 신학에서 핵심 요소로 사용했다. 레오는 성탄에 관한 10개의 설교를 남겼으며, 이 중 7개가 현재까지 전해진다. 특히, 451년 12월 25일에 행한 설교는 성탄 축일의 중요성을 높이는 동시에, 칼케돈 공의회에서 확립된 위격적 연합 교리를 강조하려는 그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51] 레오는 성탄 설교를 통해 반대 관점을 공격했으나, 구체적으로 상대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성탄 축일을 이용하여 예수의 탄생과 본성에 관한 논쟁에서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계를 명확히 하는 도구로 삼았다. 이러한 설교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정통 기독론을 옹호하고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35]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탄의 기독론적 귀속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성탄이 '말씀(로고스)'이라는 위격에 귀속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위격이 취한 인간 본성에만 귀속되어야 하는가를 탐구했다. 아퀴나스는 자신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성탄을 8개의 개별 질문으로 다루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다루었다.[52]

  • "성탄은 본성(nature)을 고려한 것인가, 아니면 위격(person)을 고려한 것인가?"
  • "그리스도에게 시간적 탄생이 귀속되어야 하는가?"
  • "복되신 동정녀가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불려야 하는가?"
  • "복되신 동정녀가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려야 하는가?"
  • "그리스도에게 두 가지의 자녀됨(filiation)이 있는가?"

아퀴나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위격과 탄생이 이루어진 본성을 구분했다.[53]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을 통해 두 본성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에게 받은 신적 본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 속에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간적 본성이다. 이 접근법은 또한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마리아의 칭호 문제를 해결했다. 아퀴나스의 논리에 따르면,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다. 이는 예수의 인간적 탄생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본성을 통해서이지만, 그의 위격은 여전히 신적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다.[53]

종교개혁 시기, 장 칼뱅은 예수의 성육신이 단순히 동정녀 탄생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탄생 순간에 성령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칼뱅에 따르면, 예수는 태어난 순간에 거룩하게 되어 원죄에서 면제되었으며, 그의 탄생은 흠이 없는 상태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담의 타락 이전 세대의 흠 없는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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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요약
관점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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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는 전통적으로 많은 교회에서 대림 환 중앙의 양초에 불을 밝힌다.

기독교 교회들은 예수 탄생 축일을 크리스마스(성탄절)로 기념한다. 서방 기독교 교회는 이를 12월 25일에 기념하며, 많은 동방 기독교 교회는 20세기와 21세기 기준 1월 7일에 "우리 주님의 성탄 축일"로 기념한다.[55] 이 차이는 성탄절 날짜에 대한 불일치라기보다는, 그레고리력율리우스력 중 어느 달력을 기준으로 12월 25일을 정할 것인가에 대한 선호 차이에서 비롯된다.

567년 투르 공의회에서는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하며 성탄절과 주현절(Epiphany) 사이의 12일을 하나의 통합된 축제 주기로 선언했다.[56][57][58][59][60] 이 시기 동방 지역에서는 여전히 음력을 사용하는 관습으로 인해 날짜 차이가 발생했다. 성탄절 전례 기간인 대림절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위한 시기로, 대림절 동안 기독교인들은 여러 전통과 관습을 따른다.[61] 대림절의 주요 관습은 다음과 같다:

  • 대림 묵상: 매일 묵상을 통해 대림절을 기념함.
  • 대림 환: 대림절 동안 촛불을 차례로 밝히는 상징적 장식.[62]
  • 캐럴 부르기: 크리스마스 찬송가를 부르는 활동.[63]
  • 선물 교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선물을 주고받음.[64]
  • 성탄극 관람: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연극으로 감상.[65]
  • 교회 예배 참석: 성탄절 예배에 참여.[66]
  • 특별 음식: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같은 전통 음식을 준비하고 나눔.[67]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대림절 첫날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하며,[68][69] 교회에서는 녹색 장식을 통해 성탄 전례를 준비한다.[70]

