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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대한제국 고종의 황자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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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고종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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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요약
관점
의친왕은 1877년(고종 14)에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궁에서 태어났다. 부황은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사친은 귀인 덕수 장씨이다. 1892년(고종 29)에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다. 1893년(고종 30)에 김사준의 딸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와 길례를 올렸다. 1894년(고종 31)에 일본 보빙대사를 다녀왔다.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고 10월에 의원면직 했다.
1899년(고종 36)에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유학 중 미국인과 세 번 연애하였고[2] 여러 명과 염문설이 났다. 이로 인해 미국 청년에게 구타 당했다. 이후 10여 명의 측실을 두었다. 고종이 매년 학자금을 보냈지만 뉴욕과 코니아일랜드를 오가느라 미국 은행에 금액을 차용한 뒤 상환하지 못해 피소되기도 했다.[3] 이외에도 여러 차례 돈을 탕진하였다. 1900년(고종 37)에 의친왕으로 봉해졌다. 1905년(고종 42)에 미국에서 귀국하였고 러일전쟁 일본 승리 축하 대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한국 병탄 직후 출간된 도서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했다.[4] 1919년 11월에 대동단의 김가진, 전협, 최익환 등과 연락을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까지 갔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독립신문》에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의친왕 직접 서명한 신문조서에서 "망명은 전협 등 협박에 의한 것으로 본인은 시종일관 벗어나려 노력했다."라고 하였다.[5] 또한 제2차 독립선언서 서명에 대해서 "본인은 모르는 일이고 괘씸한 일이다."라고 하였다.[6]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계속되는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로부터 형식적으로 받았던 공(公)의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의친왕은 스스로 지병인 다리 통증으로 은거를 청원했고 치료 차 일본 벳부에 수시로 방문했다. 공위를 장자 이건에게 물려주고 왕공족 및 공(公)의 공식 의무를 면제받되 '전하' 호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광복 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당시 김규식은 신탁통치 문제로 김구와 노선을 달리하였고 한국혁명당을 이끌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다음으로 한국독립당 고문을 역임했다는 이력은 동명의 독립운동가 이강(李剛)의 사적이다.[7] 이외에도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라는 주장도 역사적 사실 근거가 없다. 의친왕이 활동한 단체는 애국협회였다.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병고와 영양실조로 고생하였다. 임종 직전에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았다. 세례명은 비오이다. 1955년에 안동별궁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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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출생과 성장 과정
의친왕은 1877년(고종 14)에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춘암(春菴)이다. 부황은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생모는 귀인 덕수 장씨이다. 귀인 장 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축출되었고 1887년(고종 24)에 사망했다. 1900년(고종 37)에 궁인에서 숙원(淑媛)으로 1906년(고종 43)에 귀인(貴人)으로 추증되었다. 다만 당호(堂號)는 받지 못하였다.
1781년(고종 19)에 궁 내에서 한문을 배웠다.[8]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9] 의친왕은 일찍이 군(君) 책봉을 받지 못하고 금릉위 박영효의 양자와 같은 자격으로 양육되었다. 이는 "궁중에는 왕세자 탄생 후 왕자군이 태어나면 왕세자가 만 10세가 되기 전까지 왕자군이 궁중에 문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법도 때문이었다. 이후 명성황후는 의친왕을 군(君)으로 봉하고 궁중 출입을 허락하는 일을 발의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에게 종용하여 명성황후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로 인해 의화군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원망이 깊어졌다. 의화군은 오랫동안 군(君) 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모 귀인 덕수 장씨의 집에서 지내며 평민 생활을 이어가자 결국 불만을 견디지 못하고 시중의 무뢰한과 어울려 소행을 난잡하게 하였다. 1892년(고종 29)에 비로소 의화군으로 봉해졌다. 1893년(고종 30)에 김사준의 딸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와 길례를 올렸다.
