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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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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형(禹夏亨)은,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간략 정보 자, 출생일 ...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곤양군수(昆陽郡守)로써 공을 세웠으며, 난을 진압할 당시의 진중의 상황을 《무신토적일기》(戊申討賊日記)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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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숙종 36년(1710년)에 25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고[1] 이듬해(1711년)에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713년)에 부인 이씨가 세상을 떠나, 그 상을 마치고 6품에 올라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 판관(判官), 첨정(僉正) 및 황해도 우후(黃海道虞候)를 역임하였다.

경종 1년(1721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한 뒤에는 상을 마치고도 한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 3년(1727년)에 장연현감(長連縣監)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얼마 뒤 곤양군수가 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영조 4년(1728년) 봄에 이인좌의 난(무신난)이 일어났다. 이인좌와 함께 난을 일으킨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 등이 영남에서 세를 떨쳐서 열흘 만에 다섯 고을이 함락되었다. 이웅보와 정희량의 군세는 함양(咸陽)에서 거창(居昌)으로 돌아와 군사를 둘로 나누어 각각 우지령(牛旨嶺, 우지치) 아래와 생초역(省草驛)에 진을 치고서 지례(知禮)와 무주(茂朱)로 나아갈 기세였는데, 선산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이 금오진(金烏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지령의 험한 곳을 먼저 점거하고, 무주 고갯길에도 전라도의 군사가 점거하여 틀어막아 양측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4]

우하형이 반란 소식을 듣게 된 것은 3월 20일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이시번(李時藩)이 곤양에 서간을 보내어 우하형을 불렀을 때의 일로 서간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서 이인좌의 반란군이 청주를 함락시켰음을 알았다고 한다.[5] 그는 닭울녘에 이시번을 만나 묻고 사실을 확인하고, 조금 있다가 금산(金山)과 안음(安陰)에서도 변란을 알리는 보장이 뒤따라 도착하여 변란이 사실임을 확인하였다.[5]

저물녘에 곤양으로 돌아온 우하형은 군병을 불러 모아 놓고 지휘(指揮)가 있기를 기다렸다. 23일 병영(兵營)에서 군대를 모으라는 전령(傳令)이 도착했고 26일 군진(軍陣)으로 달려가라는 전령이 또 도착했으나 우병사의 명령은 오지 않았다.[5] 이는 이시번은 두려워하면서 지금 온 전령이 정말 서울에서 온 어명인지 아니면 반란문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며 머뭇거렸기 때문이라고 전한다.[2][5]

묘갈명에는 우하형은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진양(진주성)에 있던 경상우병사 이시번을 찾아가 급히 병사를 동원하여 토벌할 계책을 진달하였으나 이시번은 아직 어명인지 확실하지 않다며 머뭇거렸고 이에 우하형은 "적이 준동하는데 천리 바깥의 조정의 지휘가 하달되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며 곤양 관아로 돌아와 군사를 조발(調發)한 다음 무장하고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올린 뒤, 다시 진주성(晋州城)으로 왔다고 하였다.[2] 곤양 군사를 이끌고 진주로 온 우하형은 진주성 바깥의 대나무 숲 한가운데 진을 쳤다.[2]

《영조실록》에는 성문을 열기를 거부하는 문지기를 칼로 위협해서 성내로 들어갔다고도 하고[4] 묘갈명에도 진양성을 향해 두어 차례 화포를 쏘았으나 진양성은 여전히 성문을 굳게 닫아건 채로 응하지 않자 우하형이 성문 앞으로 다가가 문지기에게 "우리는 관군(官軍)이다. 나라를 위해 난을 구하러 달려왔는데, 너희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 내 마땅히 문을 쳐부수고 나면 가장 먼저 너희 머리부터 베겠다"며 크게 꾸짖자, 문지기가 비로소 두려워하면서 문을 열고 우하형의 군을 성내로 맞아들였다고 하는데[2] 우하형 자신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 우하형이 곤양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서 신호 삼아 대포(大砲)를 쏘아 알렸고, 성안에서 아무 응답이 없어서 한번 더 쏘았고 그때서야 성안에서도 대포를 쏘아 응답하였으며[5] 이에 우하형 자신이 몸소 성문으로 다가가 치진장(馳進狀)을 입송(入送)했으나 성문을 지키는 장교(將校)가 즉시 입송하기를 허락하지 않아서 "이런 때를 당하여 군병을 거느리고 군진(軍陣)으로 달려온 군대를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분노하였고 잠시 뒤에 이시번의 군관이 영기(令旗)를 가지고 와서 군병은 성밖에 그대로 있고 곤양군수(우하행)와 그 배행하는 통인(通引)만 들어오라고 명하였다.[5]

