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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황후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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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황후 울씨(孝懿皇后 鬱氏, 726년 ~ 775년 음력 2월 5일)는 발해 문왕의 황후이다. 중국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촌에 있는 룽터우산 고분군에서 묘지명이 발굴되었다.[1][2]
생애
발해의 제3대 국왕인 문왕의 아내로, 726년 발해 하신향(夏神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조부 모두 무신으로 나라의 공을 세웠다.
문왕이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한 755년경에 황후가 되었다.
775년(보력 2년) 음력 2월 5일, 문사당 측간의 침전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10월 24일, 진릉(珍陵)에 매장되었다.
일본의 역사서인 《속일본기》에는 776년 문왕의 왕비가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효의왕후의 묘지명에서 발굴된 비문의 내용에 따라 금석문과 역사서가 교차 검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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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발굴
2004년~2005년 사이 지린성 허룽시 룽터우산 고분군에서 발해 시대의 무덤 14기가 발굴되었다. 중국 정부는 룽터우산 고분군에서 발굴된 14기 중 M12와 M3으로 명명한 두 기의 무덤이 각각 효의황후와 간왕의 황후인 순목황후의 능이라고 밝혔다. 무덤은 대형 돌방무덤의 형태이다. 이 근방에서는 1949년 9월 정혜공주묘가 발굴되었고 1980년 10월에는 정효공주묘가 발굴되었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는 각각 문왕의 둘째 딸과 넷째 딸이며, 이들이 효의황후의 자녀인지는 알 수 없다.
중국 정부가 2025년 효의황후의 묘지명 전문을 공개하였다.
효의황후 묘지명
요약
관점
- 아! 황하 가운데 섬(시경 관저 편의 배경)에서 시인이 그 화목한 소리를 표했으니,
- 노나라 부인(왕비)이 가풍으로 전한 그 기이한 옛 이야기를 기록한다.
- 아름답고 정숙한 덕행을 자세히 구하고, 행실을 쌓고 공적을 쌓아 왕의 교화를 도왔으니,
- 왕비의 의로움이 바로 여기에 있는가!
- 황후 울씨는, 본래 하신(夏神)이라는 고을 사람이다.
- 숙신(만주 일대)의 복된 땅은 오래전부터 매가 모이는 숲이라 불렸고,
- 곤륜산처럼 빼어난 곳은 일찍이 호랑이 같은 신하들이 사는 땅이라 일컬어졌다.
- 오직 그 조상과 아버지가 장수의 가문으로 우뚝 서서,
- 성스러운 조정에 충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나라를 위했다.
- 변방을 안정시킨 계책은 영평후의 큰 공로요, 적에게 달려가는 마음은 이장군의 웅장한 기개였다.
- 병부를 쪼개고 인장을 받아 관작과 벼슬을 대대로 이어 전했으니,
- 산과 강처럼 길이 변치 않고 띠와 숫돌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 황후는 소나무 숲에 모습을 드러내어 흐르는 구름에 신령스러운 그림자를 떨쳤고,
- 계수나무 떨기에 빼어난 아름다움을 토해내어 흐르는 달에 기이한 빛을 휘둘렀다.
- 푸른 골짜기에 봄이 돌아와 붉은 바위에 꽃이 피니, 버들가지처럼 가늘고 고왔으며,
- 홰나무 마을에 살며 아름답고 탐스러웠다.
- 어려서부터 온화한 행실을 배웠고, 자라서는 은혜롭고 어진 마음을 품었으며,
- 말에는 농담이 없었고, 눈은 망령되이 보지 않았다.
- 난초의 향기처럼 입궁하여 현명함으로 은혜를 입으니,
- 모든 궁인들이 다투어 추대하고 우러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 경운(慶雲) 연간에 사람들이 마침내 거처를 옮겨 용천(상경 용천부)에 도읍을 정하고,
- 부지런히 황업을 계승할 때 황후에 책봉되어 황궁에서 교화를 도왔다.
