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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레이턴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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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레이턴 초대 레이턴 남작(Frederic Leighton, 1st Baron Leighton, 1830년 12월 3일~1896년 1월 25일)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화가, 제도사, 조각가였다. 그의 작품들은 역사적, 성경적, 고전적 주제를 아카데미 스타일로 묘사했다. 그의 그림들은 생전에는 엄청난 인기와 높은 가격을 자랑했지만, 20세기 초까지 수십 년 동안 인기를 잃었다.
레이턴은 귀족 작위를 받은 다음 날 사망하여, 세습 작위가 단 하루 만에 소멸됨으로써,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작위를 보유한 인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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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레이턴은 스카버러에서 어거스타 수잔과 의사 프레더릭 셉티머스 레이턴 박사(1799–1892)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이턴의 할아버지인 제임스 보니페이스 레이턴 경(1769–1843)은 두 명의 러시아 차르—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의 주치의였으며, 그들을 섬기면서 재산을 축적했다.[2] 레이턴은 가문의 부를 바탕으로 경력을 쌓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평생 그에게 용돈을 주었다.[3] 그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인 알렉산드라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전기 작가였다.[4]
그는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유럽 대륙에서 예술 교육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에두아르트 폰 슈타인레에게서, 그 다음에는 조반니 코스타에게서 배웠다. 17세 때인 1847년 여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만나 연필과 과슈로 그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는 쇼펜하우어의 생전에 그린 유일한 전신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5] 그는 24세에 피렌체를 방문하여,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치마부에의 성모자 성화가 보르고 알레그리 거리를 행진했다는 전설을 묘사한 《치마부에의 영광된 마돈나》을 그렸다[a]. 1855년부터 1859년까지 파리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앵그르, 들라크루아, 코로, 밀레를 만났다.
여행은 레이턴의 삶에서 어린 시절부터 중요한 부분이었다. 십대 후반까지 그는 가족과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살았으며, 이미 피렌체와 로마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주요 도시들을 방문했는데, 그 후로도 평생 여러 차례 그 도시들을 방문하였다. 이십대 후반에는 로마와 파리에서 장기간 거주했으며, 1857년에는 북아프리카로 여행하였다. 런던에 정착한 후에도 사망 직전까지 매년 여행을 다녔다. 레이턴이 최소 한 번 이상 방문한 국가로는 오스트리아, 알제리, 이집트, 프랑스, 독일, 그리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레바논, 모로코,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스페인, 스위스, 시리아, 터키 등이 있다.
1860년 그는 런던으로 이사하여 라파엘 전파와 교류했다. 그는 1861년 피렌체 잉글리시 공동묘지에 있는 로버트 브라우닝을 위해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묘비를 디자인했다. 그는 1864년에 왕립예술원의 준회원이 되었고, 1878년에는 회장(1878~96)이 되었다. 그의 1877년 조각상인 《구렁이와 씨름하는 운동선수》는 당대에 현대 영국 조각의 르네상스를 열었다고 여겨졌는데, 이는 신조각 운동이라고 불린다. 미국 미술 평론가 얼 신은 당시 "레이턴을 제외하고는 켄징턴 박물관의 아치형 통로에 정확한 프레스코 인물화를 그려넣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6] 그의 그림들은 1900년 만국 박람회에서 영국을 대표했다.
그는 수도의 주요 건물과 공공 미술을 기록한 런던 조사 위원회의 첫 번째 회장이었다.[7]
레이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모델 중 한 명과 사생아를 두었다는 소문과 레이턴이 동성애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계속해서 논쟁거리가 되었다.[8] 그가 1856년 피렌체에서 만난 시인 헨리 윌리엄 그레빌과 강렬하고 낭만적인 관계를 즐겼다는 건 확실하다.[9] 그레빌은 레이턴에게 편지를 쏟아부었지만, 낭만적인 애정은 일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이턴이 일기를 남기지 않았고, 그의 편지에는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레이턴을 둘러싼 비밀을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지만, 그의 예술 스튜디오 주변에 젊은 남성들이 많았다는 점은 분명하다.[8]
레이턴은 1878년 윈저성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10] 8년 후에는 남작이 되었다.[11] 그는 1896년 새해 영예 훈장에서 귀족 작위를 받은 최초의 화가였다. 레이턴 남작 작위를 부여하는 특허장은 1896년 1월 24일에 발행되었으며,[12] 레이턴은 다음날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으로 그의 세습귀족 작위는 단 하루 만에 소멸되었는데, 이는 귀족제 역사상 기록이다.


런던 홀랜드 파크에 있는 그의 집은 레이턴 하우스 박물관으로 바뀌었다.[13] 그곳에는 그의 그림과 드로잉, 그리고 그의 옛 미술 소장품 중 일부가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존 에버렛 밀레이 경이 레이턴에게 헌정한 그림과 같은 올드 마스터 외에도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있다. 이 집에는 그의 이즈니크 타일 컬렉션을 포함하여 레이턴에게 영감을 주었던 소품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심에는 웅장한 아랍 홀이 있는데, 이는 코르누코피아 10호에 소개되었다.[14] 레이턴 하우스 박물관에는 영국의 역사적 장소를 의미하는 블루 플라크가 설치되어 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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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소총대



레이턴은 열정적인 의용군 병사였으며, 1860년 10월 5일에 38대 미들섹스 (예술가) 소총 의용군단(나중에 예술가 소총대로 알려짐)에 첫 번째 그룹으로 입대했다.