이시번의 말대로 통인만 데리고 성으로 들어가 이시번을 만난 우하형은 진주성 안에 곤양 병사들을 주둔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시번은 영장(營將)과 상의한 뒤에 허락하였다.[주 1] 《영조실록》에는 이시번이 성품이 나약하여 자신은 끝내 나가지 않고 대신 휘하의 영장(營將) 이석복(李碩復)을 시켜 우하형 등을 거느리고 먼저 가게 하였다[4]고 하는데, 우하형이 영조에게 아뢴 말에는 '나성(羅姓)의 역적' 즉 반군은 진주목사(晋州牧使) 신후삼(愼後三)의 처당(妻黨)의 족친(族親)들로 모두 진주와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있어, 경상우병사 이시번이 출동하여 그 빈틈을 타고 진주로 들어와 성을 점령하게 되는 사태를 두려워해서 이시번이 즉시 병영(兵營)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고, 우하형과 영장 이석복(李碩復)이 일곱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거창으로 가고 이시번 자신은 김해에서 병력이 오기를 기다려서 삼가로 출격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5]

우하형은 중군(中軍)을 맡아 진군하여 단성(丹城)의 백마산(白馬山) 아래에서 밤에 희생을 잡아서 제를 올리고 난 뒤, 수풀 속에 잠입해 있던 자객을 찾아내어 참수하였다. 다음 날 안음(安陰)에 이르러 반군측의 정찰병 두 명을 붙잡아 회유해서 심복으로 삼고는, 격문을 지어서 반군 진영의 장졸들에게 은밀히 전하게 하였다. 그뒤 상장(上將)인 영장(營將) 이석복(李碩復)에게 자신이 선봉에 서겠다고 자청하였다.[2] 이석복은 산음(山陰)에 이르러서 그곳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머무르려 하였는데, 이때 우하형이 칼을 내리치면서 성을 내자 이석복은 머뭇거리며 그에게 선봉이 되겠느냐고 물었고, 우하형은 자신이 선봉이 되겠다고 자처하고 이석복과 군사를 나누어 나아갔다.[4] 이때 천총(千摠)인 남해현감(南海縣監) 윤하(尹㵑)와 기복(起復)한 전임 현감(縣監) 하필도(河必圖) 등이 우하형을 따랐고, 이석복은 하동부사(河東府使) 박도상(朴道常)과 함께 잇따라 나아갔으나, 경상우병사 이시번은 삼가현까지 가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4]

이웅보와 정희량의 반군 진영이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우하형은 이틀 갈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하면서[2][4] 70리 길을 이동하고, 샛길을 통해 우회하여 적이 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는데, 길이 매우 험하여 깎아지른 듯한 벼랑 가운데에 길 하나가 좁게 나 있던 상황이라 장좌(將佐)가 길이 험해서 가기 힘들고 자칫 이석복의 군과 연결이 끊어질까 염려된다며 진군을 말렸으나 우하형은 듣지 않고 말채찍을 휘두르며 전진하였고, 정희량이 진을 치고 있던 생초역에 도착하였다.[2]

우하형이 생초역에 오기 전에 이미 선산부사 박필건이 거창 경계의 우지치(牛旨峙)에서 이웅보의 반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독용진절제사(禿用鎭節制使) 이보혁(李普赫)과 정양빈(鄭暘賓)도 합천에서 반군을 격파하고 거창으로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웅보는 달아나 생초역에 있던 정희량에게 합류하였다. 정희량의 진영과 우하형의 진영은 서로 5리(10리라고도 하였다) 정도 거리였다.[6]

