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로스(그리스어: Κλάρος, 라틴어: Clarus)는 이오니아 지역에 위치했던 고대 그리스의 성소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 아폴론, 특히 이곳에서는 아폴론 클라리오스의 신전과 신탁소가 있었다. 이오니아 동맹을 이루는 12개 도시 국가 중 하나이자 이곳에서 북쪽으로 12km 거리에 있는 콜로폰의 영토에 위치했었다. 해안 도시 노티온이 남쪽에서 겨우 2km 거리에 있었다. 성소의 유적지는 현재 터키 이즈미르주의 멘데레스의 Ahmetbeyli라는 마을 북쪽에서 발견되었다.
클라로스의 아폴론 사원은 델포이와 디뒤마의 사례처럼 아주 중요한 예언 장소였다. 이 지역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정보는 '호메로스 찬가'를 통해 기원전 6세기와 7세기 때로 거슬러 올라가며, 유적지에서 발견된 원 기하학 토기는 기원전 9세기의 점유를 나타낸다.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아주 중요한 장소였던 아폴론 사원 인근 신성한 동굴은 이 지역에서 초기 시기에 키벨레 숭배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클라리아(Claria)’라 불린 경기들이 아폴론을 기리기 위해 5년마다 클라로스에서 열렸다.
역사

클라로스의 성소가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기원은 신화와 함께 감춰져 있다. 고고학 발굴들을 통해서 건축물이 기원전 10세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 이곳 성소의 명성이 절정에 다다른 때는 서기 2세기와 3세기 때인 것으로 보이며[2] 서기 4세기까지 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았었다.[3]
원료와 출처
헬레니즘 시대 말, 대리석을 실은 화물선 한 척이 클라로스로 향하던 중 키질부룬 (Kizilburun) 인근 오늘날의 터키 남동쪽 해안에서 가라앉았다.[4][5] 이 선박은 1993년에 재발견되었고, 2005년부터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이 배에서는 추정상 50톤 정도의 대리석 기둥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클라로스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서 발견된 기둥들의 묘사와 일치한다. 동위 원소 및 기상학 자료 등은 마르마라해의 프로콘네소스섬이 이 대리석의 원천이라 가리키고 있다. 프로콘네소스에서 수출되어 클라로스에서 쓰이게 될 예정이었던 대리석은 프로콘네소스 대리석으로 알려진, 독특한 푸른색에 하얀색 줄무늬를 띠는 특이한 유형의 대리석이었다. 이 대리석은 350km에 이르는 여정을 완주하지 못했다.
설립
클라로스의 건립 신화는 테베를 정복한 에피고노이 신화와 연결되어 있다.[6] 테이레시아스와 그의 딸 만토 등 두 예언자들은 다른 테베인들과 더불어 에피고노이들의 포로가 되고 마는데, 에피고노이들은 이들을 아폴론을 경배하기 위해 이들을 델포이로 보냈으나, 테이레시아스는 그곳으로 향하던 중에 죽고 만다. 델포이에서 만토는 남아있는 테베인들과 함께 이오니아로 배를 타고 나가 그곳에 식민지를 세우라는 아폴론의 계시를 받게 된다. 이들은 이후 클라로스가 세워지게 되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카리아에 정착한 크레타인 무리의 지도자 라키오스의 군대에 사로잡히고 만다. 만토에게서 이들이 누구이고 이곳에 어떤 이유로 온 것을 알게 된 라키오스는 그녀와 혼인을 하고 테베인들이 클라로스를 세우는 것을 허용한다. 두 사람의 후계자가 바로 예언자 모프소스이다.[7]
따라서 클라로스 신탁소의 기원은 고전기 그리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미노아-미케네 시대로 기억되었다. 고고학 연구가 이 전승을 뒷받침해주었다. 남쪽의 에페소스와 그 주변 여러 지역에서 미케네인들의 밀집 거주지가 확인되었다. 밀레토스에서도 독일 대학의 1995/96년 발굴을 통해서 오래된 미노아 취락이 발견되었다. 클라로스 내에도, 제단과 신전 정면 사이 트렌치 조사에서 기원전 10세기의 원 기하학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화에서 암시된 존재를 입증해준다.
