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욧츠노구치
일본 에도 막부가 관리했던 4개의 교역창을 가리키는 일본 역사용어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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욧츠노구치(일본어: 四つの口)는 근세 일본(에도 시대) 시기 일본이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 열어둔 4개의 창구를 가리키는 일본 역사학계의 용어로, 구체적으로는 중국 및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맡은 "나가사키구"(長崎口), 조선과의 통신을 담당한 대마도를 부르는 "대마구"(対馬口), 류큐 왕국과의 교역을 담당한 조슈번을 부르는 "조슈구"(薩摩口), 그리고 에조치와의 교역을 담당한 "마츠야마구"(松前口)를 가리킨다.[1][2]

1960년대 일본 역사학계는 근세 일본의 대외 정책을 외국과의 교역을 차단했다는 사코쿠를 정설로 받아들였지만, 이 시기 이후의 일본 역사학계의 연구는 에도 막부가 대외 정책을 실질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을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3][4] 이를 상징하는 '욧츠노구치'라는 표현은 1981년 아라노 야스노리가 처음으로 사용했고, 2010년대부터는 일본 고등학교에서도 공식 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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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코쿠 이전
요약
관점
16세기 중후반
1547년 명나라와 일본이 마지막으로 감합무역을 한 뒤 양국의 교역은 중단되었지만 양국 민간인들의 교역은 감합무역이 중단된 이후에도 활발히 이루어졌다.[6] 동시에 일본 해안의 다이묘들은 유럽 각국이 교역 거점으로 삼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한편 중국의 비밀 교역집단과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해 동중국해 일대에 상업 거점을 마련했는데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왜구적상황'(倭寇的状況)이라고 불렀다.[6][2][7]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지방 다이묘들이 독립적으로 해외무역을 진행하는 한편, 포르투갈과 같은 유럽 국가들과도 교역을 시작했다.[8] 하지만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일본은 조선과 명나라와 관계가 험악해지고 교역도 중단되고 말았다.[9][10][1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책 변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 통일에 한 발 다가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적극적으로 대외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의 핵심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회복에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명나라와의 관계 회복이 최우선 과제였다.[8][6][12] 중국산 견섬유의 수입루트를 확보해 여러 다이묘에게 견섬유를 공급하고 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막부 내부의 사정도 있었지만,[8] 대외적으로 일본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임을 표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13]
이런 목적으로 1600년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붙잡힌 명나라 장수 모국과를 본국으로 환송했다.[14][9] 뒤이어 대마도번을 통해 명과 정식으로 관계를 회복하고자 조선과도 관계를 회복했고, 이에 대한 답례로 조선에서는 1607년 조선통신사를 파견했다.[a] 또한 사쓰마번 당주는 1609년 명과 조공무역을 행하는 류큐 왕국을 침공해 류큐 왕국을 속국으로 삼는데 성공하고 명과의 교역을 위한 창구를 마련했다. 그러나 1615년에 명나라 측이 일본과의 통교를 명확히 거부하면서, 류큐와 조선 양쪽을 통한 대외 정책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8][15][9][1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조선 및 류큐 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8][17]
네덜란드 및 아이누와의 무역