반군과 대치하게 된 상황에서 우하형은 장교 한 명을 시켜서 다시금 반군을 회유하게 하였다..[2] 반군 진영에서는 반군의 도지휘(都指揮)[6] 나숭곤(羅崇坤)이 나와 도전하였는데 우하형은 곧장 자신이 나서서 돌진했고, 이를 본 군사들도 모두 따라서 진군하여 반군은 후퇴하였다.[2] 조금 뒤에 반군 진영 안에서 앞서 안음에서 우하형이 회유한 반군 정찰병을 통해 전하게 했던 격문이 장대에 걸려 올라왔고, 반군은 이웅보, 정희량, 나숭곤, 이세규(李世奎) 등을 포박하여 우하형에게 바쳤다.[2] 《영조실록》에는 이때 이웅보, 정희량 등을 포박한 반군의 장교는 정빈주(鄭彬周), 여해달(呂海達), 염마당(廉馬堂) 등이고, 이웅보ㆍ정희량과 나숭곤, 이세규 등 반군의 수괴 21인을 결박하여 장차 군진(軍陣) 앞으로 보내려던 길에 마침 우하형의 군과 맞닥뜨렸으며, 우하형이 먼저 정희량ㆍ나숭곤 두 역적을 베었고 이석복이 뒤이어 이르러서 이웅보 등 여러 역적을 모두 베었다고 하였다.[6]

우하형 앞에서 이웅보, 정희량 등이 자신의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말을 하여 분노한 우하형이 그 자리에서 이들을 처형하였다는 것은 실록과 묘갈명이 모두 일치하는 내용으로[6][2] 실록에는 이때 거창 좌수로 반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술원(李述源)의 아들 이지인(李至仁)이 우하형의 군에 종군하고 있었고 자신이 직접 이들의 목을 베겠다고 청하여 우하형이 허락하였다고 나온다.[6] 우하형은 그들의 목을 베겠다고 나선 사람이 그저 군관인 줄로만 알았지 그가 반군에게 죽임을 당한 자의 아들인 줄도 몰랐다고 하는데[7] 우하형은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로 있던 영조 5년(1729년) 영조에게 불려가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때의 일에 대해 처음에 정희량 등이 잡혀 왔을 때, 그들이 무도한 말을 하는 것에 분노하여 공초도 쓰지 않고 곧바로 도훈도(都訓導)를 불러서 참수하게 하려 했으나 군병들이 모두 기피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칼을 빼들고 처형하려던 차에 한 사람이 군중들 사이에서 크게 부르짖으면서 "소인(小人)이 베겠습니다."하고 나서서 즉시 두 역적의 머리를 베고는 그들의 간을 꺼내어 먹었고,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의 신원을 묻고 나서야 그가 바로 거창의 좌수 이술원의 아들 이우방이며 아버지의 복수를 한 것임을 알았다고 하였다.[5]

공적으로 논하자면 우하형의 공적은 수공(首功, 1등 공로자)인 선산부사 박필건 다음 가는 공적이었지만, 윗선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반군의 수괴를 즉결처분, 그것도 개인의 사사로운 원한을 갚는 데에 내어줘 버린 것에 대해 경상감사 황선(黃璿)이 장계로 알려 부당하다고 비판하였고[6] 최종적으로 우하형은 큰 포상은 받지 못했다. 6월 10일에는 곤양에서 정희량의 잔당들이 뿌린 것으로 여겨지는 '흉서'(凶書)가 발견되어 이를 경상우병사 이여적(李汝迪)을 통해 조정에 보고하였고, 영조는 좌우 포청(左右捕廳)과 영백(嶺伯, 경상관찰사)과 좌우 병사(兵使, 병마절도사)에게 2품 관직을 내걸고 유포자를 잡게 하였는데[8] 나흘 뒤인 14일에 영조는 이러한 흉서를 우하형이 발견해서 굳이 자신의 선에서 없애 버리지 않고 보고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그를 비난하며 잡아 들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동의금(同義禁) 송인명(宋寅明)이나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 모두 조용히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다.[9] 여름에 우하형은 자급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오르고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하동부사(河東府使)에 제수되었다.