성품
의친왕은 김사준의 딸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와 길례(혼인)를 올리자 "후일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이니, 김사준의 집에 많은 손님이 찾아올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그 후 의친왕을 따르는 자들 수십 명이 길거리를 막고 소란을 피우는 탓에 민 씨의 노복들이 그들을 피하였다.[10] 또한 나이가 어려서는 명성과 인망이 없고 외국에서는 학문을 게을리 하였고 주색(酒色)을 좋아했다.[11] 나이가 차서는 품위와 인망이 없고 고립된 탓에 후원하는 사람이 적었다. 이로 인해 부황 고종이 의친왕을 좋게 보지 않았다.[12]
윤치호는 1895년(고종 32) 당시 의친왕에 대해 "총명하고 조심스러우며 주변 상황에 대해 신경을 쓴다."라고 하였다.[13] 그러나 2년 후 윤치호의 사촌 동생은 "의화군은 생각이 얕고 절조가 없는 사람입니다. 여성에 대한 과도한 열정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제가 감각적 쾌락을 향한 미친 열정을 저지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화군은 지금 저와 사이가 틀어진 상태입니다."라고 하였다.[14] 이하영은 1899년(고종 36)에 "의화군은 완전히 무능한 인물이다. 의화군은 여자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돌보지 않으며,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의화군은 조(趙)에게서 5,000달러를 사취했다. 그 돈은 전하께서 총을 만들 기계를 사기 위해 도쿄로 보내신 돈이다. 의화군은 그 돈을 세 달 만에 다 탕진했다."라고 하였다.[15] 1905년(고종 42)에 윤치호는 "의친왕이 도쿄의 무희들에게 돈을 탕진하고 있으며 가망이 없다."라고 하였다.[16]
이승만은 1905년(고종 42)에 밀사 임무를 맡고 워싱턴으로 갔을 때 의친왕을 몇 번 만나기도 했다. 당시 의친왕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종종 주미 공사관이 있는 워싱턴에 방문하였다. 이승만은 의친왕에 대해 "게으르고 학업에 열의가 없어 보이는 느낌의 인상을 받았다."라고 하였다.[17]
일제강점기에는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서 권총을 쏘며 화풀이를 했는데, 사격술이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일본 및 미국 유학
1894년(고종 31)에 내의원과 사옹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을미사변 여파로 중도에 되돌아왔다. 의친왕은 을미사변을 운현궁의 흥친왕, 영선군이 꾸민 음모라고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낭인 또는 조선 검객을 모으고 청나라 세력과 닿아 있는 사람을 고용하여 복수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의친왕은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게이오기주쿠 대학교을 다녔다. 1897년(고종 34)에 고종은 의친왕의 장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의친왕이 금릉위 박영효, 유길준과 교류하고 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직 나이가 젊어서 사려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사고를 일으킬지라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18] 1899년(고종 38)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0년(고종 39)에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8월에 대한제국 전례가 개편됨에 따라 의친왕으로 책봉되었다. 그 해에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이 발생했다. 고종과 순종을 폐위하고 의친왕을 황위에 옹립하며 새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당시 의친왕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서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중략)…
권호선(權浩善)이 논의를 꺼내기를, 『우리나라가 망할 날이 조석(朝夕) 간에 달려 있건만 전혀 막아낼 대책이 없으니 우리가 어찌 편안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마땅히 맹약(盟約)을 정하여 나라를 붙들어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맹약서(盟約書)를 만들었지만 그 내용이 두루뭉술하고 명확하지 않아서 사실 효과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고치고 제목을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라고 달았는데, 그 중의 조건은, 첫째,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둘째, 황태자(皇太子) 전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셋째, 의친왕(義親王)을 그 자리에 대신 올려 앉힌다는 것이고, 넷째, 국사범(國事犯)들로 정부를 조직한다는 것이고, 다섯째, 이 일을 누설하는 경우에는 서슬 퍼런 칼날을 안긴다는 것입니다. 광무(光武) 4년 월일을 밝힌 아래에 맨 먼저 조택현(趙宅顯)을 쓰고 그 다음에는 장호익(張浩翼)·김홍진(金鴻鎭)·권호선(權浩善)·강용구(姜容九)·방영주(方泳柱)·장인근(張寅根)·이기옥(李基鈺)·권승록(權承祿)·김희선(金羲善)·김형섭(金亨燮)·김교선(金敎先)·김봉석(金鳳錫)·김홍남(金鴻南)·김관현(金寬鉉)을 써서 15인의 이름을 같이 열거하였으며 도장을 찍었습니다.
…(중략)….[19]
1901년(고종 40) 3월에 로노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서광범 등을 동기 동창으로 만나며 친분 관계를 쌓기도 했다. 6월에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20]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의친왕은 미국에서 여러 번 염문설이 났고 평판이 아주 좋지 않았다. 학업도 전혀 매진하지 않았다.
