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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아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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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The Kiss, 이탈리아어: Il bacio)는 이탈리아 예술가 프란체스코 아예츠가 1859년에 그린 유화이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이 그림은 이탈리아 낭만주의의 대표작으로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인 리소르지멘토의 정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알폰소 마리아 비스콘티 디 살리세토가 의뢰했으며, 사망후 브레라 미술관에 유증했다.[1]
역사적 배경
19세기 에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1815년에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해 빈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역할이 미미하여 여러 왕국과 공국으로 분할되었고, 이들 국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가에게 직간접으로 통치받았다. 이러한 분열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불러 일으켰고, 카르보나리당과 청년 이탈리아당과 같은 민주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의 비밀 결사를 탄생시켰다. 이들 단체는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여론 형성에 근본적인 역할을 미쳤다.
1848년의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실패했지만, 1858년 독립전쟁을 주도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카밀로 벤소 카보우르 백작은 나폴레옹 3세와 간의 반오스트리아 동맹을 위한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이듬해 프랑스- 이탈리아 동맹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승리를 거둠으로서 이탈리아 통일의 단초를 마련했고, 몇 년 후인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었다.
프란체스코 아예츠는 바로 이 시기에 키스를 그렸다. 아예츠는 과거의 사건을 묘사함으로써 민족주의 운동의 유혈 탄압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이 그림은 모호하고 불투명한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아예츠는 당국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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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키스의 첫 번째 버전은 피에몬테주 살리체토의 알폰소 마리아 비스콘티 백작이 의뢰했다.[2] 밀라노 애국자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했던 아예츠는 백작으로부터 프랑스와 사르데냐 왕국 간의 동맹과 관련된 희망을 묘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작품은 1859년에 제작되어 9월 9일 브레라 미술관에 전시되었고, 이후 25년 이상 비스콘티 가문의 호화로운 저택에 장식으로 걸려 있었다. 1886년, 백작이 사망하기 1년 전, 그는 이 그림을 브레라 미술관에 기증했고, 현재 제37호실에 전시되어 있다.
유화 버전이 가장 유명하지만, 아예츠는 유화와 수채화로 두 가지 다른 버전을 제작했다. 두 번째 버전은 1861년에 밀리우스 가문을 위해 그려졌고,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전시되었다. 이 버전은 2008년에 소더비스 경매에서 780,450 파운드에 팔렸다. 두 번째 버전은 여성의 드레스가 흰색이라는 차이가 있다. 세 번째 버전은 종이에 수채화로 그려진 작품이다. 1859년에 타원형으로 그려졌으며 아예츠가 카롤리나 주키에게 기증했다. 현재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 버전은 커플 옆 계단에 흰색 천이 놓여져 있고, 남자의 망토에 밝은 녹색이 칠해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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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
이 그림은 중세 시대의 한 커플이 서로 키스하며 포옹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서양 미술 역사상 키스를 가장 열정적이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 중 하나이다. 여성은 뒤로 기대고, 남성은 왼쪽 다리를 구부려 그녀를 지탱하는 동시에,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듯이 옆 계단에 발을 딛고 있다. 커플은 그림의 중심에 있지만 그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다. 캔버스 왼쪽 구석에는 희미한 그림자 형태가 도사리고 있어 음모와 위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3]
해석
이 그림은 이탈리아 낭만주의 그림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으며, 그 특징들을 많이 담고 있다. 이 그림은 표면적으로 열정적인 키스를 묘사하며 낭만주의의 원칙과 일치한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깊은 감정을 강조하고, 중세를 애국적이고 향수 어린 분위기로 재해석하고 재평가한다.[4]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이 이탈리아를 위해 오스트리아와 싸우러 가는 젊은 이탈리아 병사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키스하며 작별을 고하는 정치적 함의가 있다고 제안한다.[5]
더 깊은 수준에서, 이 그림은 이탈리아 통일의 낭만적, 민족주의적, 애국적 이상을 상징한다. 이는 여러 도상학적 요소에 의해 지지된다.
남자의 발이 일시적으로 계단에 놓여 있는 것과 연인이 그를 꼭 잡고 있는 모습에서 이별이 임박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로부터 떠나야 할 당위성과 애국자가 되는 위험을 보여준다. 다른 도상학적 요소로는 망토 안에 숨겨진 단도(합스부르크 침략자에 대한 임박한 반란의 신호)와 그림의 날짜(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해인 1859년)가 있다. 그러나 그림에서 가장 분명한 알레고리는 19세기 이탈리아를 휩쓴 정치적 변화를 암시하는 색채이다. 즉, 여성 드레스의 파란색과 젊은 남성 타이츠의 밝은 빨간색은 프랑스 국기의 색상을 암시한다.
아예츠는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에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버전에서는 애국적 알레고리가 더욱 분명하다. 1861년 버전에서는 여자의 드레스가 이탈리아 왕국 선포에 대한 경의로 중립적인 흰색 톤으로 표현했으며, 네 번째 버전에서는 대신 남자의 망토를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하는 녹색으로 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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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광범위한 인기를 누렸고, 많은 논평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대에 이탈리아의 주요 초콜릿 제조업체 중 하나인 페루지나의 미술 감독은 그림의 이미지를 수정하여 인기 있는 "바치" 초콜릿의 전형적인 파란색 상자에 두 연인의 그림을 실었다. 1954년 이탈리아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는 그의 걸작 영화 애증의 주요 장면 중 하나에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
외부 링크
각주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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