우하형의 하동부사 임명은 따로 조사(朝辭) 즉 서울까지 올라와서 자신의 관직 임명을 국왕에게 사은한 뒤에 부임지로 향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곤양에서 바로 하동으로 부임하게 하였는데, 보통 이런 식으로 지방관에서 다른 지방관으로 전임하는 경우 조사 절차가 면제되어 바로 부임하도록 이조에서 초기하지만 우하형은 하동부사로 임명되기 전에 그에 대한 내금위장(內禁衛將) 임명이 있었고, 영남 어사 이종성이 우하형의 조사하는 절차를 면제하고 곧장 하동으로 부임하게 조처해 줄 것을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비변사에서는 이를 가지고 이조(吏曹)에 청하였고, 당시 이조판서를 맡고 있던 윤순(尹淳)이 6월 26일에 영조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는 순서로 이루어졌다.[10]

영조 5년(1729년) 경주영장(慶州營將)으로서 자급이 올라 전라우수사에 제수되었다가 우의정 이집(李㙫)이 "영남과 호남 사이에 간혹 영세한 도둑들이 숨어 있다"며 우하형이 영남의 물정(物情)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신명윤(申命尹)과 자리를 바꿀 것을 건의하였고 영조가 이를 윤허하여 경상좌수사가 되었다.[11] 묘갈명에는 영남 지역에 아직도 옛 반군의 잔당이 숨어 있다는 대신의 상소에 의해 경상좌수사로 옮겨진 것이라고 하였다.[2] 이때 영조는 그를 특별히 불러다 정중하게 유시하고, 활과 검, 그리고 붉은 칠을 한 화살을 하사하였다고 한다.[2]

영조 6년(1730년)에 회령부사(會寧府使)으로 옮겨 제수되었고[2] 9월 10일 운두산성을 쌓는 일의 적임자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물망에 올랐다.[12]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자급이 올랐다가 모종의 일로 파직되어 돌아갔다.[2] 이후12월 초2일 계복 입시 때 영조가 탑전에서 "회령부사(會寧府使) 우하형(禹夏亨)을 다시 임명하고, 그 대신은 구전(口傳)으로 임명하여 며칠 안으로 재촉해 출발시키라."[13]고 하였다는 기사에서 얼마 안 되어 회령부사로 복직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 7년(1731년)에 함양(咸陽)에 제수되고, 얼마 뒤에 이산부사(理山府使, 묘갈명에는 초산부사라 하였다)로 옮겨 제수되었다.[2]

영조 9년(1733년) 이산부(理山府)의 잠상(潛商)으로 금법(禁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서 타국으로 건너간 장세찬(張世贊) 등을 효시(梟示)하고, 파수(把守)한 장졸(將卒)들을 엄중하게 곤장(棍杖)을 치도록 하였으며, 부사(府使) 우하형(禹夏亨)은 죄인을 잡은 공으로 속죄(贖罪)했다 하여 다만 추고(推考)만을 명하였다.[14] 7월에는 청나라 사람이 강을 넘어와 국경을 범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각각 자리를 베풀어 말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종중추고를 받았고[15] 10월에는 강 건너 청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채취하여 혼자 가는 사람을 붙잡아 가지고 범월(犯越)하였다 위협하고 공갈한 것을 우하형은 사단(事端)이 생길까 봐 보문(報聞)하지 않은 채 쌀 열 말을 사사로이 속바치고 돌아 왔던 것이 알려져 나문(拿問)을 받았다.[16] 또한 우하형은 이산부사로 있으면서 망명적(亡命賊) 황진기(黃鎭紀)가 호지(胡地)에 도망친 흔적이 있다며 기함(機檻)을 두어 규포(窺捕)할 것을 자청하였고 조정에서 허락하였으나 결국 성과는 없었다고 한다.[17]

영조 9년(1733년)에 자급이 올라 황해병사에 제수되었는데[18] "변방 지역의 수령을 자주 바꿔서는 안 된다"는 대신의 지적에 따라 영조는 그대로 이산부사로 머물러 있게 하였고[2] 1년을 더 머무르다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초산 백성들이 바위에 글을 새겨 사모하는 마음을 담았다.[2] 우하형이 이산을 떠나게 된 것은 위원군수(渭原郡守) 자리가 결원이 생겨 우하형을 특차하여 위원군수 부임을 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우하형은 병을 핑계로 석 달을 부임하지 않았는데,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이 우하형을 위하여 누차 영조에게 그의 체개(遞改)를 청했고, 영조는 마지못해 허락하였다고 한다.[17] 회령부사로도 제수되었으나 마찬가지로 부임하지 않았다.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다.[2]

