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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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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군(彭城郡)은 중국의 옛 군이다. 제후왕령으로서는 초국(楚國)으로 일컬었다.
전한
진나라에서는 사천군(사수군)의 일부였다. 초한전쟁기에는 서초의 땅이었다. 사천군은 서초가 멸망한 후 전한이 세운 제후왕국 초나라에 속해 군이 폐지되고 내사의 관할을 받는 내사지가 됐다. 이는 초나라의 서울이 옛 사천군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154년, 초왕 유무가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했기 때문에 난이 평정된 후 한 조정에서는 초나라를 축소해 내사지의 대부분을 패군으로 떼어내 한나라의 직할령으로 두었다. 이후 초나라의 남은 내사지만이 초국이나 팽성군으로 불리게 된다.
서주자사부에 속했다.[1]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14,738호, 497,804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2][1]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7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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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군의 이름을 화락(和樂)으로 고치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후한
요약
관점
39년(후한 광무제 건무 15년) 광무제의 아들인 유영이 초공(楚公)으로 봉해지고, 2년 후인 41년(후한 광무제 17년) 초왕으로 승격되면서 초국(楚國)으로 바뀌었다. 54년(후한 광무제 건무 30년) 임회군의 취려, 수창 2현이 초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70년(후한 명제 영평 13년) 그가 역모죄로 조사를 받고, 경현으로 유배되면서 초국에서 초군(楚郡)으로 격하되었고, 초국시절 편입된 임회군의 취려현, 수창현이 임회군으로 돌아갔다.[3] 88년(후한 장제 장화 2년), 장제가 죽었을 무렵, 육안국왕 유공이 팽성왕으로 책봉되면서 초군에서 팽성국(彭城國)으로 승격되었다.[4] 140년(후한 순제 영화 5년)대 팽성군은 8현 86,170호 493,027명을 거느렸다.[5] 184년(후한 영제 중평 원년), 서주자사 도겸이 서주의 황건적을 토벌한 뒤 본군에 자리잡고 서주를 통치했다. 193년(후한 헌제 초평 4년), 조조의 서주 침공시기 조조가 팽성에서 도겸을 격파했다.[6] 그러나 서주 침공당시 조조의 세력권이었던 연주에서 여포, 진궁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조가 팽성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이후 여포가 서주를 정복하면서 여포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지만, 여포가 하비군에 수도를 두었기 때문에 서주의 중심지에서 벗어났다. 조조가 여포를 격파하면서 조조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7] 조조의 세력권에 편입된 이후, 조거가 팽성왕으로 봉해지면서 팽성국의 지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8]
서진
서진대 팽성국은 7현 4,121호의 주민을 거느렸다.[9]
유송
서진대처럼 서주의 자사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명제 태시연간 북위의 침공으로 유송이 회수이북 전역을 상실하면서 팽성군은 북위가 통치하게 되었다. 북위가 점령하기 이전까지 팽성군은 5현 8,627호 41,231명을 거느렸다.[10]
북위
북위대 팽성군은 유송대와 같이 서주의 중심지가 되었다. 북위대 팽성군은 6현 6,339호 23,841명을 거느렸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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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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