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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히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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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히 공국(독일어: Herzogtum Jülich, 네덜란드어: Hertogdom Gulik, 프랑스어: Duché de Juliers)은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존재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국가이다. 라인강 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쾰른 선제후국, 서쪽으로는 림뷔르흐 공국과 접해 있었다. 수도는 옛 로마 제국의 이울리아쿰으로 불렸던 율리히였으며, 라인란트 남부 일대에서 루어강 양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1423년 라인강 건너편의 베르크 백국과 합병되었고, 그 이후로 율리히베르크라는 국명으로도 알려졌다. 이어서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날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와 네덜란드 림뷔르흐주에 걸쳐 있으며, 같은 림뷔르흐어 방언 사용지역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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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백국 시절
9세기 문헌에 마트프리트라는 사람이 율리히 백작(pagus Juliacensis)이었다는 사실이 처음 기록되고 있다.[1] 니더로트링겐 공국의 율리히 가우에서 백작으로 처음 거론된 것은 1003년 게르하르트 1세이며, 그의 손자 게르하르트 3세는 1081년부터 율리히 백작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1219년 백작을 승계받은 빌헬름 4세는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1234년에 율리히에 도시 특권을 부여했다. 영토확장은 1240년까지 이어졌으며 동쪽에 마주하던 쾰른 대주교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과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5년 뒤인 1245년 콘라트의 군대가 율리히 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1278년~1297년 백작을 지낸 빌헬름 4세의 아들 발람 역시 쾰른 대주교의 정적이었는데, 1288년 보링겐 전투에서 브라반트 공작 장 1세를 지원하며 대주교 지그프리트 2세 폰 베스터부르크에 맞서싸웠다. 발람의 뒤를 이어 백작을 승계한 남동생 게르하르트 5세는 경쟁 관계에 있던 알브레히트 1세 폰 합스부르크에 맞서 독일왕 아돌프 폰 나사우의 편에 섰다. 이들의 협력은 1298년 괼하임 전투에서 아돌프 폰 나사우가 패하면서 끝이 났지만 게르하르트의 영토는 유지되었으며, 1314년에는 인근 도시 아헨에서 치러진 루트비히 4세의 대관식에 지지 선언을 보내며 다시 한번 쾰른 주교의 뜻에 반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국 시절
1328년 게르하르트가 사망하자 장남이 뒤를 이어 빌헬름 5세 백작이 되었다.[2] 게르하르트의 막내아들 발람은 1332년 쾰른 대주교가 되었다. 1336년 빌헬름 백작은 루트비히 4세 황제로부터 변경백 칭호를 받고, 1356년에는 카를 4세 황제가 빌헬름 5세에게 공작위를 수여하였다. 아들 빌헬름 2세는 황제의 이복형제인 브라반트 공작 벤첼 폰 룩셈부르크와 큰 갈등을 빚고 1371년 바스바일러 전투에서 벤첼을 물리쳤다.[3]
이후 율리히 백국은 이웃 국가인 클레베 공국과 베르크 백국, 헬러 공국, 마르크 백국의 역사와 연을 맺게 된다. 빌헬름 2세 공작은 헬러 공작 레히날트 2세의 딸인 마리와 결혼하였는데, 마리는 1371년 이복형제 레히날트 3세가 사망하면서 본인 스스로가 공작부인이 되었다. 빌헬름 2세는 제국을 다스리던 룩셈부르크가와의 갈등을 해결하였고, 아들 빌헬름 3세는 두 공국을 모두 상속받아 율리히겔더른의 빌헬름 1세가 되었다.
1402년 율리히겔더른의 빌헬름 1세 공작이 적자 없이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공작위에 오른 사람은 남동생 레히날트 4세였으나, 그 역시 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1423년에 사망했다. 헬러의 영지는 아르놀트 폰 에그몬트에게 공작위로서 수여되었고, 율리히는 베르크와 합병되어 젊은 방계 가운데 율리히베르크 공작 아돌프에게 넘어갔다. 아돌프는 조상 중 한 명의 혼인관계를 근거로 베르크를 봉토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1]
1511년 클레베 공작 요한 3세가 마지막 공작 빌헬름 4세의 딸인 마리아 폰 율리히베르크와 결혼하면서 율리히와 베르크를 상속받았다. 마리아는 아버지의 영지인 라벤스베르크 백국과 함께 율리히와 베르크의 상속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1521년부터 율리히베르크와 클레베는 요한 3세 공작을 통치자로 두는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을 형성하여 동군연합을 이루었다.[1][4]
1609년 율리히클레베베르크의 마지막 공작인 요한 빌헬름이 직계 상속인 없이 사망하자 율리히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614년 크산텐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조약에 근거하여 각 공국은 팔츠노이부르크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영토로 할양되었다. 율리히와 베르크는 팔츠 백작 볼프강 빌헬름에게 넘어갔고, 팔츠 백작은 공작위에 이어 1685년부터 팔츠 선제후를 겸하게 되었다. 마지막 팔츠노이부르크 공작이었던 카를 3세 필리프가 1742년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팔츠줄츠바흐 백작 겸 바이에른 공작 카를 테오도어가 율리히와 베르크를 상속받았다.