경상좌병사로 있던 영조 15년(1739년)에는 "음흉하고 사나우며 형벌을 남용한다"라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파직에는 이르지 않았는데[19] 조정에서 각 도에서는 봄에 조련하는 것을 멈추고 다만 영장(營將)을 시켜 순점(巡點)만 하라고 명하였던 것을 동래부사(東萊府使) 정형복(鄭亨復)이 '농사에 방해된다'는 핑계로 어기고 행하지 않았고 이를 조정에 아뢰어 경책(警責)하기를 청하였다가 군율에 관계된 일을 느슨하게 처리하였다는 이유로 경상좌병사에서 파직되었다.[20] 신유년(1741년)에 부임지에서 사망한 남덕하(南德夏)의 후임으로써 다시 회령부사에 제수되었다.[2][21] 영조 18년(1742년) 관북병마절도사(북병사)가 되었으나[22] 그 해에 파해졌다. 《경성군읍지》에는 "임술 7월에 회령부사로써 왔고, 그 해에 전임의 일로 감진어사(監賑御使)가 올린 계에 따라 파직되었다"(壬戌七月, 會寧府使來, 同年, 以前任事, 因監賑御使啓, 罷)[21]라고 하였다. 묘갈명은 그저 "어떤 사람의 무고로 인해 파직되어 돌아갔다."[2]라고만 하였다.

이때부터 우하형은 향리에 은거하며 유유자적 소요하면서 지난날 자신의 공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이에 사람들은 이따금 그를 평오장군(平吳將軍)에 견주었다고 한다.[2]

영조 19년(1743년)에 강화도의 축성 문제로 특별히 강화중군(江華中軍)에 제수되었는데, 일이 1년 만에 일이 완료되었고,[2] 축성을 마쳤을 때 축성에 들어간 쇠붙이며 나무ㆍ기계 등을 남김없이 여러 척의 배에 실어 자신의 집에 가져갔다 하여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고 하며[23] 21년(1745년) 많은 사람 가운데서 승선(承宣)을 욕하고 의금부 당상관을 나무랐다는 탄핵을 받았으며[24] 다시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았다.[2] 영조실록에는 그가 사간 조경(趙擎)으로부터 북읍과 강도(강화도)에 있었을 때의 추문으로 탄핵을 당했고 제주목에 부임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는 혹평을 들었다고 한다.[23]

우하형은 영조 24년(1748년) 시점에서 병을 앓고 있었다. 노철(盧𣻂)의 일기에는 2월 20일에 노철이 우하형의 병문안을 갔으나 그를 만나지 못하고 대신 그의 아들로 당시 평양중군(平壤中軍)을 맡고 있던 갑산 수령 우 영감만 나와서 맞이하였다고 한다.[25]

영조 25년(1749년) 9월 8일에 병으로 침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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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채제공이 쓴 묘갈명에는 그가 사망하고 두 달 뒤인 11월에 평산(平山) 금암면(金巖面)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한다.[2]

가계

  • 증조할아버지: 우숭문(禹崇文)[2] - 추증 사복시정(司僕寺正)
  • 할아버지: 우극명(禹克明)[2] - 추증 좌승지
  • 아버지: 우순필(禹舜弼)[2] - 추증 병조판서
  •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2] - 임영대군파 이응철(李應哲)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우하형은 한산 이씨(韓山李氏) 진사 이운한(李雲漢)의 딸과 혼인하여 홍규, 홍상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2] 한산 이씨는 남편보다 16년 앞서 1734년에 향년 55세로 사망하였고, 장단에 묻혔다가 훗날 남편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다.[2] 우하형의 비첩에 대해서는 서형수(徐瀅修)가 쓴 《우온전》을 통해 알려져 있다(우하형#일화 참조).