1905년(고종 42)에 고종은 의친왕이 보통 사람과 같은 성품과 행실을 갖추기를 원했다. 또한 의친왕이 대한제국으로 귀국하면 운현궁 일가와 어떤 충돌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므로 만약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3~4년 더 일본 또는 미국 유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21] 하지만 의친왕은 대한제국으로 귀국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우선 미국에서 일본으로 와서 대한제국으로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고종은 의친왕에게 5만 원을 주며 미국에서 계속 유학하라고 하였다.[22] 이후 순헌황귀비는 이근상을 일본으로 보내 의친왕에게 은전 300만 원을 주며 귀국하지 못하게 하였다. 황현은 의친왕이 대한제국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순헌황귀비가 있다고 하였다.[23] 그러나 더 이상 외국에 체류할 수 없다는 뜻이 완강한 의친왕은 1905년(고종 42)에 귀국하였다. 이를 두고 고종은 1906년(고종 43)에 "무사히 돌아와 기쁘고 다행스럽다."라고 하였다.[24]
대한제국 귀국 이후
1906년(고종 43)에 육군 부장(陸軍 副將)으로 임용되었고 '대훈위금척대수훈장(大勳位金尺大綬勳章)'을 수여받았다. 이어서 일본국(日本國)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였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다.
1907년(순종 원년)에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의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황 고종은 운현궁일가를 향한 을미사변 복수 계획,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 실덕 등으로 의친왕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의친왕의 사친 귀인 덕수 장씨는 오래 전에 사망하였고 영친왕의 사친 순헌황귀비는 황후가 없는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조정은 일제가 깊숙이 내정 간섭을 하고 있었다. 여론은 의친왕이 덕망이 없고, 돈을 탕진하고, 학업에 전혀 매진하지 않고, 여색을 탐한다고 하였다.[25] 같은 해 처남 김택기(金澤基)가 의친왕부(義親王府) 찬위(贊尉)에서 총판(摠辦)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의친왕이 대한적십자사 총재에서 해임되었다.[26] 1909년(순종 3)에 이토히로부미 장례식에 잠시 일본 파견되었다.[27]
국권 피탈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본 왕공족에 편입되어 공(公)의 지위와 은사금 83만 원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 및 을사오적 등의 매국 관료보다 많은 액수였다. 이후 주색에 빠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1897년(고종 34) 즈음부터 일관적이었다.
1919년 11월에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고 "일제 치하의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의 국민으로 살겠다."라고 선포했다. 대동단 독립선언서에 스스로 '대한민국'이라고 표기하고 본명 '이강'으로 서명하였다.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또한 구 양반이었던 동농 김가진 등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친왕 간의 연락선을 접선 및 주선하였다. 1919년에 의친왕은 상복을 입고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황실 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이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 당했다.[28]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29]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의친왕은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30] 그러나 이강은 일본 경찰이 해당 내용을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31]
그것은 기억에 없는 일이다. 김춘기(金春基)로부터 들은 일이 있는 강석룡(姜錫龍)의 이야기에 제2회 독립선언서인가에 나의 명의를 실었다고 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은 괘씸하다, 내가 적어도 서명한다고 하면 당당하게 할 것인데 승낙하지 않은 것을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못된 짓"이라고 책했더니 그 후 배부를 중지했다는 것이었으나, 나는 본 일이 없다.
망명 실패 이후
1919년 11월 20일 독립신문 기사에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실렸다.[32]
1930년에 지병을 이유로 일왕에게 은거(공위의 반환)를 청원하였고 6월 12일에 공위를 장자 이건에게 물려주었다. 일각에서는 망명 사건의 처벌로서 공위를 박탈 당했다고 하나, 망명 사건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더군다나 의친왕의 제국호텔 투숙, 포드 공장 방문, 벳푸 체재 등 전후 활동이 지속되고 있었고 '전하'의 호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의친왕 본인의 요청에 따라 은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일제에 의해 여행의 자유를 빼앗겼다고 하나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의친왕은 동 기간 전국 각지 및 일본을 수시로 여행 다녔다.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광복 정국에서 이승만[33], 김구[34], 김규식[35] 등 임시 정부 인사가 귀국 당일인 1945년 11월 23일에 의친왕을 예방했다는 일화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당시 임정 위원은 귀국 후 바로 숙소로 이동해서 미리 찾아온 이승만과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 모든 면회를 사절했다.[36] 의친왕은 애국협회 활동을 하였다.
