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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테오 비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기 화가 (1469~1523)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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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테오 비티(이탈리아어: Timoteo Viti, 1469년~1523년 10월 10일)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로, 때때로 티모테오 델라 비티(이탈리아어: Timoteo della Viti) 또는 티모테오 다 우르비노(이탈리아어: Timoteo da Urbino)라고도 불리었다. 그는 자신보다 14세 연하였던 라파엘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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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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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는 우르비노에서 태어났으며, 화가 안토니오 알베르티의 손자였다. 그의 아버지 또한 화가였다. 조르조 바사리와 말바시아에 따르면, 비티는 1490년부터 1495년 사이 볼로냐에서 프란체스코 프란치아의 도제로 일했다고 하며, 비티의 화풍에서도 볼로냐에서의 수련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확인된다. 1495년 그는 우르비노로 돌아와 최근에 세상을 떠난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를 대신하여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는 산티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두칼레 궁전의 뮤즈 그림들을 완성했다.[1]

일찍이 재능을 보였던 라파엘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열한 살이었으며, 가족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작업장을 계속 운영했다. 비티가 라파엘로의 수련에 기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주 제기되어 왔다.[2] 어쨌든 두 사람은 친구로 지냈고, 비티는 라파엘로의 아틀리에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드로잉들을 확보하거나 물려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17세기에 이를 프랑스의 자본가이자 수집가 피에르 크로자에게 판매했다.[3] 두 화가의 드로잉은 오랫동안 서로의 작품으로 혼동되어 왔으며, 비티가 일부 라파엘로의 드로잉을 위조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현재는 다른 인물의 소행으로 여겨진다).
1503년 비티는 도시의 영주였던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공작을 추방한 체자레 보르자를 위해 깃발을 그렸다. 구이도발도는 1504년에 우르비노를 되찾았고, 비티는 지롤라모 젠가와 함께 아리바베네 주교로부터 성당 내 산 마르티노 수도원의 예배당 장식을 의뢰받았다. 그는 그 후 10년 동안 마르케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으며,[4] 남쪽으로는 시에나까지 가서 약 1508년 무렵 젠가와 함께 페트루치 궁전의 그림 작업에 참여했다.

1514년경 비티는 라파엘로가 조직한 대규모 팀의 일원이 되어 로마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의 키지 예배당에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작업에 참여했다.[5] 또한 라파엘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아테네 학당》 속 라파엘로의 모습 왼쪽에 고대 그리스 화가 프로토게네스로 묘사되어 있는 인물이 비티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바사리는 이를 《미술가 열전》에 언급하지 않았다.[6]

라파엘로의 성숙한 화풍은 이후 한동안 비티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칼리(페자로)의 산탄젤로 미노레 교회에 제작한 대형 제단화(Noli me Tangere)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막달라의 마리아에게 나타난 장면과 전경의 대천사 미카엘이 사탄을 무찌르는 모습, 그리고 성 안토니우스 아바트가 함께 묘사되어 있다(약 1512년). 그러나 이후의 작품들에서 그는 라파엘로의 영향을 거부하고 15세기 말의 미술로 회귀했다. 그의 말년 작품들(예: 1521년 구비오 대성당의 막달라의 마리아)에서는 제자들의 개입이 늘어나면서 화풍이 더 무겁게 변했다.[7]
바사리에 따르면, 티모테오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우르비노에서 정치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1508년에 시의회 의원으로, 1513년에는 수석 시의회 의원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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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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