홍규(弘圭)는 절도사를 지냈고 홍상(弘祥)은 진사였다. 우홍규는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지 못하고 족제인 진사 우세환(世煥)의 아들 상모(尙謨)를 양자로 들여 가계를 이었고, 우홍상도 서자인 상경(尙敬)이 있었으나 따로 족제 세준(世儁)의 아들 상금(尙錦)을 양자로 들여서 가계를 이었다.[2] 우홍규의 딸은 진사 황기경(黃基敬)에게 출가하였다. 우하형의 정실 소생의 딸은 류한복(柳漢復)에게 출가하였다.[2]

서자(庶子)로 상진(尙鎭)이 있다.[2]

일화

요약
관점
  • 우하형이 약관의 나이에 무관이 되기로 결심하고 막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무장으로 이름이 있던 이삼(李森)을 찾아가 문후를 여쭈자, 이삼은 우하형을 시험해 보고자 마구간에 있는 말을 가리키면서 "이는 달종(㺚種) 가운데서도 씩씩하고 건장한 놈이며 성격 또한 사나운지라, 사람들이 그 말굽에 쇠 박는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네가 그것을 능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고, 우하형은 그 자리에서 이삼이 가리킨 그 말을 마당으로 끌어내 드러눕히고 말의 네 다리를 마치 작은 발바리 대하듯 묶어 버렸다. 그때 때마침 소낙비가 내리자 또 다시 손으로 집어 들어 처마 아래에 두었다. 이삼이 크게 놀라고 감탄하면서 "장하다. 훗날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장수를 시킬 만하도다."라고 하였다.[2] 이후 영조가 훈련대장으로 있던 이삼에게 "경 이후에 경을 대신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이삼은 "한 명 있기는 합니다만 조정에서 저의 직임을 결코 그에게 맡기지 않을 듯합니다."라고 운을 떼면서 우하형이라고 대답했고, 영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2]
  • 영남관찰사의 병영에 있을 때, 관찰사로 있던 유척기(兪拓基)가 우하형과 이야기를 해 보고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국가에 환난이 있을 때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라고 호평하였다고 한다.[2]
  • 조선 정조 때의 인물로 우하형의 묘갈명을 지었던 채제공은 묘갈명의 서두에서 아홉 살 때에 남문 문루에서 벌어졌던, 이인좌의 난(1728년)의 수괴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의 수급을 조정에 바치는 수괵례(受馘禮)를 먼발치에서 보았던 기억을 술회하였다. 그때 먼발치에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개선가를 부르는 도순무사(都巡撫使)와 그 군사들의 모습을 보며 내심 "적을 참수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참으로 장군감이다"라고 생각했고, 70여 년이 지나 우하형의 손자 우상모의 의뢰로(채제공은 우상모의 양부인 우홍규와 알고 지냈다) 우하형의 묘갈명을 쓰면서 아홉 살 때에 자신이 품었던 궁금증을 해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감을 묘갈명의 서두에 토로하였다.[2]
  • 묘갈명에는 고을을 차례로 다스리면서는 단 한 번도 자손들을 위하여 사적 재산을 확립해 둔 적이 없었는데 혹 그 일에 대해 누군가 말을 꺼내면 번번이 "내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어찌 사후의 일을 도모하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채제공은 그를 '참된 장군'이며 '참된 충신'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바로 공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까지 추켜세웠다.[2]

서형수의 《우온전》: 우하형의 첩실 합정에 대하여

조선 후기 서형수가 쓴 《우온전》(禹媼傳)은 우하형의 비첩이었다 전하는 합정(合貞)이라는 여인에 대해 쓴 것으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우온 즉 합정은 원래 평안도 의주(義州)의 천민 출신으로 의주 관아에 소속된 주탕비(酒湯婢)였다. 우하형이 막 무과에 급제하여 의주부윤에게 불려갔을 때 처음 만났고, 우하형의 옆에서 그의 수발을 들었다.

의주에 함부로 국경을 넘나든 죄로 참형을 당할 죄수 아홉 명이 있었는데, 의주부윤이 우하형에게 형장(刑場)을 감독하게 하였고 우하형은 그들이 살려고 국경을 넘나들다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결박을 풀어주어 달아나게 한 다음 부윤에게는 그들이 도망쳐 버렸다고 아뢰었는데, 이를 들은 합정은 미리 우하형의 짐을 싸두었고, 과연 우하형이 뇌물을 받고 죄수들을 멋대로 풀어주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우하형은 부윤에게 고하지 않고 합정이 미리 싸둔 짐을 들고 곧장 의주를 떠났다.

