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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아예츠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화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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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아예츠 (이탈리아어: Francesco Hayez, 이탈리아어: [franˈtʃesko ˈaːjets], 1791년 2월 10일 – 1882년 2월 12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그는 19세기 중반 밀라노 낭만주의의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웅장한 역사화, 정치적 우화, 초상화로 유명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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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훈련과 초기 작품
프란체스코 아예츠는 베네치아의 비교적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는 프랑스계 어부였고, 어머니 키아라 토르첼라는 무라노 출신이었다. 프란체스코는 다섯 아들 중 막내였다. 아예츠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골동품상인 삼촌 조반니 비나스코의 베네치아 스튜디오에 보내졌는데, 삼촌은 그를 그림 복원가로 훈련시키기를 바랐다.
1798년 그는 프란체스코 마지오토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을 처음 접했다. 1800-03년에 베네치아의 갈레리아 파르세티(Galleria Farsetti)를 방문하여, 고대 조각의 석고 주형과 바티칸의 조반니 다 우디네의 그림 복제품을 연구하면서 미술 공부를 하였다. 1803년 그는 폰테게토 델라 파리나(Fonteghetto della Farina)에 있는 구 아카데미아 디 피투라 에 스쿠르투라(Accademia di Pittura e Scultura)에서 인체 데생을 배웠고, 1802년에서 1806년 사이에는 숙련된 초상화가이자 16세기 베네치아 그림의 복제 화가인 베르가모 화가 라탄치오 쿠에레나로부터 색채 사용을 공부했다.
1807년 아예츠는 가족 초상화 (트레비소, 시립 박물관 바이요)를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1808년 그는 마침내 레오폴도 치코냐라가 교수법을 현대화시킨 베네치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치코냐라는 아예츠에게 중요한 조언자이자 후원자로 남게 되었다. 이후 그는 신고전주의 화가인 테오도로 마테이니가 운영하는 회화 학교에 다녔다.
1809년 아예츠는 로마 산 루카 아카데미 장학금을 받고 10월에 베네치아를 떠나 로비고, 볼로냐, 피렌체, 시에나를 거쳐 남쪽으로 여행했다. 로마에서 그는 고대 미술을 연구하면서 라파엘로의 방에서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또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예츠는 또한 로마에서 많은 이탈리아 및 외국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토마소 미나르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와 루카스브뤼더(Lukasbrüder) 그룹등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811년 그는 친구 조각가 리날도 리날디와 함께 나폴리로 떠나 아카데미 주최 공모전에 참가하였다. 공모전에 합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나폴리에 머물면서 고대 유물을 연구하고 레오폴도 치코냐라의 조각사를 위해 르네상스 기념물의 드로잉을 완성했다.[2]

1812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그의 그림 라오콘(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을 출품하여 안토니오 데 안토니와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두 번째 참가 약속을 지키기를 꺼려했던 아예츠는 대신 <리날도와 아르미다> (베네치아, 카 페사로)를 제작하여 베네치아로 보냈다. 이 작품은 그의 신고전주의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덕스러운 행동 때문에 카노바는 아예츠를 로마에서 쫓아냈다. 그는 1815년에 나폴리 조아킴 뮈라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낸 후 돌아왔고, 그곳에서 그는 그의 대형 역사화 <알키노우스 궁정의 오디세우스>(1814-16;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를 시작했다.
그가 로마로 돌아온 후, 그는 산 루카 아카데미 공모전에서 앵그르와 같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제치고 <승리한 운동선수> (로마, 산 루카 국립 아카데미)로 1등 상을 받았다. 1813년 로마 토르로니아 궁전 장식을 맡은 펠라지오 팔라지를 도우면서 프레스코 예술가로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 그는, 1816년 카노바의 의뢰로 바티칸 박물관 신관의 키아라몬티 회랑에 여러 프레스코를 그렸다. 그러나 아예츠는 변덕이 심했고 교황 비오 7세의 예술 정책을 기리는 세 개의 프레스코의 완성이 늦어져 카노바를 실망시켰고, 이에 따라 아예츠는 의뢰에서 해제되었다.