예수 탄생 축일과 초기 기독교 전례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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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바움키르헨에 묘사된 성탄 장면

1세기와 2세기 기독교에서는 주일일요일이 가장 초기의 기독교 축일로 자리 잡았으며, 이 날에는 다양한 신학적 주제가 포함되었다. 2세기에 들어서, 예수의 부활부활절로서 별도의 축제로 분리되었고,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절이 1월 6일에 기념되기 시작했다.[71] 주현절에 동방 박사의 방문을 기념하는 축제는 이집트에서 1월 5일 나일강 축복 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다.[72]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 즉 크리스마스는 4세기에 서방 교회, 특히 로마와 북아프리카에서 축하되기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탄절이 구체적으로 처음 어디서,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73]

예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처음 기록한 사람은 로마의 히폴리투스였다. 그는 3세기 초에 이 날짜를 기록했으며, 이는 예수의 잉태가 춘분인 3월 25일에 이루어졌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계산으로, 9개월 후가 12월 25일이라고 보았다.[74] 4세기 중반까지, 동방 교회는 예수의 탄생과 세례를 동일한 날인 1월 6일에 기념했으며, 서방 교회는 12월 25일에 성탄 축제를 지켰다. 이 날짜는 동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 후반에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달력에 두 축제가 모두 포함되었다.[75] 1월 6일에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축제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은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이후 361년까지 그러한 축제에 대한 언급은 없다. 361년, 율리아누스가 1월 6일에 열린 축제에 참석한 기록이 남아 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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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의 루터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념하는 모습

354년에 로마에서 제작된 필사본 『354년 연대기(Chronography of 354)』에 성탄 축일이 언급된다. 이후 386년 12월 25일, 안티오키아에서 행한 설교에서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는 성탄 축일이 약 10년 동안 존재해 왔다고 언급하며, 이 축일이 이미 정착된 전통임을 보여준다.[75] 385년경까지 예수 탄생 축일은 세례 축일과 분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지역인 니사(Nyssa), 그리고 아마시아(Amaseia)에서 12월 25일에 기념되었다. 386년,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성탄 축일을 성 스테파노 순교 축일(12월 26일)과 연관 지어 설교했다. 390년에는 이 축일이 이코니움(현재의 콘야)에서도 기념되었다.[75]

5세기에 들어, 교황 레오 1세는 "성육신의 신비(Mystery of Incarnation)"라는 이름으로 성탄 축일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이후 교황 식스토 3세는 이 축일 바로 전에 자정 미사를 도입하여 성탄 전례의 중심 요소로 자리 잡게 했다.[76] 6세기에는 성탄 축일이 예루살렘에서도 기념되었으며,[77]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탄절을 공식적인 공휴일로 선언했다.[78]

14~15세기에는 장 제르송(Jean Gerson)과 같은 인물들이 설교에서 아기 예수의 사랑스러운 본성과 인류 구원의 우주적 계획을 강조하며 성탄의 신학적 중요성을 부각했다. 이러한 설교들은 성탄을 단순한 기념일 이상의 신학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79]

20세기 초까지 성탄절은 기독교의 "문화적 상징"이자 서구 문화의 중요한 축일로 자리 잡았다. 이는 공식적으로 국교가 없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나라들에서 21세기에 들어 연말 축제 기간 동안 비기독교인들의 감수성을 더 많이 고려하기 시작하며, 성탄절을 포용적이고 문화적인 행사로 확장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80]

예수의 이미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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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가정집 내부의 성탄절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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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 밀라노에서 제작된 종이 위에 그려진 성탄 장면, 온화한 예수 이미지를 표현한 작품.

