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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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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許篈, 1551년 ~ 1588년 9월 1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이자 시인이다. 자(字)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 본관은 양천이다.[1] 강원도 강릉 출신.
1568년(선조 1) 증광시(增廣試)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1572년(선조 5년) 3월 10일 춘당대시에 병과 3위로 급제했다.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창당 멤버였으며, 그는 동인의 초기 멤버였다.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들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1583년 경기도순무어사로 수원지역에서 군기가 정돈되지 못한 일로 수원부사 한옹(韓顒), 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했으며, 나중에 병조판서로 있던 이이의 근무 태도를 규탄했다가 역으로 종성, 갑산 등에 유배당한 뒤, 벼슬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다가 황달,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허엽의 아들이고 허균의 형이며, 허난설헌의 오빠이다.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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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초기 생애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초당동 허엽 별장에서 태어났으며 허엽의 아들이고, 당색으로는 동인이었다. 강릉 출신이고 뒤에 한성부로 와서 생활했다. 서경덕의 문인들과 이황, 이언적, 조식의 문인들이 모여서 동인을 형성했으므로 아버지 허엽은 화담의 문인으로 동인의 당원이 되었고, 그도 자연스레 동인의 당원이 되었다. 허성은 그의 이복 형이었고, 허균과 허난설헌이 그의 친동생들이었다. 또한 친동생 허난설헌, 허균에게 손곡 이달에게 가서 시를 배우도록 그가 추천했다.
형제들과의 관계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두 아들 허친, 허채는 허균의 옥사 당시 허균이 자신들의 할머니와 아비를 이간질했고, 이로 인해 그가 허균을 원망했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미암 유희춘(柳希春)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568년(선조 1) 증광시(增廣試) 생원시에 1등 1위로 장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날 그의 형 허성(許筬)도 증광시 생원시에 1등 5위로 합격했다.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반
1572년(선조 5년) 3월 10일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린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응시하여, 그 다음날 친시문과에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였다. 그해 검열이 되었다. 1573년 군직(軍職)에 올랐다가 당해년도 홍문록(弘文錄)에 들었고, 또 그 해 김효원(金孝元)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조정의 당론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그는 부친 허엽을 따라 동인이 되었으며, 김효원(金孝元) 등과 함께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과 대립하였다.
1574년에는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됐다가 그해 5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수행사신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자청하여, 질정관 조헌 등과 함께 5월 11일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그는 뒤에 명나라를 다녀온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그해 10월 귀국하여 부수찬, 1574년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됐다. 1575년 이조좌랑으로 김효원(金孝元) 등과 동인의 선봉이 되어 이이(李珥), 박순(朴淳), 성혼(成渾) 등 서인들을 공격하는데 앞장서, 이들과 대립하였다.
관료생활 중반
1577년(선조 10) 교리를 거쳐 1578년(선조 11) 함경도 순무 어사로 다녀왔다. 1578년에는 선조의 면전에서 창빈 안씨를 첩이라 칭했다가, 서얼 콤플렉스, 방계승통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의 눈밖에 났다. 1579년 장령, 사인을 거쳐 응교가 됐다. 1580년 부친상으로 사직했다가, 1582년 상복을 벗고 사복시정, 응교가 됐다.
1581년 홍문관전한 이산보가 직제학이 됐는데, 그는 이산보를 두고 이산보는 하나의 똥덩어리일 뿐이다(李山甫特一糞塊也)라는 혹평을 했다가[2], 그대로 누군가 실록에 기록을 남겼다. 그가 이산보를 혹평한 사유는 알 수 없다.
1582년 원접사 이이의 천거로 좌통례(左通禮) 황정욱(黃廷彧), 응교 허봉(許篈), 서산군수 고경명(高敬命)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다녀왔다.
관료생활 후반
1583년(선조 17) 순무 어사로 경기에 파견하여 수원의 군기가 허술하다고 부사 한옹을 탄핵하였다. 1583년(선조 16) 홍문관전한과 그해 9월 창원부사를 부임했다. 1583년 경기도순무어사로 파견됐다가 수원에서 군기가 정돈되지 못한 것을 지적, 수원부사 한옹(韓顒)의 파면을 청했고, 동시에 병조판서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
최종 관직은 통훈대부 사헌부 장령, 성균관 전한에 이르렀으며 1584년 병조판서 율곡 이이(李珥)의 직무상 과실을 탄핵하였다가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고, 갑산(甲山)으로 이배되었다. 이후 율곡 이이는 허봉은 경망하고 일을 좋아하지만 간사한 사람은 아닙니다라며 선조에게 관대한 처분을 청했지만 선조는 거절했다. 그와 함께 탄핵을 논의했던 송응개, 박근원 등 이이를 비판하던 3명의 신하들이 이때 동시에 유배되었는데, 이 사건을 두고 계미삼찬이라고 부른다.
