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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대한제국 고종의 황자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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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고종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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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요약
관점
의친왕은 1877년(고종 14)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궁에서 태어났다. 부황은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사친은 귀인 덕수 장씨이다. 비(妃)는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이다. 측실은 21명이었고, 9명 이상이 떠났다.
1892년(고종 29)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고종 30) 김사준의 딸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와 길례를 올렸다. 1894년(고종 31) 일본 보빙대사를 다녀왔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지만 10월에 의원면직 하였다. 을미사변 배후에 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과 영선군(친일반민족행위자)이 있다고 추정하고 복수를 계획하다가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 유학을 떠났고 1896년(고종 33) 게이오기주쿠 대학교를 다녔다. 동년 동경(東京)에서 많은 빚을 졌다.[3] 일본 유학 동안 학업 성취도가 낮았다. 1899년(고종 36)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로노크 대학교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를 다녔는데 학업을 게을리 하였다. 평판이 좋지 못하였고 미국인 여러 명과 염문설이 났다.[4] 또한 뉴욕과 코니아일랜드를 오가느라 미국 은행에 금액을 차용한 뒤 상환하지 못해 피소되기도 하였다.[5] 1900년(고종 37)에 의친왕으로 봉해졌다. 그해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에서 유학 중이어서 누명을 벗었다. 1905년(고종 42) 미국에서 귀국하였다. 이후 러일전쟁 일본 승리 축하 대사,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1909년(순종 2) 일본에 갚아야 할 부채 2만여 원을 6만 원이라고 거짓말 하고 돈을 착복하였다.[6]
경술국치로 일본 왕공족에 편입되어 공(公)의 지위와 은사금 83만 원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 및 매국 관료보다 많은 액수였다. 1911년에 출간된 도서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했다.[7] 1919년 11월 대동단의 김가진, 전협, 최익환 등과 연락을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까지 갔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독립신문》기사에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라고 실렸다. 그러나 의친왕은 직접 서명한 신문조서에서 "망명은 전협 등 협박에 의한 것으로 본인은 시종일관 벗어나려 노력했다."라고 하였다.[8] 이어서 제2차 독립선언서 서명에 대해 "본인은 모르는 일이고 괘씸한 일이다."라고 하였다.[9]

그 후 "의친왕은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계속되는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로부터 형식적으로 받았던 공(公)의 지위에서 물러났다."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의친왕은 스스로 지병인 다리 통증으로 은거를 청원했고 치료 차 일본 벳푸(別府市)에 수시로 방문했다. 1930년 장자 이건(李鍵)에게 공위를 물려주었고 왕공족 및 공(公)의 공무를 면제받았다. '전하' 호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46년 애국협회(愛國協會)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단 김구,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을 지낸 일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김규식은 신탁통치 문제로 김구와 노선을 달리하고 한국혁명당을 이끌었으므로 사실과 맞지 않는다. 또한 한국독립당 고문을 역임한 것은 동명의 독립운동가 이강(李剛)의 사적이다.[10] 또한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라는 주장도 역사적 사실 근거가 없다.
1947년 박응래(朴鷹來) 일당이 "사동궁(寺洞宮)이 적산(敵産) 취급을 당한다."라고 하자 당시 천수백만 원하는 사동궁을 백오십만 원에 매각하는 사기를 당했다. 의친왕은 사동궁을 되찾기 위해 고소하였으나 도리어 일당에게 공갈협박을 당했다. 1948년에 고소를 취소했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가난과 병고와 영양실조로 고생했다. 임종 직전에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았다. 세례명은 비오이다. 1955년 안국동별궁에서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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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출생과 성장 과정
의친왕은 1877년(고종 14)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춘암(春菴)이다. 부황은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사친은 귀인 덕수 장씨이다. 귀인 장 씨는 덕수 장씨 족보에서 신풍부원군 장유의 5대손 장석정(張錫鼎)의 딸이다. 하지만 장석정은 1736년(영조 12)에 태어나 1795년(정조 19)에 사망하였다. 장석정의 처 경주 정씨는 1740년(영조 16)에 태어나 1797년(정조 21), 밀양 박씨는 1745년(영조 21)에 태어나 1805년(순조 5)에 사망하였다. 그러므로 1838년(헌종 4)에 태어난 귀인 장 씨의 친생부모가 될 수 없다.[11] 귀인 장 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축출되었고 1887년(고종 24)에 사망하였다. 1900년(고종 37)에 숙원(淑媛), 1906년(고종 43)에 귀인(貴人)으로 추증되었다. 다만 고종의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당호(堂號)를 받지 못하였다.
