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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탁
대한민국의 축구인 (1942-2016)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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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탁(丁炳卓, 1942년 3월 14일 ~ 2016년 2월 10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며,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선수 시절 빠른 발을 앞세운 돌파력 및 지능적인 플레이에 강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2] 감독으로서는 정교한 숏 패스를 위주로 한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기술 축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3][4][5] 또한 연세대학교 감독 재임 시절 강철 등 여러 스타 선수들을 지도했으며, 특히 공격수였던 강철을 수비수로 포지션 변경시킨 것으로 유명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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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요약
관점
클럽
일제강점기 당시 전라남도 여수읍 출신으로 여수서초등학교, 여수중학교, 배재고등학교를 거쳤으며, 1963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1965년 와세다 대학과의 정기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일조했으며,[7] 그 해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여러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준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8][9][10] 그 뒤 1966년 연고전에서 패널티킥 선제골을 성공시켜 팀의 승리에 일조했으며,[11] 같은 해 있었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는 중앙대학교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의 활약으로 팀의 공동 우승에 공헌하였다.[12]
이후 1967년 해병대 축구단에 입단한 뒤 새로 발족한 양지 축구단에 편입되었으며,[13] 해병대와 양지의 이중 등록 논란에 휘말렸으나 최종적으로 양지 소속으로 출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14][15] 그리고 같은 해 열린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67 출전팀 선발 대회에서 몇 차례 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으나,[16][17] 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또한 1968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팀은 우승에 실패했으며,[18]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69 참가 명단에 포함되어 본선에 참여하였다.[19] 본선에서는 라이온스 FC과의 경기에서 1골, 베트남 경찰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20][21] 도요 공업과의 4강전 경기에서도 배김수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다.[22]
그 뒤 1970년 양지가 해체된 이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에 합류한 뒤 금융단축구협의회에서 조직한 금융단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23] 동남아시아 순회 경기에서 싱가포르의 군경합동팀, 말레이시아의 슬랑오르 FA, 태국의 은행연합팀, 일본의 청소년 대표팀을 상대로 득점을 올리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24][25][26][27] 또한 그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몇 차례 득점을 올리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승부차기에 나섰으나 실축해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28][29][30]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여러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성공시키며 팀의 준우승에 공헌하였다.[31][32][33][34][35] 하지만 그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주심의 판정에 지나치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이다 경고를 받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36]
이후 1971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팀을 결승 리그로 이끌었으며,[37][38] 팀은 결승 리그에서 1승 2무를 기록하며 창단 후 최초로 공식 대회 우승을 차지하였다.[39] 그리고 추계 대회에서도 몇 차례 득점포를 쏘아올리며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으며,[40][41] 그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상업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과 조홍은행 축구단과의 결승전에서 잇달아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일반부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나 팀은 대학부 우승팀인 고려대학교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42][43][44] 또한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당시 물의를 빚은 것을 사유로 대한축구협회로부터 6개월간 선수 자격 정지의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45]
그 뒤 1972년 국가대표 B팀과의 경기에 출전했으며,[46] 동남아시아 원정 도중 열린 싱가포르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였다.[47] 그리고 그 해 선수 은퇴를 선언한 뒤 강남조기축구회에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며,[48] 1979년 열린 연고 OB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49] 또한 1988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진행된 40대 올스타전에 나섰으며,[50] 1989년 개최된 제2회 연고 OB 정기전에도 40대 장년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득점을 기록하였다.[51][52]
국가대표팀
1962년 아시안 게임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53] 1963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54] 그리고 그 해 버마와의 친선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필리핀과의 1964년 하계 올림픽 2차 예선 경기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필리핀 측에서 기권을 통보함으로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며,[55][56] 베트남 공화국과의 3차 예선 경기 출전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다.[57] 그 뒤 1964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활약했으며,[58][59] 같은 해 국가대표 B팀으로 구성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이며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60][61] 이후 1965년에는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예선 불참을 결정함에 따라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며,[62][63] 그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재학중인 연세대학교 사정으로 인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64]