1794년 혁명정부가 세워진 프랑스 공화국이 율리히 공국을 점령하여 프랑스의 행정구역으로서 '로에르주' (Roer)를 설치하였다.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율리히의 프랑스 할양이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과 빈 체제 성립으로 율리히 공국은 프로이센 왕국의 율리히클레베베르크주로 편입되었으며,[1] 1822년에는 라인주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동시에 시타르트와 테겔렌 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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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통치자

율리히 백작
- 1003–1029 게르하르트 1세 - 율리히가우 백작
- 1029–1081 게르하르트 2세
- 1081–1128 게르하르트 3세 - 율리히 백작
- 1128–1142 게르하르트 4세
- 1142–1176 빌헬름 1세
- 1176–1207 빌헬름 2세
- 1207–1219 빌헬름 3세
- 1219–1278 빌헬름 4세
- 1278–1297 발람
- 1297–1328 게르하르트 5세
- 1328–1356 빌헬름 5세 - 1336년부터 변경백, 1356년부터 빌헬름 1세 공작
율리히 공작
1393년~1423년 헬러 공국과 연합, 1423년 베르크와 연합, 1437년 라벤스베르크와 연합.
- 1356–1361 빌헬름 1세 (이전 율리히 백작)
- 1362–1393 빌헬름 2세
- 1393–1402 빌헬름 3세, 1377년부터 헬레르스 공작도 겸함
- 1402–1423 레히날트
- 1423–1437 아돌프
- 1437–1475 게르하르트
- 1475–1511 빌헬름 4세
라 마르크가
1521년부터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연합 공국의 일부가 됨.
비텔스바흐가
도시
율리히 공국에 속했던 도시와 마을은 다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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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히 출신 유명인




- 뒤렌의 랍비 이삭 벤 메이르 - 랍비, 샤아레이 두라 저자 (13세기)
- 카를 요제프 베가스 - 화가, 독일 조각가 라인홀트 베가스의 아버지 (1794–1854)
- 고트프리트 루돌프 캄파우젠 - 은행가이자 정치인, 프로이센의 총리 (1803–1890)
- 아나 폰 클레베 공녀 - 귀족, 잉글랜드의 여왕 헨리 8세의 네 번째 아내 (1515–1557)
- 페터 구스타프 르죈 디리클레 - 수학자 (1805–1859)
- 헨드리크 골치우스 - 판화가, 소묘가, 화가 (1558–1617)
- 헤르만 하인리히 고센 - 경제학자 (1810–1858)
- 헤르만 오프 덴 그라프 - 메노파 공동체 지도자 (1585–1642)
- 프리드리히 요제프 하스 - 의사, '모스크바의 성스러운 의사' (1780–1853)
- 아르놀트 폰 하르프 - 여행가이자 작가 (1471–1505)
- 카를 하인첸 - 혁명 작가 (1809–1880)
- 앙리에트 위겔 - 화가 (1778–1850)
- 율리히-베르크의 마리아 - 귀족 여성, 율리히베르크 공작부인, 지빌레, 아나 그리고 아말리아의 어머니 (1491–1543)
- 헤르만 뢰허 - 작가 (1595–1678)
- 니콜라우스 폰 마일로 드 라 트레유 - 군인 (중장), 바이에른 왕국 전쟁부 장관 (1774–1834)
- 하인리히 폰 데어 마르크 - 군인 (중장), 바이에른 왕국 전쟁부 장관 (1782–1865)
- 야코프 마젠 - 예수회 사제, 역사가, 극작가, 신학자 (1606–1681)
-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 - 지리학자, 우주학자, 지도 제작자, 그의 부모는 원래 율리히 공국의 간겔트 출신 (1512–1594)
- 장프랑수아 오뱅 - 서공예가, 가장 유명한 에베니스트 중 한 명, 루이 15세의 책상의 제작자이자 외젠 들라크루아의 외할아버지
- 고슈빈 니켈 - 예수회 사제, 제10대 예수회 총장 (1582~1664)
- 성 이르름가르디스 - 성인 (1000년–1065년? 1082년?1089년?)
- 요한 빌헬름 시르머 - 화가 (1807–1863)
- 카를 카스파르 폰 지볼트 - 해부학자, 외과의사, 산부인과 의사, 교수, 현대 학술 외과의 창시자로 여겨짐 (1736–1807)
- 프리드리히 슈페 - 예수회 사제, 교수, 시인 (1591–1635)
- 페터 스툼프 - 농부이자 늑대인간으로 기소된 연쇄 살인범 (c. 1535–1589)
- 크레티앵 위르앙 - 바이올리니스트, 비올리스트,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 (1790–1845)
- 요한 폰 베르트 - 30년 전쟁의 기병대장 (1591–1652)
- 요한 바이어 - 의사이자 신비주의자 (1515–1588)
- 빌헬름 1세 폰 율리히겔더른 - 헬러 공국과 율리히 공작, 군사 활동과 호전적인 태도로 유명 (1364–1402)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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