유배와 석방, 최후
유배지의 함경도관찰사 권극지는 그를 극진히 대했으며, 이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호당(湖堂)에서 같이 독서한 유성룡의 도움으로 이듬해 석방되었다. 풀려난 뒤 정치에 뜻을 버리고 나가지 않는다.
1585년 아버지 허엽의 고향 친구 노수신(盧守愼)이 선조에게 건의해 허봉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상소하여 선조는 그를 허봉을 석방했지만 한성부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시켰다. 다시 1585년 의정부영의정 노수신의 건의로 다시 조정에 재기용되었지만 그는 거절하고 전국을 유랑, 백운산(白雲山)을 유람하기도 했고, 인천으로도 갔다가 춘천 등을 방문하며 유랑하였다.
방랑생활을 하다가 금강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사명당을 찾아가 불교의 교리에 대한 토론을 불교에 심취했다. 1588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며 비로봉을 구경하고 대명암에서 지냈다. 그는 술을 너무 하여 병이 앓다가 냉담(冷痰)증이 되자 의사에게 보이려고 동교(東郊)로 향해 가다가 1588년(선조 21) 9월 16일 금강산 근처 강원도 김화군 생창역(生昌驛)에서 황달증상과 폐렴 드등의 합병증으로 38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었다. 저서로는 《하곡집》등이 있다.
사후
그 근처 지방관으로 있던 친구 서인원(徐仁元)이 그의 장례를 도와주었다. 실록에는 그가 김화에서 사망한 사실만 간략하게 수록됐다.[3] 한때 장유(張維)는 허봉을 당대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꼽았다고 한다.
경기도 과천군 동면 상초리(霜草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아버지 허엽의 묘소 서쪽에 매장됐다가 뒤에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맹리(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1에 아버지 허엽 묘소와 함께 이장되었다. 후에 이곳에는 그의 가족묘소가 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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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하곡집》
- 《하곡수어 (荷谷粹語)》
편저
- 《해동야언 (海東野言)》
- 《이산잡술 (伊山雜述)》
- 《의례산주 (儀禮刪註)》
- 《독역관견 (讀易管見)》
기행문
- 《하곡조천기》
- 《북변기사 (北邊記事)》
창빈안씨 첩 논란
요약
관점
서얼 콤플렉스에다가 방계승통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여러번 하였다. 그러나 대소신려들은 모두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이때 그는 선조의 면전에서 창빈 안씨는 첩이라 했다. 1878년(선조 11) 5월 11일에는 덕흥대원군 사당의 이름을 정하는 것을 놓고 토의하던 중, 경연관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칭했다가 선조는 크게 분노하였다.
강관(講官) 허봉(許篈)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않습니다. 요즘 대원군 사당을 일컬어 ‘가묘(家廟)’라 하고 있는데 국가에 어찌 가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원묘(大院廟)’라고 하거나, 아니면 ‘사친묘(私親廟)’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안빈(安嬪)을 우리 조모라고 하시는 것도 역시 매우 잘못입니다. 비록 대원군이 계시더라도 적모(嫡母)에 압존(壓尊)되어 감히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는 법인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대궐에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받으셨으니 어찌 감히 조모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원군은 제후의 별자(別子)로서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사당이 되었으나 안빈은 바로 첩모이기 때문에 시조의 사당에 들어 갈 수가 없고 다만 사실(私室)에서 제사해야 합니다.(名不正則言不順。 今者稱大院君廟曰家廟, 國家安有家廟乎? 只稱大院廟, 或稱私親廟, 可也。 殿下稱安嬪爲我祖, 亦甚非也。 雖大院君在, 亦壓於嫡, 而不敢母其母, 況殿下入承大統, 安敢稱祖乎? 大院君以諸侯別子, 爲百世不遷之廟, 安嬪是妾母, 不可入始祖之廟, 只合祭之私室。)"
하니, 상이 성난 음성으로 이르기를,
"허봉이 감히 이런 허다한 이야기를 하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말로써 뜻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안빈은 실지로 조모인데 우리 할머니라고 한다 해서 무엇이 해롭단 말인가. 그리고 가묘라고 한다 해서 또한 무슨 방해가 되기에 허봉이 감히 비교하면서 말을 하여 함부로 의논을 만들어 내는가.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하자, 좌상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라 옛글만을 읽었을 뿐, 실지로 일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지나친 논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상께서는 모두 포용하셔야 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기를 꺾으신다면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선조는 허봉에게 누가 첩이냐고 따졌다. 선조는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대놓고 지적하자(安嬪是妾母) 불같이 화를 냈는데, 좌의정 홍섬이 겨우 변호하여 선조의 진노를 가라앉힌 일도 있다. 그러나 이후로도 허봉은 창빈 안씨를 가리킬 때 첩, 첩부인이라는 표현을 썼고, 선조는 노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선조는 허봉을 처벌하려 하지는 않았다. 선조는 재위 도중 여러 번에 걸쳐서 생부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사림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족 관계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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