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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환 (1916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1916–1980)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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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환(曺逸煥, 1916년 3월 13일 ~ 1980년 1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4·5·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창녕(昌寧)[1], 자는 영호(永晧), 호는 일송(一松)이다.
학력
경력
- 대구대학 법학부 강사
- 민주당 중앙당 정책위원
- 민주당 대구무구당위원장
- 1958년 국회 상임위원회 상공위원회 위원
- 1960년 국회 대구 서문시장 화재사건 특별구호조사위원회 위원장
- 1960년 국회 상임위원회 재경위원회 위원
- 1963년 민주당 경북지구당 지도위원
- 1963년 민주당 중앙당 상무위원
- 신민당 경북제4지구당위원장
- 1967년 국회 상임위원회 재경위원회 간사
- 1968년 신민당 전당대회 부의장
- 1970년 신민당 중앙당 지도위원
- 1970년 국회 한국알루미늄외자도피진상조사특위 위원
- 1971년 국회 상임위원회 경과위원회 위원
- 1972년 신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의장
- 1973년 신민당 중앙당 정무위원
- 1977년 신민당 중앙당 지도위원
- 제 4, 5, 7, 8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생애
조일환은 1916년 3월 13일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보내며 대륜중학교에 진학하였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히로시마의 흥문고등학교(興文高等學校)를 거쳐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출세를 위해 관직에 나서던 시기였지만,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여 관직 진출을 스스로 거부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은 뒤에는 건국과 교육 발전에 뜻을 두고,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 법학부에서 강사로 재직하였다.
1969년 9월 1일 서울 마포구 신촌로터리에서 서교동쪽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중앙선을 침범한 택시와 충돌해 이마를 다쳐 전치 2주의 부상을 당했다.
1971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법이 없어도 살수있을정도의 무골호인이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해서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80년 1월 28일 오후 8시 40분쯤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4세.
정치활동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면서 정계에 투신하였다. 대구시 무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자유당 정권이 무술 경위를 동원하여 야당의원들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여러 법안들을 통과시킨 일련의 정치파동인 이른바 2·4 보안법 파동(二四保安法波動)에서 손과 발에는 출혈이 있었고 우측 아홉번째 늑골이 골절되는등 야당의원 중 가장 크게 다쳤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대구시 무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구시 북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종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시 북구·서구 선거구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대구 지역 4개 선거구 중 유일한 야당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시 서구 선거구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의 공천을 받았음에도 대구시 중구·서구·북구 선거구에서 친야 무소속의 한병채 후보와 민주공화당 박찬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 시절에는 신도환계인 신우회에 속하였다.
그리고 1979년 6월 김영삼 총재가 한병채를 대구시 중구-서구-북구 지구당위원장직에 임명하자 같은 해 8월 유기준, 윤완중 등과 함께 신민당 김영삼 총재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그러다가 10·26 사건 이후 신청을 취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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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요약
관점
호조참판 퇴우당 조계형(退憂堂 曺繼衡)의 17세손, 대구도호부사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의 14세손,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의 13세손, 양산군수 설주 조시량(雪州 曺時亮)의 12세손이며 이인좌의 난때 합천에서 대거 가한 조성좌(曺聖佐)의 9세손이다. 조성좌는 반역죄로 1728년 4월 1일 합천에서 처형을 당했으며 조성좌의 아들 형제 조명상(曺明相)과 조명협(曺明莢)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기 위해 고향인 합천군에서 달아나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로 은거하였다. 이인좌의 난이 어느정도 평정된 후 고향을 잊지 못해 낙동강을 건너 지나다가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입향하였다.[2] 이후 계속 살아남아 대를 이어 나갔다.
할아버지는 국채보상운동 당시 고령군단연상채회(高靈郡斷煙償債會)에 의연금 7원을 기탁한 조택승(曺澤承)이고, 아버지는 조석현(曺碩鉉)이다. 초대 고령군수 이홍직(李洪直)의 딸 여주 이씨와 결혼했다.
묘지명
* 국회의원창녕조공묘지명
공(公)의 휘(諱)는 일환(逸煥)이고, 자(字)는 영호(永晧)이며, 일송(一松)은 그의 호(號)이다.