- 도량이 깊고 넓어 우뚝 솟은 산보다 높았으며,
- 공손히 사덕과 십의를 두루 갖추어 패옥 소리가 들리게 하였다.
- 진실로 총명하고 진실로 지혜로워 고상한 운치는 천연스러웠으며,
- 온화하고 착하여 뛰어난 재주가 한결같았다.
- 화장을 하지 않아도 도의의 숲에서 자유로웠고,
- 비단 옷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시서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즐겼다.
- 덕은 동국에서 가장 높았고, 용모는 서시와 같았다.
- 아미(나비 눈썹)의 마황후에 견줄 만하고, 짐승 고기를 멀리했던 번희를 생각나게 하였다.
- 예로써 부지런히 하고 정절로써 지조를 지켰으니,
- 군자의 좋은 짝이 됨에 누가 그녀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 은혜롭고 아름다운 정치로 봄에는 화장 거울을 치우게 하였고,
- 미묘한 사색에 깊이 연구하여 가을에는 기쁨을 주는 부채를 찾게 하였다.
- 비록 음여화가 총애를 받고 신부인이 은혜를 입었다 해도,
- 여사(여관이 기록하는 책)에 쓰인 바는 모두 아래 등급에 불과하였다.
- 게다가 마음을 본각(불교의 깨달음)에 노닐게 하고 진여(불교의 진리)의 참맛을 그리워하며,
- 반야(지혜)의 배를 타고 열반의 언덕에 이르기를 원하였다.
- 남을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으며, 새끼줄과 뱀을 분명히 구분하였고,
- 깊이 이해하고 깊이 알아서 미세한 진리를 세밀히 나누었다.
- 이로써 교화를 펴는 도리는 여절을 제치고 먼저 울려 퍼졌고,
- 불법을 수호하는 마음은 담칭(고승)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귀하게 여겨졌다.
- 문자가 생긴 이후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 혹자는 덕은 없으나 용모만 있고, 혹자는 겉치레만 배우고 속은 부족했다.
- 우리 황후처럼 응감하여 태어나 아름다움과 윤리를 겸비하고, 덕행이 모두 갖추었으며,
- 안팎의 경전(유교, 불교)을 두루 읽고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 부처께 예불하고 경전을 외며 주군을 보호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이는 없었다.
- 어찌 궁인의 모범이 되어 삼궁에 화목함을 입히는 데 그쳤겠는가.
- 또한 어미로서의 도리가 깊이 자비로워 모든 백성에게 그 은혜가 미쳤다.
- 옥대는 새벽에 열려 붉은 비단에 새겨진 새로운 글이 찬란했고,
- 주렴은 밤에 열려 부용(연꽃)의 신령스러운 광채를 발하였다.
- 우리 황제 폐하의 성스럽고 밝은 교화가 해가 비추고 하늘이 임하는 것과 같다면,
- 우리 황후의 현명하고 지혜로운 도리는 해가 운행하고 땅이 싣는 것과 같았다.
- 어찌 갑자기 흐르는 물을 따라가고 문득 죽음의 배가 움직였다는 말인가.
- 보력 2년 2월 5일 무진에 문사당의 측침에서 춘추 쉰 살로 세상을 떠나셨다.
- 슬픔의 눈물이 흘러, 성주(聖主)께서 마음 아파하시니,
- 이보다 더 처참한 슬픔이 어디 있겠는가.
- 그 해 겨울 10월 24일 갑신에 진릉의 언덕에 예로써 옮겨 장사 지냈다.
- 황상께서는 현악기를 거두고, 수라를 줄이고, 조회를 폐하며, 통곡하셨다.
- 동원 비기, 우보(깃털 장식), 고취(풍악대)를 하사하는 등 장례의 의식을 모두 넉넉하게 주셨다.
- 수많은 수레와 말이 구름처럼 움직이며 궁궐을 떠나니 기세가 낮아졌다 높아졌고,
- 깃발은 노을처럼 날리며 청문을 나서 펄럭였다.
