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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박수량 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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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박수량 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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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박수량 백비(長城 朴守良 白碑)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호사(여절) 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청백리 정혜공 박수량의 묘 앞에 세운 호패형 비석이다. 2001년 12월 13일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간략 정보 종목,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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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박수량은 40여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하면서 두번에 걸쳐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죽은 후 그의 청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비문을 새기지 않고 세운 호패형 비석이다. 일명 백비(白碑)라 부른다.

박수량1514년(중종 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  · 의정부 우참찬  · 한성부판윤  ·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두번에 걸쳐 청백리에 녹선되어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일찍이 자식들이 셋집을 마다하고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꾸짖기를 "나는 본래 시골 출신으로 외람되게 성은을 입어 판서의 반열에 까지 올랐지만, 그런데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그 집도 10여 간이 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또 죽음에 이르러서는 "죽은 후에 절대로 시호를 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1554년(명종 9년) 1월 그의 부음을 아뢰자 명종이 잔교하기를 "염근(廉謹)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내 매우 슬프다. 특별히 치부(致賻)하라."고 하였다.

집이 곤궁하여 상사를 치를 수 없다고 아뢰자 "일로에 관인들로써 하여금 호송케 하고 상수를 제급하고 증직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국가의 특별한 부의로 장례를 치렀다.

38여년의 관리 생활을 하면서 경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집 한칸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 결잭하게 공직을 수행하다 한 섬도 못 된 곡식만 남기고 떠나갔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나 속은 비루한 자들에게 식은땀이 흐르고도 남을 청빈이었다.

이후 후손은 그의 뜻을 받들어 비석에 아무 것도 새기지 않고 그냥 빗돌만 세웠다. 이 호패형 무서 백비는 청백리 박수량의 청빈한 삶의 정신을 당대는 물론 후대에 까지 귀감이 되게 하는 상징적인 유물로서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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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 일찍이 그의 아들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그는 꾸짖기를 「나는 본래 시골 태생으로 우연히 성은(聖恩)을 입어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집도 10여 간이 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2]
  • 1544년(중종 39)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인수영광군에 나가 기영정[3]에서 판중추부사 송흠(宋欽)을 위한 잔치를 베풀면서 전라도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치고, 그 다음은 박수량을 친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세간의 평에 힘입어 이후 그는 다시 천거되어 높은 자리에 중용되었다.
  • 죽음에 이르러 후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4]
  • 죽었을 때 집에는 저축이 조금도 없어서 처첩들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으므로, 대신들이 임금께 계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
  • 사관이 말하기를 「박수량호남 사람으로 초야에서 나와 좋은 벼슬을 두루 거쳤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여러 번 지방에 보직을 청하였다. 일 처리가 매우 정밀하고 자세했으며 청백함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염근(廉謹)은 호남 선비의 으뜸이었다. 그는 천성으로 청렴하여 청백의 절개 한 가지는 분명히 세웠으니 세상에 모범이 될 만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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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과 추모

참고 자료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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