그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몇 달 만에 중대장으로 승진했다. 1869년 1월 6일, 대위 레이턴은 부대 총회에서 예술가 소총대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그는 소령으로, 1875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레이턴은 1883년에 지휘관직에서 사임했다. 화가 제임스 휘슬러는 당시 예술가 소총대의 지휘관이었던 프레더릭 레이턴 경을 "왕립예술원의 대령이자 예술가 소총대의 회장 – 게다가 그림도 좀 그린다!"라고 유명하게 말로 묘사했다. 1896년 2월 3일 그의 장례식에서 그의 관은 예술가 소총대가 구성한 의장대를 지나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운구되었다.[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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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예
- 1864년: 왕립예술원 준회원
- 1868년: 왕립예술원 아카데미 회원
- 1878년: 왕립예술원 회장
- 1878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장교
- 1878년: 최하위 훈작사
- 1886년: 영국 준남작 작위 수여
- 1889년: 프랑스 학술원 준회원
- 1896년: 영국 귀족 작위 수여
주요 작품
- 《브루넬레스키의 죽음》, 1852, 캔버스 유화
- 《어부와 사이렌》, 1856–58년경, 66.3 x 48.7 cm
- 《치마부에의 영광된 마돈나》, 1853–55년경,[18] 캔버스 유화.
- 《줄리엣이 생명 없는 듯 발견되다》, 1858년경[19]
- 《로마의 빌라 몰타》, 1860년대,[20] 캔버스 유화
- 《화가의 신혼여행》, 1864년경, 83.8 x 77.5 cm
- 《어머니와 아이》, 1865년경, 48.2 x 82 cm
- 《악타이아, 해변의 요정》, 1868,[21] 캔버스 유화, 57.2 x 102.2 cm, 캐나다 국립미술관, 오타와.
-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1869년경, 138.2 x 106.5 cm
- 《알케스티스의 시체를 두고 죽음과 씨름하는 헤라클레스》, 1869–71, 132.4 x 265.4 cm
- 《저녁 기도 후》, 1871, 111.5 x 71.5 cm,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
-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그리스 소녀들》, 1871, 84 x 129.5 cm
- 《테레시나》, 1874년경, 크라이스트처치 미술관 테 푸나 오 와이웨투, 뉴질랜드
- 《음악 수업》, 1877년경, 92.8 x 118.1 cm
- 《구렁이와 씨름하는 운동선수》, 1877 ,[22] 청동 조각
- 《나우시카아》, 1878년경, 145 x 67 cm
- 《실 감기》, 1878, 100.3 x 161.3 cm
- 《하렘의 빛》, 1880년경, 152.4 x 83.8 cm
- 《목가》, 1880–81년경
- 《결혼》, 1881–1882년경, 145.4 x 81 cm
- 《시몬과 이피게니아》, 1884,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 《붙잡힌 안드로마케》, 1888년경, 197 x 406.5 cm
- 《프시케의 목욕》 1889–90년경, 189.2 x 62.2 cm, 테이트 갤러리
-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1892년경, 169 x 169 cm, 레이디 레버 미술관
- 《불타는 6월》, 1895, 캔버스 유화, 120.6 x 120.6 cm, 폰세 미술관, 푸에르토리코
- 《현명하고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 (프레스코)[23]
- 《팔찌》
- 《포이베》 55.88 x 60.96 cm
- 《목욕하는 사람》
- 《레이턴 프레스코》, 전쟁에 적용된 산업 예술과 평화에 적용된 산업 예술
- 《콘월 해안에서 초기 브리튼족과 교역하는 페니키아인》, 1895. 런던 로열 익스체인지 벽화
- 《페르세포네의 귀환》, 1891, 캔버스 유화, 리즈 미술관[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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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유화, 1892, 레이디 레버 미술관
- 《나태한 자》, 1885
- 《구렁이와 씨름하는 운동선수》, 백색 대리석 조각, 1888–1891 (개인 소장: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에 대여)
- 《헤로의 마지막 밤샘》, 1880
-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1891, 워커 미술관, 리버풀.
-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보다》
- 《화가의 신혼여행》, 1864
- 《추억》, 1883
- 《프시케의 목욕》, 1879
- 《포로 안드로마케》, 캔버스 유화, 1886–1888,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
- 《사이몬과 이피게니아》, 캔버스 유화, 1884,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 《메이 사르토리우스의 초상》
- 《비온디나》, 1879
- 《페르세포네의 귀환》, 1891
- 《아기 고양이들》, 1883
- 《공작에게 먹이를 주는 소녀》, 1863c.
- 《고독》, 1890c.
- 《실 감기》,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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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로몰라 – 레이턴이 삽화를 그린 조지 엘리엇의 1863년 소설
각주
일반 참고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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