그 뒤 1966년 아시안 게임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65] 또한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서는 논란 끝에 추가 명단에 발탁되어 최종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66][67] 그리고 일본과의 예선 경기에서 선제골을 어시스트했으며,[68] 뒤이어 본선에서는 태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4위에 머물며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9]
이후 1967년에는 국가대표팀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70] 같은 해 열린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1차 평가전에 출전하였다.[71] 그 뒤 1968년 AFC 아시안컵 예선 및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를 대비해 소집된 명단에 들어갔으며,[72]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는 일본,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73][74] 또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는 말레이시아와의 4강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등의 활약을 보였고,[75] 대표팀의 공동 우승에 기여하였다.[76] 이후 1968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참가했으며,[77] 레바논과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넣은 데 이어 베트남 공화국과의 경기에서도 득점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78][79] 그리고 남베트남 인디펜던스컵에도 나섰으며,[80] 태국과의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베트남 공화국과의 4강전에서 추가골을 기록하며 대회 준우승에 공헌하였다.[81][82]
그 뒤 1968년에는 베트남 공화국과의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 2차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해 대표팀을 본선으로 이끌었으며,[83] 같은 해 열린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도 참가했으나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대표팀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84] 이후 1969년에는 베트남 공화국과의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 1차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해 대표팀의 본선 진출에 기여했으며,[85]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들어간 이후 국가대표 B팀과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득점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86][87] 그리고 일본과의 첫 번째 경기에서 박수일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했으며,[88] 얼마 뒤 열린 일본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도 정강지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2-0 승리에 일조하였다.[89] 그 뒤 같은 해 개최된 킹스컵에도 출전했으며,[90] 라오스와의 조별 라운드 경기와 베트남 공화국과의 4강전에서 득점을 올리며 국가대표팀의 대회 우승을 견인하였다.[91][92][93] 이러한 활약으로 1969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94]
이후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자 정병탁은 A팀인 청룡팀에 포함되었으며,[95] 직후 펼쳐진 CR 플라멩구와의 3차 평가전에서 이회택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96] 그 뒤 같은 해 열린 올라리아 AC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득점하였으며,[97] 뒤이어 치러진 B 1903과의 2차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98] 이후 그 해 개최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주장으로 참가하였고,[99] 인도와의 4강전에서 2어시스트를 기록한 뒤 버마와의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사상 첫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단독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100][101] 그리고 얼마 뒤 성사된 SL 벤피카와의 평가전에서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등의 활약을 선보였으며,[102] 경기 후 체력의 한계 및 후배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등의 사유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103] 그 뒤 국가대표 A팀인 청룡팀과 국가대표 B팀인 백호팀간의 평가전 직후 정병탁의 은퇴식이 거행되었으며,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정병탁에게 공로패를 수여하였다.[104][105]
은퇴 이후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소속이었던 선수들이 창단한 60세 이상의 선수들로 구성된 '고양시 실버축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106][107] 이후 2010년 새로 출범한 '서울시 실버축구단'으로 옮겨 활동하였다.[108][109][110]
또한 2002년 FIFA 월드컵 D-100일을 앞두고 진행된 '일본 간사이 지방 OB 축구회'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했으며,[111] 2009년 '양지 축구단 OB팀'의 일원으로 국가정보원 직원들로 구성된 '구룡회'와의 친선경기에 참가하였다.[112] 그리고 2011년 창설된 65세 이상의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국가대표 OB 축우회'의 총무를 맡았다.[113]
이외에 다수의 '한국 OB 지회 축구대회'에 참가했으며,[114][115][116][117][118] 다수의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고,[119][120][121][122] 다수의 '한국 대학 OB 축구대회'에 '연세대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12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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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경력
요약
관점
은퇴 이후 1980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선임된 뒤 부위원장에 올랐으며,[125][126] 1981년 개인 업무를 사유로 사표를 제출하였다.[127][128] 그리고 한동안 회양화학에서 상무로 근무하며 축구계와 거리를 두었으며, 1984년 연세대학교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29] 그 뒤 같은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130] 그 해 고려대학교 진학이 유력했던 김봉길을 스카우트하는 성과를 올렸다.[131] 또한 1985년 김현석 등 유망 선수들을 데려오는데 성공했으며,[132] 그 해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1986년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의 예선을 지휘하였다.[133][134]
이후 1989년 한국대학축구연맹의 기술이사가 되었으나, 본인의 업무 소관을 침해당했다는 사유로 3개월만에 사임하였다.[135] 그리고 같은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해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136] 1990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사임한 이회택의 후임 중 한 명으로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차만이 낙점되었다.[137] 하지만 1992년 아주대학교와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 잔디상태가 좋았던 효창운동장에서의 경기를 택하기 위해 서로 져주기 의혹을 받아 한국대학축구연맹으로부터 1년 감독 정지의 중징계를 선고받았으며,[138][139] 연세대학교에서 부진한 성적이 이어지자 퇴진을 요구하는 항의가 잇따라 결국 1993년 감독직을 사퇴하였다.[140]
