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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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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부인(章和夫人, ? ~ 826년)은, 신라 흥덕왕(興德王)의 왕비이다. 《삼국유사》에는 창화부인(昌花夫人)이라고 하였다. 사후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존되었으며, 흥덕왕과 합장되었다.

간략 정보 장화부인章和夫人, 사망 ...

생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장화부인을 소성왕(昭聖王)의 딸이라고 언급하였으며[1] 흥덕왕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흥덕왕 원년(826년) 겨울 12월에 사망하였다.[2]

장화부인이 사망하였을 때 흥덕왕은 후비를 들이라는 신하들의 권고를 두고 "새도 제 짝을 잃으면 슬퍼할 줄 아는데 사람이 되어 자기 짝을 잃고 어찌 무정하게 다시 재혼하겠느냐"라며 이를 거절했고, 시녀도 가까이 하지 않아 옆에 시중드는 이는 환관밖에 없었다고 한다.[2]

흥덕왕은 사망한 후에 장화부인과 합장되었다.

계보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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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공의 딸 정교와 동일인물?

《삼국사기》에는 헌덕왕 14년(822년)에 정월에 왕의 동복동생인 수종(秀宗, 흥덕왕)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였고, 각간(角干) 충공(忠恭)의 딸 정교(貞嬌)를 맞아들여 태자비로 삼았다[3]로 삼았다고 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헌덕왕의 태자가 누구인지와 관련하여 정교가 장화부인과 동일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존재한다.

정교의 혼인 상대였다는 '헌덕왕의 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조선 시대 권근이 사론(史論)을 쓴 《동국사략》(東國史略)은 정교가 혼인했다는 '헌덕왕의 태자'를 흥덕왕이라고 비정하고 장화부인과 정교가 동일인물이라고 서술하였으며, 《동국통감》도 같았다.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권근의 설을 따라 헌덕왕의 태자를 흥덕왕으로 비정하고 태자비 정교를 장화부인과 동일인물로 서술하였다.[4]

수승 즉 흥덕왕이 헌덕왕 14년(822년)에 부군(副君)[3] 또는 저이(儲貳)[5]이 되었다는 이 '부군'이나 '저이'가 왕위 계승자인 '태자'를 표현하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면 헌덕왕이 '태자'로 삼은 것은 친동생인 수승 즉 흥덕왕이 되겠지만, 김충공의 딸이라고 언급된 정교를 흥덕왕의 왕비 장화부인과 동일인물이라고 비정할 경우 《삼국사기》에서 장화부인을 소성왕의 딸이라고 한 언급과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주 1]

또한 《흥덕왕릉비편》 판독에 따르면[7] 흥덕왕은 신라 혜공왕(惠恭王) 13년(777년)생으로 《삼국사기》에서 부군(저이)가 되었다고 하는 헌덕왕 14년(822년)에는 46세였다.

근현대 이후 한국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해당 기사에 언급한 '헌덕왕의 태자'에 대해 기존의 학설대로 김수승(흥덕왕)이라고 비정하는 설[8] 외에도 헌덕왕이 재취한 것이라는 설,[9] 헌덕왕의 다른 태자설[10][주 2], 또는 김균정(金均貞)으로 비정하는 설[13] 등이 제기되어 있다.

흥덕왕의 비 박씨

《구당서》(舊唐書)에는 흥덕왕 6년(831년)인 문종(唐文宗) 대화(大和) 5년에 당에서 김언승(헌덕왕)에 대한 조문과 함께 김경휘(흥덕왕)를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녕해군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 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 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으로 책봉할 때 경휘의 어머니 박씨(朴氏)를 태비(太妃), 아내 박씨를 왕비(王妃)로 책봉하였다고 하고 있다.[14] 이에 대해서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은 흥덕왕은 왕비가 죽은 뒤에 다시 왕비를 맞지 않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신라에서 동성(同姓)과 혼인한 것을 숨겨서 왕비의 성을 박씨로 알린 것이고 실제로는 김씨이며 장화부인이 맞다고 하였으며[15] 안정복도 이에 동의하여 흥덕왕에게는 장화부인 외에 다른 정비(正妃)가 없었다고 하였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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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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