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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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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허씨(泰仁許氏)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고려 태조 때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 시산 허씨(時山許氏)라고도 한다.

간략 정보 이칭, 나라 ...

역사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金首露王妃)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으로 전한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부마(駙馬)였으며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태인허씨족보(泰仁許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6세손 허포(許褒)가 고려 때 기천현령(奇川縣令)ㆍ풍해도 관찰사(豊海道觀察使) 등을 지낸 후 태산군(泰山君)에 봉해졌으며, 병부시랑을 역임한 허엄(許儼)과 그의 아들로 이부시랑을 지냈고 시산부원군에 봉해진 허벽(許壁)이 유명하다.

한편 숙종과 예종때 문학이 뛰어났고 청렴 충직하기로 이름난 허경(許慶)은 중서문하평장사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그의 아들 6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는데, 둘째 아들 허사문(許斯文)이 낙안군수를, 넷째 허사행(許斯行)은 사헌부 감찰을, 막내 허사제(許斯悌)는 사평(司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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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태인(泰仁)은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井邑市)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의 합명이다. 태산현은 본래 백제의 대시산현(大尸山縣)을 757년(신라 경덕왕 16) 태산(太山)으로 고쳐 대산(大山)‧태산(泰山) 등으로 불렸다. 940년(고려 태조 23) 빈성을 인의현으로 고쳤으며, 1354년(공민왕 3) 대산군을 태산(太山)으로 고치고 인의를 편입하였다. 인의현은 백제 때 빈굴(賓屈)‧빈성(斌城)‧부성(賦城) 등으로 불렸다가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쳤고, 고려에 인의(仁義)로 고쳤다가 1409년(태종 9)에 태산(泰山)과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태인군으로 승격되었고, 1913년에 정읍군 태인면이 되었다.

분파도

1
허사문
許士文
2
허즙
許楫
2
허도
許棹
인천 이씨 시조
3
허징
許澄
3
허원
許元
4
허황
許璜
5
허인균
許仁均
5
허양균
許亮均
5
허강균
許江均
6
허포
許褒
7
허엄
許儼
8
허벽
許壁
9
허잠
許岑
9
허전
許巓
10
허함
許涵
11
허윤
許倫
12
허경
許慶
13
허사인
許斯仁
13
허사문
許斯文
지평공파
(持平公派)
13
허사의
許斯義
생원공파
(生員公派)
13
허사행
許斯行
직장공파
(直長公派)
13
허사효
許斯孝
현감공파
(縣監公派)
13
허사제
許斯悌
사평공파
(司評公派)

분파

  • 지평공파(持平公派): 허사문(許斯文)
  • 생원공파(生員公派): 허사의(許斯義)
  • 직장공파(直長公派): 허사행(許斯行)
  • 현감공파(縣監公派): 허사효(許斯孝)
  • 사평공파(司評公派): 허사제(許司評)

주요 인물

  • 허포(許褒): 고려 때 기천현령(奇川縣令)ㆍ풍해도 관찰사(豊海道觀察使) 등을 지낸 후 태산군(泰山君)에 봉해졌다.
  • 허벽(許壁):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고 시산부원군(詩山府院君)에 봉해졌다.
  • 허경(許慶): 1101년(숙종 6) 즉위사(卽位使)가 되어 요(遼)나라에 다녀왔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 허사문(許斯文): 세종 때 문과 을과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전적, 양천·금구·보령·낙안 등의 수령을 거쳐 경상도사, 평안도사, 사헌부지평을 역임했다.
  • 허사행(許斯行) : 사헌부감찰,상서원직장(司憲府監察, 尙瑞院直長)
  • 허사효(許斯孝) : 진안현감(鎭安縣監)
  • 허사제(許斯悌) : 통례원좌통찬(通禮院左通贊), 사평(司評)
  • 허진동(許震童):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 박순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았으며, 수운 판관을 지냈습니다. 문집으로 『동상선생문집』이 전해진다.
  • 허구전(許九田): 허진동의 아들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 허구잠(許九潛): 허진동의 또 다른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으며, 명필로도 알려져 있다.
  • 허계(許繼): 김인후의 문인으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철·양자징·기효간 등과 교유했으며, 문집을 남겼다.
  • 허소(許紹): 온화한 성품으로 효제를 실천하며 김인후에게 학문을 배워 뛰어난 학행으로 알려졌으며 스승과 주고받은 시와 문답을 문집에 남겼다.
  • 허섬(許暹):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괄의 난에 창의해 군량 700석, 군포 15동, 종이 700권을 모아 인조가 있는 강화도로 운송한 후 상소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충의를 인정받았고, 병자호란 때는 이흥발과 함께 창의해 청주까지 나아갔으나 화의가 맺어져 귀환한 후 은거하였다.
  • 허국빈(許國賓): 진사시에 합격했고 아버지 허섬과 함께 병자호란 의병에 참여한 후 초당을 세워 은거했으며 문집을 남겼다.
  • 허정량(許廷亮): 7살에 정유재란을 만나 적에게 붙잡힌 아버지를 몸으로 감싸고 칼을 손으로 막으며 자신을 죽이고 대신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외침으로써 적장을 감동케하여 가족을 살려보냈는데, 이 일로 인해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 허권(許權): 허진동의 후손으로, 조선의 마지막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기정진의 문인으로 활동하였다.
  • 허진규(許鎭奎): 일진그룹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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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자

태인 허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급제자 1명, 사마시 10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허사문(許斯文)

무과

허진(許縉)

생원시

허계(許繼) 허숙현(許叔賢) 허재후(許載厚) 허형(許蘅)

진사시

허구연(許九淵) 허국빈(許國賓) 허권(許權) 허석호(許錫祜) 허섬(許暹) 허숙현(許叔賢)

항렬자

  • 대동항렬
자세한 정보 29세, 30세 ...

유적지

자세한 정보 구분, 인물 ...

인구

  • 1985년 태인 허씨 (1,305가구 5,955명) + 시산 허씨 (441가구 1,882명) = 7,837명
  • 2000년 태인 허씨 (2,070가구 6,472명) + 시산 허씨 (591가구 2,029명) = 8,501명
  • 2015년 태인 허씨 6,870명 + 시산 허씨 5,120명 = 11,990명

분적

인천 이씨 - 허황옥의 23세손 허기(許奇)를 득성조라고 하고, 허사문(許士文)의 둘째 아들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며 태인 허씨에서 분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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