그 뒤 1994년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으로 활동했고,[141] 같은 해 창단 예정인 전남 드래곤즈의 초대 감독 후보로 물망이 올랐으며,[142] 당초 계약이 유력했던 허정무가 고사함에 따라 계약금 1억원, 연봉 6천만원의 조건으로 정병탁이 선임되었다.[143][144] 또한 1995년 개최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 CA 보카 주니어스의 평가전 당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으나,[145] 대한축구협회는 정병탁이 해당 1경기만을 지휘하도록 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이 원칙 없이 임시변통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146][147] 그리고 전남 드래곤즈에서는 부임 후 첫 경기인 전북 현대 다이노스와의 1995년 리그컵 개막전에서 0-3으로 패배한 뒤 해당 대회에서 1승 3무 3패로 최하위를 기록하며 고전하였으나,[148][149] 1995년 K리그에서는 전기리그 6위 (4승 2무 8패), 후기리그 5위 (4승 5무 5패)의 기대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였다.[150] 하지만 부천 유공과의 1996년 리그컵 경기에서 팀의 핵심인 노상래와 김봉길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폭력 및 폭언을 표출한 것에 대해 정병탁에게 선수 관리 및 지휘 통솔의 책임을 물어 연봉 30% 감봉의 구단 자체 중징계 및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엄중 경고 조치를 받았으며,[151][152] 1996년 K리그 개막 이후 2연패 및 같은 해 치러진 5차례의 홈 경기 무승 등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그 해 5월 경질되었다.[153]
그리고 1995년 국민생활체육협의회에서 2002년 FIFA 월드컵의 대한민국 유치를 위한 범국민적 공감대 형성의 일환으로 개설한 '청소년 축구교실'에 참여해 전라남도 순천시 지역을 담당했으며,[154][155] 같은 해 열린 '전국 축구교실 초청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156] 또한 2002년부터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의 한수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했으며,[157] 2004년 창립된 '고양시 유소년 축구협회'에도 참여하였다.[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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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2016년 2월 1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61]
기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던 1960년대 당시 조윤옥, 조성달, 김호, 김호엽 등과 함께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많은 팬들을 보유하였다.[162]
1972년 10월 21일 자신의 팬이었던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163] 이후 한 차례 더 결혼식을 올렸으나 1987년 1월 23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부인이 사망하였다.[164] 그리고 아들인 정상남 또한 축구인이다.[165][166]
1974년에 정병탁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던 당시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이었던 장덕진에게 당시 국가대표팀 소속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감사패를 마련하였다.[167]
1995년 문화방송에서 2002년 FIFA 월드컵의 대한민국 유치를 위한 축구 붐을 조성하기 위해 방영한 '비바 꼬레아 2002 월드컵'의 2부에 출연하였다.[168]
1999년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역대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축구용품을 수집한 뒤 축구회관 1층에 축구박물관을 마련할 당시, 자신이 선수 시절 사용했던 축구화를 기증했으며,[169] 이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축구화가 되었다.[170]
2003년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6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다.[171]
2004년에 1968년 당시 이라크에서 개최된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던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대한민국 U-23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위해서 서울특별시에 체류하던 이라크 U-23 대표팀 '평화의 볼'로 명명된 국제축구연맹 공인구 및 2002년 FIFA 월드컵 기념구 등 100여개의 축구공을 전달하였다.[172][173]
2008년에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에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참관하였다.[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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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및 지도자 기록
클럽
국가대표팀
- 1963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1964년
- 1964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 국가대표
- 1964년 AFC 아시안컵 국가대표
- 1966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1967년
- 1968년 AFC 아시안컵 예선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1968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 국가대표
- 남베트남 인디펜던스컵 국가대표
- 1968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1969년
-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0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39경기 11골
지도자
- 1984년 ~ 1993년: 연세대학교
- 1985년 ~ 1986년: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
- 1994년 ~ 1996년: 전남 드래곤즈
- 1995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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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 득점과 결과 리스트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득점을 먼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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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경력
클럽
- 양지 축구단
-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준우승 1회 : 1969년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1회: 1968년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 1회: 1968년
- 신탁은행 축구단
국가대표팀
- AFC 아시안컵 3위 1회: 1964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우승 2회: 1967년, 1970년
- 킹스컵 우승 1회: 1969년
- 남베트남 인디펜던스컵 준우승 1회: 1967년
감독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 우승 1회: 1984년
- 준우승 1회: 1987년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 우승 1회: 1989년
- 전국체육대회
- 준우승 1회: 1988년
개인
- 대한축구협회 시상식 베스트 11: 1회 (1969년)
- 198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지도자 감독상
- 1989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지도자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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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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