의친왕은 이승만 정부 수립 전에 "사동궁이 적산으로 몰수 될 것"이라는 이야기에 속아서 매각했다.[37] 이후 소송을 했지만 결국 소를 취하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3년에 휴전 협정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안동별궁(현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거주하였다.
의친왕은 말년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할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생조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켰던 병인박해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다. 1955년 8월 9일에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비오'이고 병석에서 부통령 장면(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38] 8월 16일에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 합병증으로 인해 78세의 나이로 안동별궁에서 타계하였다.
사후
1955년 처음 의친왕묘(義親王墓)가 조성된 곳은 양주 화양리(현 서울 광진구 화양동)이다. 1965년 의친왕묘는 사친 귀인 덕수 장씨 묘와 함께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96년 의친왕묘와 의친왕비묘를 홍릉과 유릉 권역 내로 옮기고 합장하였다. 묘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39]
명예 회복
2022년에 의친왕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직계 후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요인들의 후손들이 모여 의친왕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전시회, 공연 등 문화예술행사와 학술회를 통해 의친왕을 재조명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은 의친왕의 장손자 이준(李準)이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세종특별자치시 학술 행사에서 의친왕의 업적을 과장하거나 다른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의친왕의 공적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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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요약
관점
친가(전주 이씨)
- 사친 조부: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 1821 ~ 1898)
- 사친 조모: 순목대원비(順穆大院妃, 1818 ~ 1898)
- 조부: 문조(文祖, 1809 ~ 1830)
- 조모: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1808 ~ 1890)
- 부황: 고종(高宗1852 ~ 1919)
- 모후: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1851 ~ 1895)
- 적형(嫡兄): 원자 이최(元子 李墔, 1871 ~ 1871)
- 적자(嫡姉): 공주(公主, 1873 ~ 1873)
- 적형(嫡兄): 순종 이척(純宗 李坧, 1874 ~ 1926)
- 적형수: 순명효황후 여흥 민씨(純明 孝皇后 驪興 閔氏, 1872 ~ 1904)
- 적형수: 순정효황후 해평 윤증순(純貞孝皇后 尹曾順, 1894 ~ 1966)
- 적형(嫡兄): 대군 이표(大君 李墂, 1875 ~ 1876)
- 적제(嫡弟): 대군 이부(大君 李坿, 1878 ~ 1879)
- 서형(庶兄): 완친왕 이선(完親王 李墡, 1868 ~ 1880) - 사친: 영보당 귀인 이씨
- 서자(庶姉): 옹주(翁主, 1871 ~ 1872) - 사친: 영보당 귀인 이씨
- 서매(庶妹): 옹주(翁主, 1879 ~ 1879) - 사친: 내안당 귀인 이씨
- 서제(庶弟): 의민황태자 이은(懿愍皇太子 李垠 嚴善英, 1897 ~ 1970) - 사친: 순헌황귀비 영월 엄선영
- 서제수: 자행황태자비 이방자(慈行皇太子妃 李方子, 1901 ~ 1989)
- 서제(庶弟): 황자 이육(皇子 李堉, 1914 ~ 1916) - 사친: 광화당 귀인 이완흥
- 서제(庶弟): 황자 이우(皇子 李堣, 1915 ~ 1916) - 사친: 보현당 귀인 해주 정순기
- 서매(庶妹): 덕혜옹주 이덕혜(德惠翁主 李德惠, 1912 ~ 1989) - 사친: 복녕당 귀인 충주 양춘기
- 사친: 귀인 덕수 장씨(貴人 德水 張氏, 1838 ~ 1887)
- 본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 ~ 1955)
처가(연안 김씨)
- 처조부: 김덕수(金德秀, 1832 ~ 1867)[41]
- 처조모: 증 정부인 동래 정씨(東萊 鄭氏, 1832 ~ 1861) - 정세철(鄭世哲)의 딸
- 처조모: 증 정부인 단성 이씨(丹城 李氏, 1846 ~ ?)