1781년(고종 19) 궁 내에서 한문을 배웠고[12]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13] 의친왕은 일찍이 군(君) 책봉을 받지 못하고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의 양자와 같은 자격으로 양육되었다. 이는 "궁중에는 왕세자 탄생 후 왕자군이 태어나면 왕세자가 만 10세가 되기 전까지 왕자군이 궁중에 문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법도 때문이었다. 훗날 명성황후는 의친왕을 군(君)으로 봉하고 궁중을 출입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에게 종용하여 명성황후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로 인해 의화군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원망이 깊어졌다. 의화군은 오랫동안 군(君) 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모 귀인 덕수 장씨의 집에서 지내며 평민 생활을 이어가자 결국 불만을 견디지 못하고 시중의 무뢰한과 어울려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명성과 인망이 없었다.[14]
1892년(고종 29) 의화군으로 봉해졌다. 1893년(고종 30) 김사준의 딸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와 길례(혼인)를 올렸다. 이후 "후일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이니, 김사준(처부, 妻父)의 집에 많은 손님이 찾아올 것이다."라고 예측하였다. 이로 인해 의친왕을 따르는 수십 명이 길거리를 막고 소란을 피우는 탓에 민 씨의 노복들이 그들을 피하였다.[15] 나이가 차서는 부덕하고 고립된 탓에 후원하는 사람이 적었다. 주색(酒色)을 좋아하여 여러 측실을 두었고, 검소하지 못한 탓에 여러 차례 돈을 탕진하였다.[16]
이로 인해 부황 고종[17], 이하영[18], 서재필[19]은 의친왕을 좋게 보지 않았다. 다만 윤치호는 1895년(고종 32) 당시 의친왕에 대해 총명하고 행동이 조심스러우며 주변 상황에 대해 신경을 쓰는 성품이라고 하였다.[20] 하지만 후일 윤치호도 의친왕의 인품을 좋게 보지 않았다.[21]
일본 망명·유학
1894년(고종 31) 내의원과 사옹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1895년(고종 32)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어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금방 의원면직 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너자 흥선대원군이 두려워서 나흘 동안 언더우드와 함께 있었다.[22] 의친왕은 을미사변을 운현궁의 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 영선군(친일반밍족행위자)이 꾸민 음모라고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낭인 또는 조선 검객을 모으고 청나라 세력과 닿아 있는 사람을 고용하여 복수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일본으로 망명 유학을 떠났다. 1896년(고종 33) 게이오기주쿠 대학교을 다녔다. 동년 동경(東京)에서 3,000원의 부채를 졌는데[23] 1895년(고종 32) 당시 총리 대신 연봉이 5,000원이었다. 고종은 의친왕이 일본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24] 결국 1897년(고종 34) 의친왕의 장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유학 배경으로는 정치 상황과 인품 문제가 있었다. 이범진(李範晋)은 고종에게 의친왕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상환(閔商鎬)이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고 있고,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와도 왕래하고 있다고 하였다.[25] 고종은 의친왕이 금릉위 박영효, 유길준 등과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또한 아직 나이가 젊어서 사려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사고를 일으킬지라도 헤아리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학업 성취도가 낮았다.[26]
미국 유학
1899년(고종 38) 미국으로 건너갔고 1900년(고종 39)에 미국 각지를 순행하였다. 8월 대한제국 전례가 개편됨에 따라 의친왕으로 책봉되었다. 그해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이 발생했다. 고종과 순종을 폐위하고 의친왕을 황위에 옹립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의친왕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서 아무 연관이 없었다.