- 관적(왕비의 관복)으로 황후의 도리를 갖추었으니,
- 예가 준엄하게 능을 경영하여, 아름다운 기물들을 세워 안장하는 것은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두었으니,
- 마치 신녀의 대와 같고 큰 강이 굽이치는 곳에 교인의 보배가 연접한 것 같았다.
- 백양나무 숲길 위로 슬픈 바람이 불어와 처량하고 차가웠고,
- 푸른 소나무 언덕 위로는 조각구름이 엉겨 아득하였다.
- 이에 명을 짓는다.
명문
- 첫째, 황후를 택하는 제도는 아름다운 경전에 예의가 갖추어져 있으니,
-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窈窕淑女)은 반드시 그 어진 이를 취한다.
- 나라의 흥망이 이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 강가 새(관저)의 의로움을 밝은 임금이 사랑하셨다.
- 둘째, 산천의 감응에는 반드시 뛰어난 영혼이 있으니, 장군의 기개와 장사의 정기이다.
- 여섯 가지 기이한 계책과 훌륭한 전략으로 만리장성과 같은 방어를 이루었고,
- 의관을 한 가문이 띠와 숫돌처럼 끊어지지 않을 이름을 얻었다.
- 셋째, 아! 울황후여, 복된 땅의 물가에서 옥나무 같은 곧은 바탕과 붉은 꽃 같은 아름다움을 비로소 피우셨네.
- 흐르는 구름은 그림자를 날리고, 흐르는 달은 주위를 맴도네.
- 버들을 본받아 가늘고 고왔고, 사는 마을은 홰나무라 불렀네.
- 넷째, 황제의 뜻으로 간택되어 황궁에 입궐하시니,
- 아름다운 궁실에 두터운 은혜가 내리고 계수나무 궁전에 향기로운 바람이 불었네.
- 깊은 도량은 파도처럼 넓었고, 높은 기상은 봉우리처럼 우뚝 솟았네.
- 도덕이 크게 밝아져 아름다운 정치가 때로 화목해졌다.
- 다섯째, 화장을 빌리지 않았고 비단 옷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 행동은 규범에 맞았고, 행실은 절차탁마를 따랐다.
- 연꽃처럼 훌륭하고 순박하고 정직함이 많았으며,
- 짐승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눈썹은 나비와 같았다.
- 여섯째, 반야(불교 지혜)를 정밀히 연구하고 마음을 진여(불교 진리)에 머물게 했으며,
- 유교와 불교를 숭상하여 내외의 경서를 익혔다.
- 홀연히 세상을 떠나니, 외로운 슬픔이 가득하고,
- 서리 내린 창가는 고요하고 달이 진 병풍은 텅 비었네.
- 일곱째, 황제께서는 조회를 폐하고 음악을 거두었으며, 영구(상여)를 바라보셨다.
- 떠나는 말은 구름과 같고 날리는 깃발은 노을을 그리는 듯했다.
- 장례를 보내는 길에는 만가(상여 소리)가 호각 소리와 이어지고,
- 능이 있는 곳에는 차가운 꽃이 영원히 덮이네.
— 보력 2년(775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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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황후 묘지명을 통해 알려진 사실
- 황후의 성은 울씨(鬱氏)이며, 기존 사서에 등장하지 않았던 발해인의 성씨이다.
- 775년 50세로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출생년도를 역산하면 726년이다.
- 따라서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738년생)와 12살의 차이가 나므로 정혜공주의 생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비문의 내용에 따라 정혜공주의 생모가 아닌점, 상경 용천부 천도시기(755년)에 황후에 책봉된 점을 미루어 효의황후 이전에 또다른 황후가 존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 보력(寶曆)과 대흥(大興)에 이어 문왕의 새로운 연호인 경운(慶雲, 755년 전후 추정)이 금석문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 발해 스스로를 동국(東國)으로 표현하였다.
- 문왕을 가리켜 황상(皇上), 우리 황제(我皇)로 지칭하였다.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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