1817년 아예츠는 치코냐라 가족의 초상화(베네치아, 개인 소장)와 같이 그의 능력에 더 적합한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고, 그 성과를 힘입어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1821년까지 베네치아와 파도바에서 다양한 궁전의 장식 작업에 참여했다. 베네치아의 두칼레 궁전과 그리티 궁전, 파도바의 자바렐라 궁전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1818년에서 1819년 사이에 두칼레 궁전에서 틴토레토의 그림들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던 중, 카노바와 치코냐라의 격려로 조반니 벨리니와 비토레 카르파초와 같은 15세기 베네치아 거장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1818년에서 1820년 사이에 제작된 아예츠의 작품 피에트로 로시 (밀라노, 개인 소장)에 즉시 반영되었다. 베네치아에서 구매자를 찾지 못한 아예츠는 1820년에 밀라노 브레라 전시회에 이 그림을 보냈고, 이 작품은 큰 호평을 받으며 조르지오 팔라비치노 트리불치오에게 인수되었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과 중세를 기반으로 한 주제 때문에 이 작품은 곧 새로운 낭만주의 회화의 매니페스토로 여겨졌고, 아예츠는 밀라노의 예술 및 문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여기서 그는 작가 알레산드로 만초니를 만났고, 만초니의 역사 비극 <일 콘테 디 카르마뇰라>에서 영감을 받아 동명의 그림을 그렸다. 1821년 이 그림이 브레라에 전시되었을 때, 스탕달에게 극찬을 받았고, 스탕달은 아예츠를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화가라고 선언했다.
성숙기 작품: 밀라노, 1823–48

브레라 아카데미 회화 교수 루이지 사바텔리의 임시 대리로 임명된 후, 아예츠는 1823년에 밀라노로 이주하여 역사화가이자 초상화가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시작했으며, 거의 매년 브레라에서 열리는 연례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그의 작품은 항상 낭만주의자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고전주의자들에게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특히 밀라노 초기 시절의 걸작인 훌륭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키스(1823)와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1825)는 이러한 찬사와 비판이 크게 엊갈렸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카를로 델라 비앙카(1822)와 카롤리나 주키(1825), <친구들 사이의 자화상>(1824–7)를 포함한 많은 초상화들을 그렸다.
그의 가장 충실한 후원자 중에는 이탈리아 독립을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던 인물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란체스코 테오도로 아레세 루치니는 사슬에 묶인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으며, 이는 19세기 가장 뛰어난 초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아예츠는 당대의 인물들을 역사속의 인물로 묘사한 역사화를 여럿 남겼는데, 그 주제의 참신함과 스타일은 큰 감동과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탈리아 역사 속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는 람푸냐니의 음모(1826–9)와 같은 명백한 정치적 암시를 담고 있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림은 <피터 은둔자가 제1차 십자군을 설교하다>와 파르가의 난민들로서, 각각 1829년과 1831년에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전시되었다. 이와 같이 십자군과 그리스 독립 전쟁과 같은 주제를 통해 애국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을 다수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아예츠는 또한 발레리나 카를로타 샤베르를 비둘기 두 마리와 노는 비너스로 묘사한 초상화와 극장 의상을 입은 가수 조반니 다비드의 초상화와 같이 개성적이고 매우 감동적인 초상화들을 여러 점 그렸는데, 이 두 작품은 모두 1830년 브레라 전시회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듬해 그는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추방당한 공주 <크리스티나 트리불치오 벨지오조소의 초상화>를 전시했다. 이 화려한 초상화는 패널에 그려졌는데, 아예츠는 까다로운 초상화 혹은 투명함과 색채의 뉘앙스를 얻고 싶은 작품에 이 기법을 사용했다.