…(중략)…
권호선(權浩善)이 논의를 꺼내기를, 『우리나라가 망할 날이 조석(朝夕) 간에 달려 있건만 전혀 막아낼 대책이 없으니 우리가 어찌 편안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마땅히 맹약(盟約)을 정하여 나라를 붙들어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맹약서(盟約書)를 만들었지만 그 내용이 두루뭉술하고 명확하지 않아서 사실 효과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고치고 제목을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라고 달았는데, 그 중의 조건은, 첫째,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둘째, 황태자(皇太子) 전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셋째, 의친왕(義親王)을 그 자리에 대신 올려 앉힌다는 것이고, 넷째, 국사범(國事犯)들로 정부를 조직한다는 것이고, 다섯째, 이 일을 누설하는 경우에는 서슬 퍼런 칼날을 안긴다는 것입니다. 광무(光武) 4년 월일을 밝힌 아래에 맨 먼저 조택현(趙宅顯)을 쓰고 그 다음에는 장호익(張浩翼)·김홍진(金鴻鎭)·권호선(權浩善)·강용구(姜容九)·방영주(方泳柱)·장인근(張寅根)·이기옥(李基鈺)·권승록(權承祿)·김희선(金羲善)·김형섭(金亨燮)·김교선(金敎先)·김봉석(金鳳錫)·김홍남(金鴻南)·김관현(金寬鉉)을 써서 15인의 이름을 같이 열거하였으며 도장을 찍었습니다.
…(중략)….[27]
1901년(고종 40) 3월 로노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서광범 등을 동기 동창으로 만나며 친분을 쌓기도 했다. 6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수행원,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28]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을 돌아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의친왕은 학업에 전혀 매진하지 않았고 평판이 아주 좋지 않았다. 더구나 검소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염문설이 났다. 1905년(고종 42) 의친왕을 몇 번 만났던 이승만은 "게으르고 학업에 열의가 없어 보이는 느낌의 인상을 받았다."라고 하였다.[29] 의친왕과 이승만이 만났던 계기는 당시 이승만은 밀사 임무를 맡고 워싱턴으로 갔었고, 의친왕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종종 주미 공사관이 있는 워싱턴에 방문하였다.
1905년(고종 42) 고종은 미국에서 유학 중인 의친왕의 품행에 대한 평판이 나쁘고 학업과 관련해서는 하등 얻는 바가 없는 것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였지만, 보통 사람과 같은 성품 및 행실을 갖추기를 원했다.[30]다만 의친왕이 대한제국으로 귀국하면 운현궁 일가와 어떤 충돌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므로 만약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몇 년 더 일본 또는 미국 유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31] 하지만 의친왕은 대한제국으로 귀국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대한제국으로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고종은 의친왕에게 5만 원을 주며 미국에서 계속 유학하라고 하였다.[32] 이후 서모 순헌황귀비는 이근상을 일본으로 보내 의친왕에게 은전 300만 원을 주며 귀국하지 못하게 하였다.[33] 그러나 더 이상 외국에 체류할 수 없다는 뜻이 완강한 의친왕은 1905년(고종 42)에 귀국하였다. 이에 고종은 "무사히 돌아와 기쁘고 다행스럽다."라고 하였다.[34]
대한제국 귀국 이후
1906년(고종 43) 육군 부장(陸軍 副將)에 임용되었고 '대훈위금척대수훈장(大勳位金尺大綬勳章)'을 수여받았다. 이어서 일본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였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다. 1907년(순종 원년)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의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지 않은 공식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황 고종은 운현궁 일가를 향한 을미사변 복수 계획,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 실덕 등으로 의친왕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의친왕의 사친 귀인 덕수 장씨는 오래 전에 사망하였고, 영친왕의 사친 순헌황귀비는 황후가 없는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조정은 일제가 깊숙이 내정 간섭을 하고 있었다. 여론은 의친왕이 덕망이 없고, 돈을 탕진하고, 학업에 전혀 매진하지 않고, 여색을 탐한다고 하였다.[35] 의친왕은 동년 3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서 해임되었다.[36]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체결 직후 일본으로 피서를 떠났고, 다음 달 11일부터 9월 3일까지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37] 1909년(순종 3) 이토히로부미 장례식 참석인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38] 1910년(순종 4) 경술국치를 넉 달 앞둔 4월 을사오적 이지용(李址鎔)과 기생을 데리고 질탕하게 풍류를 즐겼다.[39] 8월 신한민보 기사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의친왕은 나라가 망해도 친왕으로 대우한다는 바람에 아무 걱정 없이 기생을 데리고 놀러 다닌다."라고 실렸다.[40]
국권 피탈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의친왕은 일본 왕공족에 편입되어 공(公)의 지위와 은사금 83만 원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 및 매국 관료보다 많은 액수였다. 당시 쌀 80kg 가격이 7원이었으므로 약 118,571 가마를 구매할 수 있는 돈이었다.
