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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스탕 트루아용
프랑스의 화가 (1810~1865)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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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스탕 트루아용(프랑스어: Constant Troyon, 프랑스어 발음: [kɔ̃stɑ̃ tʁwajɔ̃], 1810년 8월 28일~1865년 2월 21일)은 프랑스 출신의 바르비종파 화가이다. 경력 초기에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으며 비교적 늦은 시기에 동물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재능을 찾고 국제적인 인정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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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
그는 파리 근교 세브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도자기 제조소와 관련된 일을 했다. 트루아용은 아주 어린 나이에 공방에 들어가 장식가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스무 살까지 도자기 장식의 세밀한 디테일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완벽히 숙련했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그는 화가로서 시골을 여행하며 자금이 허락하는 동안 풍경화를 그렸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만나는 도자기 제조업자와 친분을 쌓고 다시 장식가로 꾸준히 일해 자금을 모은 뒤, 다시 여행을 떠나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되풀이했다.[1]
경력
요약
관점

트루아용은 알프레드 리오크뢰라는 화가에게 지도를 받은 후 여덟 살 연상의 저명한 화가 카미유 로크플랑의 제자가 되어 그의 총애를 받았다. 로크플랑은 트루아용을 루소, 쥘 뒤프레 등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에게 소개했고, 트루아용은 1840년에서 1847년 사이 작품에서 그들의 화풍을 따르려 노력했다. 쥘 뒤프레는 트루아용에게 야외 사생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풍경화가로서 완전한 대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진지한 성취가 있고 어느 정도의 성공도 거두었지만, 생애 말기에 그린 몇몇 진솔된 풍경화에서는 최고 수준의 예술적 품질을 보여주었다. 이는 오랜 기간 가축을 그리며 쌓은 경험 덕에 그의 재능이 충분히 발전한 이후였다.[1]
1846년 트루아용은 네덜란드를 방문했고, 헤이그에서 파울뤼스 포터르의 유명한 작품 《어린 황소》를 보았다. 그는 이 그림과 카위프의 햇빛 가득한 풍경화, 렘브란트의 걸작들에서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법을 발전시켰고, 이 시기 이후의 작품에서 비로소 그의 참된 개성이 드러난다. 동물 화가로서의 능력을 자각한 뒤 그는 빠르게 성장했고, 결국 영국과 미국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그의 작품은 걸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1]

프랑스의 미술 비평가 알베르 볼프는 1886년 파리에서 열린 '백 점의 걸작'(Cent Chefs-d'Oeuvres) 전시회 이후 이 시기의 트루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연과 네덜란드 여행이 트루아용에게 그의 진정한 사명을 드러내주었다. 그것은 일류 동물 화가로서의 사명이었다… 두 세기가 지나서도 트루아용은 네덜란드의 유명한 동물 화가들의 전통을 모방 없이 이어갔다. 파울뤼스 포터르는 자신에게 걸맞은 후계자를 보게 된 것이다… 트루아용의 동물들을 보는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거대한 생명감, 깊고 순수한 색채로 넓게 바른 붓질, 다양한 종에 대한 세심한 이해, 그리고 대가가 창조한 풍경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 그것은 유행처럼 박제된 동물이 아니라, 햇빛 아래 기지개를 켜고, 아침의 서늘한 바람을 들이마시고, 폭풍이 다가오면 서로 몸을 붙이는 살아 있는 무리였다.”[2]
그러나 성공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트루아용은 그 성공을 완전히 믿지 않았고, 여러 나라의 시장에서 그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을 때조차 세상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여전히 불평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파리 살롱에서 다섯 차례 메달을 수상했으며, 나폴레옹 3세도 그의 후원자였다. 재정적으로도 그는 바르비종파 동료들에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다.[1]
미혼이었던 트루아용은 1865년 2월 21일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말년에 정신적 혼미를 겪었다.[1] 그는 파리 몽마르트르 지구의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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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모두 1850년에서 186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초기 작품은 비교적 가치가 낮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사망한 후에 에콜 데 보자르에서 동물화 부문의 트루아용 상을 제정했다. 그의 작품은 많은 대형 판화로 널리 알려졌으며, 런던의 월리스 갤러리에는 《물을 먹는 소들》과 《폭풍우 속의 소들》이 있고, 글래스고 시립 갤러리에는 《가축이 있는 풍경》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일하는 황소들》과 《농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으며,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여러 미술관에도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투크 계곡, 노르망디》는 그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며, 190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품질이 그리 높지 않은 풍경 속 단독 소 한 마리가 7,350파운드에 낙찰되었다. 화가 에밀 반 마르크(1827~1891)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였다.[1] 1875년에는 파리 17구의 한 거리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작품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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