의주를 떠나는 우하형에게 합정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고 우하형은 자신은 가난해서 밑천도 없고 상경해 봐야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며 고향 평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는데, 합정은 우하형의 관상은 못 되어도 변방을 다스릴 인재라며 자신이 모아둔 은자 6백 냥을 자루에 담아 우하형에게 내어 주고, 동쪽으로 가서 화려한 옷을 입고 날랜 말을 타고 서울에서 지내며 인맥을 쌓으라고 당부한 다음 우하형을 떠나 보내고, 자신은 의주의 늙은 홀아비 장교에게 시집 가서 그의 집 재산을 일일이 기록하고 보관하면서 그의 집 재물을 불렸다. 그리고 남편에게 조보(朝報)의 정목(政目)을 보고 싶다고 부탁했고 남편은 이를 허락하였다. 합정은 매일 그 조보를 들여다 보면서 우하형의 이름이 없는지를 살폈다.

합정이 내어준 은자를 가지고 동쪽으로 간 우하형은 이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에서 누차 승진하여 7년 만에 관서(關西)의 초산군수(楚山郡守)로 나가게 되었다.[주 2] 그때서야 합정은 남편에게 우하형과 약속했던 일을 자세히 알려 주고 "내가 7년 동안 당신을 속인 것은 미안하지만 7년 동안 당신의 재산을 두 배, 많게는 열 배 내지 백 배로 불려 놓았으니 당신의 처로써 부끄럽지는 않다. 이제 이 재산을 모두 당신에게 돌려 드릴 테니 앞으로 당신이 직접 이 재산들을 가지고 살림을 꾸려 달라"며 그 장교를 떠나갔다.

합정은 남장하고 일꾼을 고용해 초산으로 갔다. 합정이 도착한 것은 우하형이 그곳에 부임한지 겨우 이틀째 되는 때였다. 관아에 소송하는 백성처럼 꾸며 관아의 뜰에 들어간 합정은 몰래 아뢸 것이 있다며 주위 사람들을 물리게 한 뒤, 우하형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우하형은 기뻐하며 합정을 반겼다. 우하형은 이미 자신의 아내가 죽어서 며느리가 살림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합정을 만난 우하형은 그에게 부인의 옷을 입히고 살림을 맡기며 며느리에게도 합정의 말을 따르게 하였다. 이후 합정은 우하형의 안주인이나 다름없는 자리에서 공경히 집안의 제사를 받들고 온순히 적자들과 친척들을 섬겼으며 은혜롭게 비복(婢僕)들을 부렸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입이 닳도록 칭송하였다.

우하형은 관서 여러 고을의 수령을 맡고 절도사(節度使)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일흔에 가까운 나이로 집에서 임종하였는데, 합정은 슬퍼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고, 우하형의 삼년상이 다 끝날 무렵에 우하형의 적자에게 "선공께서는 시골의 무부(武夫)로 아장(亞將)까지 지냈고 일흔 가까이 사셨으니, 공에게도 아쉬울 것이 없고 자손들도 아쉬울 게 없다. 나로 말한다면 선공께서 불우했던 시절 선공을 뵈어 벼슬에 오르도록 도왔고, 말이 끝내 우연히 들어맞아서 의탁하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이미 만족스럽다. 죽지 않고 무얼 기다리랴." 하고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곡기를 끊고 죽었다.

우하형의 종인(宗人)들은 모두 "이 사람이 아니었던들 절도사가 어찌 오늘 같은 영화를 누렸겠는가. 이 사람에 대해 특별히 보답하지 않으면 예에 비추어볼 때 뭐라고 하겠는가."라며 평산(平山) 동쪽 10리 마당리(馬堂里)에 쓴 우하형의 묘에서 10여 보 오른쪽에 합정을 장사지냈고, 서형수가 우온전을 집필했던 시절까지도 합정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3]

채제공의 묘갈명에도 우하형의 측실이 우하형이 죽자 얼마 안 있다 스스로 목숨을 버려 그 뒤를 따랐으며, 사람들이 모두 "평상시 공이 보인 의열(義烈)에 감화받지 않았다면 천인(賤人)으로서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는[2] 언급이 있어 무언가 서형수의 전기 속의 주인공과 비슷한 위치에 있으면서 실존했던 인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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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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