1581년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공화국은 아시아 무역에 적극 뛰어들고 있었다. 1600년 리프데호가 표류한 것을 에도 막부에서 도와준 이후 네덜란드와 에도 막부의 관계가 발전했으며, 1609년 에도 막부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교역을 승인했다.[18][b]
또한 가키사키씨는 도요토미 정권 때부터 이어져오던 아이누와의 교역을 꾸준히 이어나갔고, 1604년 아이누 무역에 대한 독점을 인정받았다. 학계에 따르면 에도 막부는 이것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8][14] 중세 때부터 아이누는 사할린섬에 거주하며 에조니시키를 중국 대륙의 상품과 교역했으며 마쓰마에번도 아이누와의 교역을 통해 다양한 아이누 물품을 수입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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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코쿠와 욧츠노구치 수립
요약
관점
명과의 무역 복원에 실패한 막부는 각지에 흩어진 무역 거점을 히라도와 나가사키에 집중하는 방침으로 대외 무역 방식을 전환했다.[15] 이와 더불어 도쿠가와 정권의 통치 체계가 안정된 이에야스 통치 말기에는 쇼군이 그리스도교를 탄압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21] 1630년대부터 단계적으로 막부는 해금정책인 <쇄국령>(鎖国令, 사코쿠)을 반포했다. 1631년부터 호쇼센 제도가 시작되었고, 1635년에는 일본인의 해외 항해가 금지되었으며, 1639년에는 포르투갈 배의 내항이 금지되었고 1641년에는 히라도에 네덜란드 상관을 설치했다. 외국 선박의 출입국은 막부가 통제하는 체제가 확립되었다.[21][15][14] 에도 막부가 이런 방침을 정한 이유는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조선, 류큐, 그리고 네덜란드를 통해 중국 대륙이나 동남아시아로의 무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21][22][23]
마쓰마에 지역에서는 해금 체제가 성립되면서, 와진지(중세 이후 일본인이 정착해 있던 오시마 반도 남부 일대)가 설정되고, 에조지와의 왕래가 제한되게 되었다.[24][25][c] 이는 마쓰마에번이 다이묘가 속한 영지였지만 영지를 옮기기 위해 그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막부에서 막고자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5]
대마도번, 사쓰마번, 마쓰마에번은 다른 번들과 마찬가지로 막부에 군역을 납부해야 하는 임무를 지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조선, 류큐, 아이누와의 제한적인 교역이었다. 그러나 이 세 번은 모두 농업 생산력이 다른 번에 비해 떨어졌고, 군역이 시작된 근대적 봉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 기반으로서 무역이 이루어져야 했다.[21] 막부는 이를 '지행동연'이라 하여 해당 세 번의 무역을 제한적으로 인정했다.[d]
일련의 방식으로 쇼군의 권위를 유지하는 다양한 방책을 실현하면서도 여러 외교 정책을 유지한 1630년대 해금정책은 교역이나 외교를 가업으로 삼아오던 삼번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해외 국가들과 교역을 담당하던 나가사키를 합쳐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욧츠노구치'(四つの口)라 부르고 있다. 욧츠노구치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대외교역은 1650년대 완전히 사회 체계로 자리잡게 되었고,[21][27][28] 이 무역창구를 중심으로 일본 정부는 중국 대륙이나 기타 지역과 무역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15]
대군외교
1615년 일본의 대명 무역 재개에 실패했다는 것은 도쿠가와가 명 황실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같은 해 7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금중병공가제법도의 제14조에 의거해 천황과 쇼군을 국왕으로 정하고 새로운 일본 국왕을 창조했다.[29] 이로 인해 1635년 대마도번 영주가 벌인 야나가와 잇켄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과의 관계를 쇄신했다. '조선 국왕과 일본 천황은 직접 국서를 주고받을 수 없다'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라 '국왕'이라는 쇼군의 대외적 호칭을 피하고 '일본국 대군'이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정립했다.[30][31] 류큐 왕국의 국왕에게는 '중산왕'이라는 호칭을 금지하고 '류큐국사'라는 호칭을 내렸다. 이러한 에도 막부의 외교를 '대군외교'라고 부른다.[30] 대군외교에서 쇼군에 대한 대외 호칭은 바뀌었지만, 종래의 욧츠노구치의 역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31]