초기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에 700번 이상 등장한 단어인 "주님(Kyrios)"으로 예수를 간주하는 것이 가장 주요했다.[81]"퀴리오스(Kyrios)"는 구약성경의 '전능자 하나님'의 속성을 예수에게 부여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로 서신 이전부터 사용되었으나, 이를 확장하고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은 사도 바울로이다.[81]

바울로의 글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주된 이미지를 "퀴리오스"로 확립시켰는데, 이는 단순히 종말론적 승리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 신적 형상"으로서 예수를 묘사한 결과이다. 이 이미지는 수세기 동안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 예수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82] 또한 이 칭호는 예수와 신자들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는 그들의 주님이자 주인이었으며, 신자들은 전심으로 그를 섬기고, 그들의 삶을 심판하실 분으로 간주되었다.[83] 이는 또한 예수가 창조물 전체를 다스리는 권능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했다.[84][85] 바울로는 이를 바탕으로 예수의 주권 및 왕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예수의 순종이 그 주권의 기초한 것이며, 성탄을 넘어서 선재(先在, pre-existence) 시기에도 존재했다고 보았다.[86] 시간이 지나면서 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등의 영향을 받아 퀴리오스 예수상은 보다 부드러운 예수상으로 보완되기 시작했고, 프란치스코회의 대중 경건에 대한 접근 방식은 이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85]

13세기는 이러한 이미지에 '온유한 예수'라는 새로운 관점이 추가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프란치스코회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에서 그의 겸손과 가난을 강조했다. 아기 예수를 구유를 통해 처음 묘사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예수의 변모에서 나타난 강력하고 빛나는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며, 예수가 자신의 탄생을 위해 겸손한 길을 선택했음을 강조했다.[87]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신자들이 비극을 견디도록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란치스코회는 예수 탄생의 가난과 겸손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모습이 처벌하거나 엄격한 신이 아닌, 겸손하게 태어나고 십자가에서 희생된 예수라는 점을 부각시켜 위로하였다.[88] 전능한 창조주가 모든 권능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기 위해 태어나셨다는 개념은 신자들에게 매우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수가 무력하게 구유에 놓인 모습은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의 희생만큼이나 경이롭고 감동적으로 인식된 것이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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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탄의 장면을 그린 작품

  • '벤허' - 첫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려져 있다. 그 후 극중에 몇 번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지만, 얼굴은 그려지지 않고, 모두 뒷모습이다.

태어난 장소·계보

고등 비평이나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학에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기술은, 예언에 적합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전설, 신화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는 갈릴래아나자렛의 출신이라고 기록되고 있어 '마르코 복음서' '마태오 복음서' '루카 복음서'의 어느 것에도, 예수가 다윗 왕의 자손인 것은 부정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입장에서, 예수는 탄생 이야기 이외의 장면으로는 일관해서 '나자렛인' '나자렛 출신자'의 술어가 이용되고 있어 이는 모든 복음서에 대해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실제로 태어난 장소는 베들레헴은 아니었던 것의 증거로 여겨지는 일이 있다[90][91].

그 한편, 전통적인 신앙을 보관 유지하는 정교회, 가톨릭교회, 보수적인 성서 신앙의 입장 등에 있는 신교도 등, 성서의 기술을 진실로 파악하는 입장도 있다[92][93][94][95][96]. 전술의 고등 비평의 입장에서는 '마태오 복음서'는 다윗 왕의 자손인 것은 부정하고 있다지만, 전통적인 신앙을 보관 유지하는 입장에서는, 우선 마태오 복음서의 모두 (1장 1절)에 있는 '다윗의 아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한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불가리아의 페오피라크트 등의 고대·중세의 성인들도, 구약에서의 예언 (이사야서 11장 외)과의 정합성을 가지고 이를 강조해 왔다. 또한 '아이'라는 표현은 신약 성서에서 '양자' '자손'의 의미에도 이용되고 있어 반드시 문자 그대로의 혈연·촌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성서 중에서 예수는 통상의 부부 관계에 의하지 않고, 성령에 의해 봐 가졌다고 여겨지고 있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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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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