콜로폰에서, 미케네 시대의 무덤이 발견되었지만, 미케네 토기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리스 예언자 칼카스가 클라로스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는 점복에 있어서 대단한 능력을 가졌던 모프소스에게 도전했으나, 패하였고 비탄 속에 사망했다고 한다.[8]
헬레니즘 시대
전승에 의하면, 클라로스의 신탁소에서 스미르나의 시민들에게 옛 스미르나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립한 파고스산의 신 스미르나 (오늘날 카디페칼레)로 이주하라는 조언을 주었다고 한다. 스미르나인들은 이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9] 이때 옛 스미르나는 중요성을 상실하였고, 두 번째로 세워진 스미르나는 아시아의 번영하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로마 시대
로마 시대 때 여러 기념물들이 건립되었으며 (폼페이우스, 루쿨루스,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등), 일부는 헬레니즘 시대 건축물 위에 세워졌다. 대플리니우스는 ‘콜로폰에 있는 클라로스의 아폴론 동굴에는 연못이 있는데, 그 물을 마시면 놀라운 신탁을 전할 능력을 얻지만, 그 물을 마신 이들의 수명은 짧아진다’고 기록하고 있다.[10] 이암블리코스는 “신탁소는 황홀경 상태에서 ‘…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고 하였다.[11]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8년(그가 죽기 바로 1년 전)에 이곳 신탁소를 찾은 것으로 유명하며 게르마니쿠스에게 신탁답게 모호한 암시로 이른 죽음을 예언했다고 한다.[12]
발굴
클라로스는 작은 강이 운반해온 충적 토사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는데, 기원전 1세기에 배후지가 벌목되면서 이 해안선을 따라 널리 나타난 현상이었다. T. 마크리디(Macridy)가 1905년에 이 성소의 정문 기념물을 발견했고 1913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샤를 피카르(Charles Picar)와 더불어 추가적인 발굴을 위해 현장에 복귀했다. 1950년과 1961년 사이 루이 로베르 (Louis Robert)의 감독 하에 발굴이 재개되었고, 로마 시대의 중요한 봉헌 기념물들이 발굴되었으며, 신탁의 중심지였던 도리아 양식의 아폴론 신전도 확인되었으며 이 신전은 기원전 3세기의 것으로, 웅장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은 헬레니즘 양식 최종 단계에 속한다. 신성한 길 (The Sacred Way)이 J. de La Genière의 지휘 하에 1988년에 발굴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충적 퇴적물이 현장에서 치워졌고, 클라로스는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가 갖추어졌다.[1]
1988년 이래로 실시된 발굴을 통해 기원전 9세기부터 신선한 물이 샘솟는 천 주변으로 종교 장소가 생겼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초로 알려진 건축물은 기원전 7세기 중반의 원형 제단이다. 이 구조물은 기원전 6세기 중엽에 넓은 직사각형의 제단 (14.85 × 6.05 m)으로 덮이게 되었고 동시에 아폴론에게 봉헌된 대리석 사원이 샘 주변으로 건립되었고 한편 아폴론의 자매인 아르테미스를 위한 공간 및 조그만 제단 (3.50 × 150 m)이 있었으며 이 옆으로 두 개의 코레(Kore ) 조각상 받침대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보존 상태가 좋으나 머리는 없어졌다. 아폴론에게 헌정된 쿠로스 조각상이 최소한 네 개가 있었으며, 그 중에 세 개는 미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기원전 6세기와 4세기 말경 사이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 당시에 성소의 새로운 배치가 구상되었고, 기념물들은 더 큰 규모로 세워졌으며 이 계획들은 기원전 3세기 초의 참혹한 사건들이 있은 뒤에야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3세기에 새로운 제단 및 아폴론의 새 신전에 대한 건축 작업이 시작되었다. 신탁이 예언을 전하던, 어둡고 지하실 같은 아뒤톤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좁고 어두우며 아치형의 미궁 같은 회랑이 남아 있다.
지표 위로는, 레토 및 아르테미스와 함께 동쪽을 향한 채 리라를 들고 앉아 있는 거대한 아폴론 조각상의 기초 부분과 잔해를 볼 수 있다. 이 조각은 일부 파편이 현장에서 부분적으로 재조립되어 있으며, 원래 높이는 7미터가 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소 안에는 수많은 고대 방문자들이 남긴 이름들이 기둥과 계단, 벽은 물론 곡선형 대리석 의자에도 봉헌비문과 기념비문 형태로서 볼 수 있으며, 클라로스의 이 비문들은 현존하는 그리스 비문 가운데 가장 방대한 집합체를 이루고 있다. 성의 우아한 대리석 의자에는 뱀 모양의 팔걸이가 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에게 모든 진정한 신탁이 지니는 지하세계적 속을 상기시키며, 아폴론이 피톤을 무찌른 뒤 델포이에 신전을 세운 사건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의 아시아 속주가 시작되고 나서 (기원전 2세기 말), 콜로폰의 유력 이사들은 성소의 권위, 종교 제전의 중요성, 신탁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리스인 및 비그리스인들로 이뤄진 군중들 앞에서 희생 제의를 할 때, 무거운 석재에 부착된 네 줄의 쇠고리가 사용되어 한 번에 백 마의 희생물을 동시에 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 클라로스는 사제들이 헤카톰베를 집전하던 방식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그리스 세계에서 유일한 성소이다.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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