사코쿠 수립기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유지되던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통신사가 총 12회 일본을 방문했다.[32][31][21] 이 시기 이후 대마도주는 '조선국지어수장'(朝鮮国之御手長)을 자인하였고 막부의 동의 하에 조선과의 외교를 맡았다.[33] 대마도주는 또한 독립적으로 조선과의 무역을 재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막부의 묵인 아래 조선과 조공 성격의 외교를 행했다.[32][31][21] 대마도에서는 '관백'의 뜻을 전달하는 사절과 대마도의 사절을 임시로 조선에 파견했다. 이에 조선은 1636년부터 협의할 사항이 있거나 경조사에 처했을 때 통역사를 대마도에 파견했다. 1609년 조선과 일본이 공식적으로 교역을 재개하기로 합의한 기유약조가 체결된 이래, 대마도번에 조선의 무역선이 매년 20척씩 도착했지만, 1637년 막부는 겸재의 제를 통해 조선으로부터 오는 무역선을 연 8척으로 줄였다. 1636년 부산포에 왜관이 설치된 후 왜관은 상시 400명에서 500명 정도의 번사나 일본 상인이 거주하는 조선과 일본의 교역 창구 역할을 했다.[32] 비공식적으로도 왜관 내 번사가 조선 양반과 교류하는 일이 빈번했다.[34] 대마도주는 막부와 조선 조정 양쪽으로부터 특권을 받으며 양국의 완충 지대 역할을 했고, 1871년 폐번치현이 있을 때까지 이러한 교역 행위는 이어졌다.[35] 대마도에서는 주로 은이 수출품이었고 조선으로부터 인삼, 중국산 견섬유나 견제품을 수입했다.[36]

1609년 류큐를 공략한 이후 게이초 검지 등 다양한 정책을 통해 사쓰마번은 류큐를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류큐를 중국과의 무역 핵심 지역으로 본 막부는 류큐를 온존하게 하고자 사쓰마번의 동화 정책을 거부했다.[21][35][e] 막부는 1634년 류큐를 '막부 체제하 이국'이라고 이름 붙인 뒤 중국과의 상매를 명령했다.[37] 1634년부터 1850년까지 류큐는 일본 막부 조정에 총 18회의 축하사절단이나 은사단을 파견했다.[31][32] 여기에 더해 류큐가 사쓰마번에 파견하는 연두사는 정례화되었다.[32] 또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된 사쓰마번은 류큐의 진공무역을 통해 생사(生絲) 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f]1631년부터 나하에는 류큐재번행사가 파견되어 류큐와 명의 교역을 감독했다. 1667년에는 가고시마성에 류큐 가리야(훗날 류큐관)가 설치되었고, 류큐에서 재번(在番) 오야카타가 파견되어 외교와 무역 업무를 맡았다.[32][23] 류큐는 일본과 중국을 잇는 이중 교역 창구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류큐 당국은 이를 중국과 일본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했고, 단순한 왕부나 국왕이 아닌 외교적 주체로서 정치 운영을 이어갔다.[37] 류큐는 은을 수출했고, 막부는 류큐로부터 설탕이나 중국산 견제품을 수입했다.[36]

네덜란드 및 중국 배로 나가사키는 붐볐다. 중국 배는 1635년부터 나가사키에 많이 입항했고, 네덜란드 상관은 1641년 이후 데지마로 옮겨졌다.[38] 중국 배에는 난징, 닝보, 푸저우 등 중국 해안 도시들에서 온 구선(중월선)과 통킹, 찐 주,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에서 오는 월선이 있었다.[39] 1630년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지역의 패권은 네덜란드의 바타비아에 본부를 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차지하였다.[40]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외교를 따르지 않고 민간무역으로 확대되었으며, 나가사키 봉행이 이를 감독했다.[21] 이에 따라 나가사키 시중 경제는 무역에 종사해서 얻은 분담금에 의존하는 구조였다.[26] 나가사키에 들어오는 중국 배의 주요 수출품은 은이었고, 수입품에는 동남아시아를 통해 들어온 중국제 견사나 견제품이었다. 네덜란드 선박과의 교역도 이런 구조였으나,[36] 네덜란드의 경우 다양한 서양 학문에 관한 서적이나 과학기술과 관련된 것들도 다수 유입되었다. 나가사키 봉행의 대외 업무는 나가사키구의 업무뿐만 아니라 세 번이 맡지 않은 임무 전반을 총괄했다. 예를 들면 거류민의 송환은 나가사키 봉행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했다.[21] 또한 다수의 번 주민들이 연루되었던 조선과의 밀무역 사건처럼, 나가사키 봉행이 외국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결정할 수 있었다.[33]