이 시기 내내 아예츠는 회화와 판화를 번갈아 작업하며, 밀라노에 새로 도입된 석판 인쇄를 사용해 뛰어난 결과를 얻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토마소 그로시의 역사시 (1827–8)에 삽화한 두 점의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롬바르디아인들> 작품과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 (1828–31)에 삽화한 연작이다.
1833년,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되는 거대한 캔버스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다양한 역사적, 문학적 자료에서 영감을 받은 <예루살렘 성벽 아래에서 고통받는 제1차 십자군들의 갈증>이었다. 1838년, 그림 작업을 시작한 그는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라는 후원자를 찾았으나, 그는 이 작품이 토리노 왕궁 근위대 홀에 걸렸을 때(1850년) 완성된 것을 보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깊은 인상을 주는 이 그림은, 부분적으로 주세페 베르디의 멜로드라마 오페라 "이 롬바르디 알라 프리마 크로치아타"의 반향으로 인해 아예츠가 방향을 전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즉, 그 이후로 그는 베네치아 1700년대의 전통(특히 피아체타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작품)과 동시대 독일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뮌헨으로의 여행이었는데, 그곳에서 최근 독일 회화의 경향을 느끼고 페터 코르넬리우스,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와 같은 예술가들과 교류하였다.

1838년 페르디난트 1세 (오스트리아)는 대관식을 위해 밀라노를 방문하여 밀라노 왕궁에 걸린 아예츠의 프레스코화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1세의 정치 질서 우화>(1943년 파괴)를 공개하고 브레라 전시회에 전시된 아예츠의 두 점의 새 그림을 감상했다. 아예츠는 황제로부터 새로운 의뢰를 받았으며, 황제는 아름다운 <두 포스카리> (밀라노, 개인 소장)를 구입했다. 한편, 그의 작품의 정치적 함의는 정치인 주세페 마치니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그는 1841년 발표된 기사에서 아예츠를 위대한 애국 화가로 칭송했다. 그동안 아예츠의 그림은 구성과 기법 모두에서 점점 더 정교하고 세련되어졌다. 이는 <자화상> (1848)과 같은 좀 더 친밀한 작품뿐만 아니라, 나폴리 왕자 루포 디 산탄티모가 의뢰하여 1844년 시칠리아에서 그리기 시작한 시칠리아의 만종(1846 완성)과 같은 그의 역사화에도 나타난다.
후기 작품, 1848년 이후

아예츠가 밀라노의 5일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후, 그의 그림은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는 위대한 역사적 주제를 거의 완전히 포기하고 <라 메디타치오네>(1850)와 같은 강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 알레고리를 그리는 데 전념했다. 그는 <비밀 고발>(1848), <복수 맹세>(1851), <경쟁자의 복수>(1853)로 구성된 "복수 삼부작"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마틸데 유바 브란카의 초상화>(1851)에서 볼 수 있듯이 뛰어난 심리적 통찰력과 놀라운 형식 배치 기술을 보여주는 특별한 초상화도 그렸다. 아예츠는 1855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들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1858년 두 번째 뮌헨 여행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의 사회운동인 리소르지멘토를 암시하는 키스 (밀라노, 브레라, 1859년 전시)으로 제작하였는데, 이 그림은 현재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키스를 나누는 커플의 자연스러운 몸짓은 신화나 문학에 대한 지식 없이도 해석할 수 있으며, 현대적인 시선을 사로잡는다.[3]
아예츠는 밀라노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브레라 아카데미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는 그의 명판이 붙어 있다. 브레라 아카데미의 제자들 중에는 카를로 벨지오조소, 아만치오 카타네오, 등이 있었다.[4][5] 생전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그의 역사화는 1970년대 그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때까지 후대 비평가들에게 홀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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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긴 경력을 통해 아예츠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후원자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기 위해 고안된 역사화뿐만 아니라, 신고전주의 양식을 성경이나 고전 문학에서 가져온 웅장한 주제와 결합하려는 열망을 반영하는 작품도 제작했다. 또한 연극 공연 장면도 그렸다. 미술사학자 코라도 리치는 아예츠를 고전주의자였으나 감정적인 격동의 스타일로 진화했다고 묘사했다.[6]
그의 초상화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와 나자렛파의 강렬함을 가지고 있다. 종종 앉아있는 자세의 아예츠의 모델들은 간소한 흑백 의상을 입고 있으며, 장신구는 거의 또는 전혀 없다. 아예츠는 귀족을 위한 초상화를 제작했지만, 동료 예술가나 음악가와 같은 다른 주제도 탐구했다. 경력 후반에는 사진을 활용하여 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예츠가 가장 좋아했던 주제 중 하나는 동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반나체의 오달리스크였다. 이는 낭만주의 화가들이 특히 선호했던 주제였다.[7] 하렘과 그 여성들의 묘사는 예술가들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장면을 그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심지어 아예츠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종교화임에도 관능미가 넘쳐흐른다.