공의 씨족은 창녕(昌寧) 조씨(曺氏)인데, 시조는 신라(新羅)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태사(太子太師) 휘 계룡(繼龍)이다. 그 후예인 행상주목사(行尙州牧使)로 승지(承旨)에 추증된 휘 몽길(夢吉)의 14세손인 부친은 휘가 석현(碩鉉)[3]이고 모친은 창원 황씨(昌原黃氏)[4]이며, 1916년인 병진년 3월 13일에 고령군(高靈郡) 다산면(茶山面) 송곡리(松谷里) 고향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아이였을 적부터 타고난 천성이 영리하고 슬기로운 데다, 빛나는 재주가 탁월하여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이해하였다. 그는 장성하여 대구(大邱)에 있는 대륜중학교(大倫中學校)에 진학하였으며, 졸업한 후에는 일본에 유학(留學)하여 광도(廣島)에 있는 흥문고등학교(興文高等學校)를 거쳐 동경(東京)에 있는 명치대학(明治大學) 법학부(法學部)에 입학하였다. 동교(同校)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귀국하였으나, 당시에 최고학부를 졸업한 인사들이 동경(憧憬)하였던 환로(宦路:벼슬길)에는 일제(日帝) 치하(治下)임을 비관하여 들어가는 것을 혐오하고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그저 향리(鄕里)에서 일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며, 제사를 받들고 어버이 섬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형제에게는 우애를 다하였고, 친척과는 화목하였다. 벗들과 더불어 인덕(仁德)을 보완하고[5] 아들과 조카들을 훈계하여 가르쳤는데, 그 처신(處身)이 지극히 타당하여 당시 세상 사람들이 실로 찬양하는 대상이 되었다.
서기 1945년의 조국 광복을 계기로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기쁜 마음으로 건국(建國)의 위업(偉業)에 참여하느라, 대구대학(大邱大學) 법학부의 강사(講師)로 교육계(敎育界)에 진출해서 신진(新進)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958년 5월에 정치계(政治界)에 진출하여 야당(野黨)인 민주당(民主黨)의 공천(公薦)으로 대구 서구(西區) 민의원(民議院) 의원 선거에 출마(出馬)하여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를 계기로 5대와 7대, 8대에 계속해서 당선되어 4선(選)의 관록(官錄)을 과시하게 되었다. 시종일관(始終一貫) 야당의 투사(闘士)로서 야당사(野黨史)에 불멸(不減)의 공적(功績)을 남겼다. 그러나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 과업의 달성이 아직 요원(遙遠)하고 국난(國難)이 잇달아 생기던 이때라, 공의 활약과 그 기대가 긴급하고 간절하기만 하였지만 공은 1980년 1월 28일에 향년 65세를 일기(一期)로 대구시 서구 내당동(內堂洞)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의 부인은 여주(驪州) 이창림(李昌林) 여사(女史)로 고령 군수(高靈郡守)와 경주 군수(慶州郡守)를 역임한 휘 이홍직(李洪直)[6]의 딸이다. 슬하에 사남(四男) 일녀(一女)를 두었는데, 장남은 양일(洋一)이고 차남은 희석(喜奭)이며, 삼남은 희창(喜昌)이고 사남은 희경(喜京)이다. 장녀는 기주(琦珠)이고 사위는 경주(慶州) 최종덕(崔鍾德)이다. 이하는 어려서 모두 수록하지 않는다.
공은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된 후 국치(國恥)의 기간에 태어나 일제(日帝)의 가혹한 정치 아래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일본을 반대하는 감정과 겨레를 사랑하는 충정(衷情)이 투철하였다.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냈으며, 자신의 사욕을 억제하여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타인을 대할 때는 겸허(謙虛)하였다. 대중(大衆)과 더불어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것을 정치의 신조(信條)로 삼았음에, 군자(君子) 정치인이라고 세상이 칭송하였던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4대 민의원(民議院)으로 있을 당시, 이른바 자유당 정권(自由黨政權)의 보안법 파동(保安法波動:二四波動)[7]이 일어난 당일에, 수십 명의 무장경찰(武裝警察)에 대하여 보여주었던 열화(熱火)와 같은 단신(單身) 저항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사실로서, 어떠한 무력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했던 공의 기백을 여실(如實)히 표현한 일례(一例)였다고 할 수 있다. 여타(餘他) 대여(對與) 투쟁(鬪爭)의 역사는 낱낱이 들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공은 나와는 당(黨)과 의원직(議員職)을 같이한 실로 막역(莫逆)한 사이였으며, <나는> 항상 공의 성덕(盛德)을 앙모(仰慕)하였던 바이다. 지난번에 공의 부인(夫人)이신 이창림 여사가 우리 집으로 오셔서 공의 비문(碑文) 작성을 의뢰하였다. 불초(不肖)한 나의 천학비재(淺學菲才)[8]로는 이 부탁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평소의 우의(友誼)를 회고(回顧)해 보자면 <또> 이를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다만 공의 행적(行跡)의 개요(槪要)를 간략히 기술(記述)하여, 후인(後人)들에게 밝혀둘 따름이다.
전(前) 국회의원(國會議員) 신민당 총재 대행(新民黨總裁代行) 나주(羅州) 사람 인암(仁庵) 김의택(金義澤) 근찬(謹撰)
전(前) 대구시의회(大邱市議會) 의장(議長) 순흥(順興) 사람 정산(靜山) 안덕화(安德和) 근서(謹書)
일송(一松) 조일환(曺逸煥) 의원(議員) 묘비(墓碑) 건립추진위원회(建立推進委員會) 근수(謹竪)
서기 1980년 경신년 12월 일.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강성위(姜聲尉) 역(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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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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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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