아이누와의 무역 독점이 허용된 마쓰마에번은 오시마반도 남부에서 화인지를 거점삼아 교역을 이어나갔다.[21][25] 화인지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이 지역을 봉토로 인식하고 있었고, 마쓰마에번은 타지에서 거주하는 아이누를 복속시켜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21][35] 마쓰마에성 아래에서 아이누와 교역을 이어가는 성하교역체제가 이미 존재했지만 에조치에 마련된 교역지에서 무역하는 체제가 자리잡았다.[24] 이것은 봉토가 없던 가신들에게 이룰 대신하여 금광·매 사냥 구역·상업지가 주어졌기 때문이다.[25] 마쓰마에번의 수출품에는 쌀과 솜 등 일용품이 있었고, 마쓰마에번은 모피, 금, 매의 깃 등을 수입했으며 산단교역을 통해 에조니시키나 청옥을 수입하기도 했다.[41][36][42][24]
명청 교체
1644년 중국 대륙 내 명청 교체는 일본 국내 상황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야시 가호는 삼번의 난이 진행 중이던 1674년 중국 배로부터 정보를 수집해 <화이변태>라는 서적을 출판했다. 1678년 청나라에서 귀국한 류큐 진공사를 사쓰마번의 당주가 불러 보고를 받은 당지수미어사자(唐之首尾御使者)가 제도화되었고, 대마도번도 왜관에서 수집한 정보를 모아 막부에 보고했다. 이미 1654년부터 류큐는 청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있었는데,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청나라부터 은폐한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셈이었다.[39][43]
청나라의 동향은 무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청 조정은 정성공의 활동을 막기 위해 천계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나가사키의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다. 정성공을 1684년 타도한 청나라 조정은 대외정책을 바꾸어 전해령을 반포하였고, 이 시기부터 중국 배가 다시 나가사키에 많이 입국하게 되었다. 금과 은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문제로 인식한 막부는 1685년 정고무역법을 발표해 연간 해외 무역액을 국가별로 선정하여 중국 배에는 은 6,000관, 네덜란드 배에는 금 50,000량으로 무역액을 제한했다. 1686년에는 조선과의 무역을 은 1,080관으로 한정했고, 1687년에는 류큐에서 청으로 넘어가는 중국 은을 은 804관으로 한정했다. 1688년에는 청나라에서 나가사키로 입항하는 중국 배의 수를 연간 70척으로 한정했다.[39][44][45][46]
마쓰마에번에서는 아이누와의 교역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아이누 이외에 교역 상대를 선택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1665년부터 마쓰마에번은 아이누에게 일방적으로 불합리한 교역을 강요할 수 밖에 없었다.[21][47] 이것이 원인이 되어 1669년 홋카이도 일대에서 샤쿠사이의 난이 발생했고, 이 난에 대응해 막부에서는 마쓰마에번 당주를 나무랐다.[21][48] 이러한 막부의 처리 방식에 대해 마쓰마에번은 북방과의 교역에 너무 많은 압력을 받고 있다고 설명하며,[21] 이 지역 이외와는 마쓰마에번이 교역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48]
18세기
17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대외관계는 절정을 맞이했으나, 18세기부터 무역량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일본의 대외 관계는 침체했다. 가장 큰 요인은 일본 내에서 구리 산출량이 감소했고, 일본 국내 시장에서의 화폐 수요가 증가했으며 그리고 생사·인삼·설탕 등 욧츠노구치를 통해 들여오던 수입품이 일본 국내에서 국산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대외 관계에서 여러 모순과 동요가 나타났지만, 막부는 욧츠노구치가 지닌 역할을 재확인한 뒤 이를 유지했다.[26]
무역에 쓰일 구리가 부족해진 것 해결하기 위해 막부는 1715년에 나가사키 창구에서의 무역에 대해 ‘정덕신례’를 공포하고, 무역량을 다시 중국 배 30척에 무역액 6000관, 네덜란드 배 2척에 무역액 3000관으로 제한하였다.[39][49] 또한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세 차례에 걸쳐 ‘동좌’를 설치하여 구리 확보를 도모했으나,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6]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19세기 중엽까지 나가사키 창구의 무역액은 계속 하락했고, 무역 침체로 인한 분배금 감소는 이에 의존하던 나가사키 시민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그 결과 막부는 분담금 할증률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할증율은 일본 내 물가가 오르는 것으로 이어졌다.[26] 한편, 구리를 대신한 나가사키의 주요 수출품은 해삼·상어지느러미 등 해산물이었다.[50]