상해 망명 시도(대동단 사건)
1919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고 "일제 치하의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의 국민으로 살겠다."라고 선포했다. 대동단 독립선언서에 스스로 '대한민국'이라고 표기하고 본명 '이강'으로 서명하였다.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또한 구 양반이었던 김가진 등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친왕 간의 연락선을 접선 및 주선하였다. 11월 9일 의친왕은 측실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과 간호사 최효신(崔孝信)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고종이 외국인에게 120만 원을 맡긴 증서가 있으므로 함께 대동해야 한다고 하였다. 의친왕은 1911년 혹은 1912년 고종이 이용익(李容翊)에게 기탁하여 각 은행에 예금한 돈이 상해(上海)에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있을 것이니 찾아서 돈을 받으라는 뜻의 증서를 받았었다.[41] 하지만 사전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김흥인과 최효신의 여행증명서가 준비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다음날 오전에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고, 평양에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11일 안동현역에서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게 잡혔다.[42] 황실 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이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했다.[43]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44]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의친왕은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45] 그러나 의친왕은 일본 경찰이 해당 내용을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46]
그것은 기억에 없는 일이다. 김춘기(金春基·처남)로부터 들은 일이 있는 강석룡(姜錫龍)의 이야기에 제2회 독립선언서인가에 나의 명의를 실었다고 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은 괘씸하다. 내가 적어도 서명한다고 하면 당당하게 할 것인데 승낙하지 않은 것을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못된 짓이라」고 책했더니 그 후 배부를 중지했다는 것이었으나, 나는 본 일이 없다.
더구나 천엽료(千葉了)가 대동단 사건에 대해 달리 진술할 말은 없느냐는 질문에 자신의 신세를 토로하였다.[47]
참으로 일신 상의 일을 말해 불평 같기는 하나, 내가 술을 마시거나 빚을 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받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괴로운 심정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대개는 술 때문에 전후를 기억하지 못하며, 차용금에 관해서는 경제 관념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이익을 빼앗기고 나의 얻는 바가 없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난폭하게도 뒤에 정리를 해 달래고 있다. 물론 경제 상에 관해서는 예산 상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안다. 그래도 너무 그 방법이 냉정하여 나로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적당한 보호의 방도를 세워 유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바란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와 헤어져 명성황후(閔妃)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다음에는 똑같이 순헌황귀비(嚴妃)에게 억압 당했으며, 이어서 지금은 또한 이왕직(李王職) 중의 간사한 놈 때문에 사람이 모르는 고통을 맛보고 있다. 나를 어리석다고 하겠으나 선악의 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의 불평의 연유 하는 바를 통찰 하여 잘 중재(仲裁)해 주기 바란다. 또 본 건의 처벌에 있어서도 아무쪼록 관대한 처분을 절망(切望, 간절히 바람)한다.
망명 실패 이후
1919년 11월 20일 독립신문 기사에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실렸다.[48] 윤치호는 의친왕의 망명 시도를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49]
의친왕이 이 나라를 떠나려고 시도하다가 의주에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 조금 나아졌다면 몰라도, 의친왕은 인격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독립운동의 대의명분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친왕이 선동가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1930년 지병을 이유로 일왕(日王)에게 은거(공 직위 반환)를 청원하였다. 6월에 공위를 장자 이건에게 물려주었고, 의친왕의 '전하'의 호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일각에서는 망명 사건의 처벌로 공위를 박탈 당했다고 하나, 이미 망명 사건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더구나 의친왕의 제국호텔 투숙, 포드 공장 방문, 벳푸(別府市) 체재 등 전후 활동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의친왕 본인의 요청에 따라 은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일제에 의해 여행의 자유를 빼앗겼다고 하나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의친왕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전국 각지 및 일본을 수시로 여행 다녔다. 이외에 의친왕은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서 권총을 쏘며 화풀이를 했는데, 사격술이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의친왕의 여성들