- 처부: 김사준(金思濬, 1855 ~ 1917)
- 처모: 정부인 창원 황씨(昌原 黃氏, 1855 ~ 1912) - 황긍연(黃兢淵)의 딸
- 큰 처남: 김성기(金聖基, 1878 ~ 1916)[42]
- 큰 처남댁: 전주 이씨(1874 ~ 1895)
- 큰 처남댁: 전의 이씨(1880 ~ 1904)
- 큰 처남댁: 전주 이씨(1888 ~ 1907)
- 둘째 처남: 김택기(金澤基, 1884 ~ 1958)
- 둘째 처남댁: 해평 윤씨(海平 尹氏, 1884 ~ 1955)
- 셋째 처남: 김춘기(金春基, 1894 ~ ?)
- 셋째 처남댁: 박정식(朴貞植, 1901 ~ ?)
- 넷째 처남: 김경기(金敬基, 1901 ~ 1971)
- 넷째 처남댁: 의령 남소아지(南小兒只, 1902 ~ 1958)
- 다섯째 처남: 김갑기(金甲基)
정비·측실
- 왕비: 의친왕비 연안 김숙/김덕수(義親王妃 金淑/金德修), 1880 ~ 1964)
- 측실: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 ? ~ 1912[43]) - 궁인 출신[44]
- 측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仁, 1884 ~ 1961 이후[45])[46]
- 측실: 수현당 정운석(修賢堂 鄭雲石)
- 측실: 조병숙(曺秉淑)
- 측실: 수덕당 이희춘(修德堂 李喜春)
- 측실: 수완당 김정완(修完堂 金貞完, 1894 ~ ?)[47]
- 측실: 수길당 박영희(修吉堂 朴英喜, 1891 ~ ?)[48]
- 측실: 수경당 김창희(修慶堂 金昌熙)
- 측실: 함개봉(咸開鳳)
- 측실: 김혜수(金蕙洙)
- 측실: 남양 홍정순(洪貞順)
- 전측실(前側室) : 이연연[49]
- 전측실(前側室): 수은당 송은점(修恩堂 宋恩点)[50] - 아들 이광(李鎤)이 2세 때 사동궁을 떠남
- 전측실(前側室): 김금덕(金今德, 1909 ~ 1975[30])
자녀
의친왕과 의친왕비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의친왕비가 재록한 족보에는 의친왕과 측실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21명(12남 9녀)이다. 의친왕비는 서자녀들을 친자녀처럼 양육하였다. 일부 측실은 황손·황손녀를 사동궁(寺洞宮)으로 보내고 재혼하거나, 사동궁 근처 자택에서 황손·황손녀를 양육하였다. 그 외에 대가족이 사동궁에서 거주하였다.
의친왕 가(家)는 6남 이곤이 계승하였다. 1955년 의친왕, 1964년 의친왕비의 장례식에 상주를 지냈다. 이후 이곤의 장남 이준이 이었다. 현재 사동궁 사손·의친왕 가(家) 종손으로서 황실 후손들을 이끌고 있다.
황손·황손녀
기타
- 1906년(순종 2) 의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3살 된 아들을 데리고 왔다.[51]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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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기념사업회
의친왕기념사업회(義親王記念事業會)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 독립운동가의 자손, 황실독립운동의 중심 의친왕을 존경하는 국민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이다. 의친왕의 행장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22년 설립되었다. 의친왕가 종손 이준 황손이 회장, 현 대한제국 황실가문 최연장자 이해경 왕녀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설립한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2022년 10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전 세계에 흩어진 의친왕의 유물을 한데 모으고, 의친왕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물을 함께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 전시 했다. 의친왕과 관련된 사료와 유물을 수집 및 연구하고 관련 서적을 출판 및 간행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양력 8월 15일 의친왕 기신제를 봉행하는 주관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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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이 등장한 작품
TV 시리즈
참고 자료
관련 서적
- 《나의 아버지 의친왕》(1997년 6월 1일), 이해경 저, 진.
- 《조선의 왕실과 외척》(2003.04.27) 박영규 저, 김영사.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004년 8월 20일), 이덕일 저, 김영사.
- 《제국의 후예들》(2006-05-25) 정범준 저, 황소자리
- 《대한제국 황실 비사》(2007-08-06)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연숙 옮김, 이마고 펴냄.
- 《의친왕 전하》(2008년 8월 15일), 이효재 저, 의친왕숭모회.
- 《의친왕 이강》(2009년 7월 23일), 박종윤 저, 하이비전.
- 《황제. 1,2,3-제국의 부활》(2009년 12월 15일) 문영 지음, 평민사 펴냄
-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2022년 10월 14일) 경운박물관/의친왕기념사업회 지음.
각주
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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