또한 막부는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1706년부터 간헐적으로 은화를 재주조하여 은 함량을 줄여나갔다.[51] 쓰시마의 생사(生絲) 수입은 17세기 말에 정점을 찍어 나가사키를 능가했지만, 수출품이 국내 통용 은화였기 때문에 은화 개주의 영향을 받아 무역 이익이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26][43] 게다가 생사와 인삼의 국산화가 진전되면서 18세기 전반에 무역량이 감소했고, 18세기 중반에는 무역이 끊기거나 이익이 전혀 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쓰시마번은 막부에 여러 차례 보조금을 요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무역·외교 자금 부족이 이유였으나, 1746년부터는 ‘무역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하사금이 지급되기 시작했, 그 액수도 점차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요구를 막부에 제기할 때 쓰시마번은 ‘조선을 견제하는 임무’를 강조하며, 그 임무를 나가사키·사쓰마·마쓰마에 창구의 역할과 비교해 제시했다.[26] 쓰시마번에 대한 반복적 지원에 대해 18세기 후반에는 막부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나 조선과 일본 간 관계를 담당하는 업무를 막부 직할로 두는 방안까지 논의되었다. 그러나 결국 막부는 보조금을 유지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임무를 쓰시마 번에서 다른 곳으로 바꾸지는 않았다.[26]
사쓰마도 은화 재주조의 영향을 받았다.[51] 류큐는 은화의 품질이 저하된 것으로 어려움을 겪어, 1739년에 무역용 은화(왕고은)를 다시 주조해달라고 사쓰마번에 요청했고, 막부도 이를 허락했다. 나가사키·쓰시마 창구에서의 은 유출은 18세기 말까지 거의 사라졌지만, 류큐 창구에서는 동전과 해산물에 더해 무역용 은화의 수출을 막부가 허용했다. 막부가 이를 허용한 것은 류큐와 청의 책봉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51][52][53]
마쓰마에 창구에서는 샤쿠샤인의 난의 종결로 아이누가 마쓰마에번에 더욱 종속되었다. 그러나 복잡해진 경제 구조에 마쓰마에번이 대응하지 못하게 되면서 18세기 전반부터 번사가 상인에게 교역을 맡기는 ‘장소 청부제’가 전개되었다.[54][24] 상인들은 에조치에서 어업 개발을 진행하며 아이누를 고용하거나 이들에게 부역 업무를 맡겼다. 이로 인해 아이누는 교역 상대에서 일본인 상인에게 종속된 어업 노동자가 되었고, 일본인들에 경제적으로 종속되고 착취받았다.[55][56][26] 산단무역은 내국화되지 않고 아이누를 거친 형태로 계속 이루어졌으나, 거래품 대부분은 청부 상인에게 넘겨지게 되어, 마쓰마에 창구의 교역 주체는 마쓰마에번에서 혼슈 상인들로 바뀌어 갔다.[57][58] 또한 에조치에서 새로운 밭을 개척하거나 광산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에도, 막부는 에조치를 마쓰마에번의 ‘영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도호쿠나 화인지 등에서 에조치로 들어오는 출가 노동자들도 원칙적으로 정착이 허용되지 않아 에조치는 막말까지 토지 기능 측면과 그 거주민의 지위 측면에서 모두 '이국'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26]
외교 면에서 막부는 18세기부터 류큐에 대해 관심을 거의 가지지 않았으며 1704년과 1709년에는 류큐 사절의 에도 참부를 허가하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안정된 류큐–청 관계에 대한 막부의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6] 이러한 방침에 대해 사쓰마번은 류큐 사절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1710년 에도 참부를 실현시켰다. 이때의 류큐 사절단은 청국풍의 복장을 하고 정사·부사라 칭했다. 이 참부는 동아시아에서 막부의 위신을 높였고, 그 공으로 시마즈씨는 관위 승진을 얻었다. 또한 이때 막부는 류큐를 ‘번’의 위치에 두었으나, 이에 반발한 류큐는 이후 중국과의 책봉·조공 관계를 강조하며 독자성을 유지해 나갔다. 1712년에는 막부가 류큐에 중산왕 복호(復号)를 허가하였다.[39] 1710년에는 아라이 하쿠세키가 ‘대군(大君)’ 호칭을 ‘국왕’ 호칭으로 바꾸는 것을 건의해 시행되었다. 1711년 조선통신사에 대해 에도 막부는 번주 후계자에 대한 빈례(聘礼) 중단과 노연(路宴)·향응의 간소화 등을 통해 전반적으로 통신사 접대를 크게 축소했다. 이러한 방침은 조선을 일본과 대등한 관계로 위치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39] 18세기 막부의 대외 정책은, 동아시아에서 쇼군의 위상을 높여 국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한편, 국내에서는 쇼군을 유일한 국왕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17년에는 다시 ‘대군(大君)’ 호칭으로 환원되었다.[39]