의친왕은 최소한 1896년(고종 33)부터 측실을 두었다.[50] 1905년(고종 42) 일본에서 동경(東京)의 무희(舞姬)들에게 돈을 탕진하였다.[51] 수화당(修和堂) 등전(후지타) 씨(藤田氏, ふじた)는 늦어도 1905년(고종 42), 수관당(修觀堂) 정 씨(鄭氏)와 기생 향란(香蘭)은 최소한 1908년(순종 2)에 측실이 되었다. 1908년(순종 2) 기생 이연연을 측실로 들였고 1909년(순종 3)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을 측실로 들였다. 경술국치 직전 기생들을 데리고 놀러 다녔다. 1910년 대에 수현당(修賢堂) 정운석(鄭雲石), 조병숙(曺秉淑), 수덕당(修德堂) 이희춘(李喜春), 수완당(修完堂) 김정완(金貞完), 수길당(修吉堂) 박영희(朴英喜)를 측실로 들였다. 1920년 대에 수은당(修恩堂) 송은점(宋恩点), 수경당(修慶堂) 김창희(金昌熙), 김금덕(金今德), 기생 강선옥(姜善玉), 오소홍(吳小紅), 장학선(張鶴仙), 이유색(李柳色), 이유앵(李柳鶯)을 측실로 들였다. 또한 장안 기생들과 풍류를 즐겼다. 1930년 대에 함개봉(咸開鳳), 김혜수(金蕙洙), 홍정순(洪貞順)을 측실로 들였다. 측실들 중 기생 향란(香蘭)은 1908년(순종 2)에 미국 유학을 떠났고, 수은당(修恩堂) 송은점(宋恩点)은 1922년에 사동궁을 떠났다. 김금덕(金今德)은 1932년에 의친왕으로부터 축출되었고 이후 윤(尹) 씨와 혼인하였다. 기생 이유색(李柳色)은 남작 조명구(趙命九), 이유앵은(李柳鶯) 장택상의 측실이 되었다.[52] 강선옥(姜善玉), 오소홍(吳小紅), 장학선(張鶴仙)도 의친왕을 떠났다.
광복 이후와 사망
광복 후 일설에는 11월 23일 이승만[53], 김구[54], 김규식[55] 등 임시 정부 인사들이 귀국한 당일 의친왕을 만나러 갔다고 하나 사실이 아니다. 임시 정부 인사들은 귀국하자마자 숙소로 이동하였고 미리 찾아온 이승만과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 모든 면회를 사절 했다. 12월 6일 의친왕이 직접 김구를 만나러 갔다.[56] 1946년 애국협회(愛國協會)가 결성되었다. 시급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척극적으로 추진하는 단체였다.[57] 의친왕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58]
1947년 왕공족(王公族)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해 박응래(來鷹來), 김선태(金善泰), 최시화(崔時化) 등이 의친왕에게 "사동궁(寺洞宮)이 적산(敵産) 취급을 당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천수백만 원하는 사동궁을 백오십만 원에 매각하였다.[59] 곧이어 들어온 미군정이 사동궁은 국가 재산이라 매각이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대법원은 묵살하였다. 의친왕은 사동궁을 되찾기 위해 고소하였으나, 박응래와 최시화가 결탁하고 변호사를 내세워 의친왕에게 고소를 취소하라고 공갈 협박했다. 1948년 의친왕은 고소를 취소했다.[60] 이후 안국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당시 정부 지원금이 끊겨서 피죽으로 겨우 연명하였다. 1953년 휴전 협정 후 다시 안국동별궁으로 돌아왔다. 1955년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비오'이고 병석에서 부통령 장면(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61] 8월 16일 영양실조 후유증, 스트레스, 화병 등 합병증으로 인해 향년 78세를 일기로 [안동별궁|안국동별궁]]에서 타계하였다.
사후
1955년 처음 의친왕묘(義親王墓)가 조성된 곳은 양주 화양리(현 서울 광진구 화양동)이다. 1965년 의친왕묘는 사친 귀인 덕수 장씨 묘와 함께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96년 의친왕묘와 의친왕비묘를 홍릉과 유릉 권역 내로 옮기고 합장하였다. 묘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62]
명예 회복
2022년 의친왕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직계 후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요인들의 후손들이 모여 의친왕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전시회, 공연 등 문화예술행사와 학술회를 통해 의친왕을 재조명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은 의친왕의 장손자 이준(李準)이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세종특별자치시 학술 행사에서 의친왕의 업적을 과장하거나 다른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의친왕의 공적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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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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