아예츠의 작품에 서명이나 날짜를 기입하지 않는 경향 때문에 그의 경력에 대한 과학적인 평가는 복잡해졌다. 종종 그의 그림에 있는 날짜는 작품이 제작된 시기가 아니라 작품이 취득되거나 판매된 시기를 나타낸다. 더욱이 그는 종종 동일한 구도를 거의 또는 전혀 변형 없이 여러 번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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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 71세의 자화상,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누워있는 오달리스크 (1839)
- 잔 자코모 폴디 페촐리의 초상화
- 예루살렘 성전 파괴 (1867)
- 예루살렘 근처에서 목마른 십자군 (1836–1850)
- 아리스토텔레스, 1811년
- 바이런의 드라마 "두 포스카리"의 한 장면
- 시칠리아의 만종 장면 1 (1821–22)
- 시칠리아의 만종 장면 3 (1821–22)
- 야곱과 에서의 만남
- 하렘의 내부
- 리날도와 아르미다 (1813)
-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키스 (1823)
- 밧세바 (1827)
-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대에 오르다 (1827)
- 감옥에 갇힌 아레세 백작의 초상화 (1828)
- 비너스 차보트 카를로타 (1830)
- 우물가의 리베카(1831)
- 파르가의 난민들 (1831)
- 크리스티나 트리불치오 벨지오조소의 초상화 (1831)
- 자신의 무죄를 선언하는 메리 스튜어트 (1832)
- 롯과 그의 딸들(1833)
- 목욕하는 밧세바 (1834)
- 삼손과 사자 (1842)
- 타마르 (1847)
- 목욕하는 수산나 (1850)
- 라 메디타치오네 (1851)
- 룻 (1853)
- 누드 목욕하는 여인
- 책을 든 오달리스크 (1866)
- 잠자는 오달리스크, 1867년
- 오달리스크 (1867)
- 치오치아라[8]
- 초상화, 마틸데 유바-브란카 (1851)
- 초상화, 산탄티모 공주 (1840–1844)
- 초상화, 안토니에타 타르시스 바실리코 (1851)
- 초상화, 펠리치나 칼리오 페레고 디 크렘나고 (1842)
- 초상화, 안토니에타 비탈리 솔라 (1823)
- 조아키노 로시니의 초상화 (1870)
- 카밀로 벤소 카보우르 백작의 초상화 (1864)
- 마시모 다젤리오의 초상화 (1860)
-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초상화 (1841)
- 콘테 닌니의 초상화 (1823)
- 레위인 에프라임 (1842–1844)
- 승리한 운동선수 (1813)
- 복수 삼부작 (1851)
- 비밀 고발 (1847–1848)
- 경쟁자의 복수 (베네치아 여인) (1853)
-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화상 (1824 또는 1827)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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