사코쿠 개념과 개국
17세기 후반 이후부터 막부 내에서는 '새로운 이상한 나라와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정착되었고, 실제로 대외무역은 욧츠노구치에 한정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막부가 대외 정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인식된 것은 18세기 말부터 막말까지였다.[59] 1792년 아담 락스만이 러시아 제국의 사절로 내항했을 때,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국법에 의거해 개국과 통상 요구를 거부했다. 사다노부의 발언을 통해 이 시점부터 막부가 욧츠노구치를 단순한 무역 항구가 아닌 '사코쿠' 정책의 일환으로 생각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59]
러시아 제국의 사절단 파견 이후 곤도 주조는 막부에 보내는 보고서의 초안에 '우리 나라가 이국(외국)과 통상을 할 수 있는 곳은 나가사키·사쓰마·쓰시마·마쓰마에 네 곳으로 한정한다.'라고 적었다. 이는 명확히 욧츠노구치가 사코쿠의 일부로 여겨진 예시라고 할 수 있다. 1801년 스즈키 다다오가 앵겔베르트 캠퍼의 <쇄국론>을 번역했을 때, 종래 일본 정부가 근세 내내 유지해오던 정책이 '쇄국'으로 개념화되고 욧츠노구치와 함께 '역세의 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59] 뒤이어 제1차 아편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럽 열강의 개국 압력이 더욱 심해졌다. 1844년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로부터 일본의 개항을 권고하는 서신이 도착하자 막부는 네덜란드와 교역을 중지하는 방침을 내리고 서신에 답변을 거부했다.[39]
그러나 막부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사쓰마번을 통해 류큐에서 들여온 소식에 따르면 청나라에서는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고, 이는 막부의 해안 방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로부터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페리가 일본으로 내항할 예정이었다.[60] 막부는 이에 대마도번과 마쓰마에번에도 해외 소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60][61]
막부는 해외 정보 수집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이를 충분히 활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고, 결국 이는 쇄국에 맞선 외부의 압력에 막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62][60] 류큐 왕국에는 1844년 프랑스 선교사 테오도르아우구스틴 포케드가 류큐 왕국에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통상하자는 제안을 보냈다. 이 시기 류큐 왕국은 독립적으로 통상 조약을 체결할 수 없었고, 통상을 맺는 권한이 있었던 막부는 프랑스 선교사의 제안에 자극을 받았다. 막부는 이전처럼 유럽 및 미국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류큐 무역을 통해 열강과 무역을 시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59] 동시에 1854년 미국 정부와 일본 에도 막부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요코하마항이 조약항으로 개항되면서 욧츠노구치만이 해외 교역 창구가 된 체계가 붕괴되었다.[62] 욧츠노구치 체제의 붕괴 이후, 조약항 형성은 각 번의 양이파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막부 타도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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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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